228화
두 가지 할 일이 있다.
하나는, 사냥 대회의 다음 미션을 수행하기.
다른 하나는, 달빛의 명사수가 내게 제시한 스페셜 퀘스트를 은밀하게 완수하기.
다행인 점은 이 둘이 완전히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거인 곰 혹은 거인 사슴 중 하나를 택하여 모든 개체를 섬멸하십시오.]
사냥 대회의 이번 미션은 팀전이었다.
현재 생존 중인 30명의 도전자들은 이제 팀을 결정해야만 한다.
곰을 사냥하는 팀에 들어갈지, 아니면 사슴을 사냥하는 팀에 들어갈지.
팀이 정해지는 방식은 지난 스테이지와 유사했다.
처음 사냥하는 것이 사슴이면 사슴 팀, 첫 사냥이 곰이면 곰 팀인 것이다.
[팀 배치 현황]
- 곰 팀: 0/15
- 사슴 팀: 0/15
“호영이 형! 어느 팀으로 들어갈지 빨리 결정해야 할 거 같은데?”
“잠깐만! 잠시 생각 좀 하고.”
팀 선택권을 갖기 위해선, 김세용의 말대로 최대한 빠른 사냥이 필수적이다.
어느 한 팀의 슬롯이 다 채워지면, 첫 사냥 전에도 자신의 팀이 자동적으로 결정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
‘흠…….’
어느 팀이 유리할지는 아직 모른다.
또한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다만, 나에게는 팀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것.
바로 스페셜 퀘스트 때문이었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성공 시: 호감도 +5]
이것이 나에게만 부여된 스페셜 퀘스트.
그런데 그 내용이 좀 괴랄하다.
사냥 대회 중에 아무 것도 사냥을 하지 말라니.
팀원들에게 다 맡기고 무임승차를 하라는 것인데, 탑에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짓이었다.
‘성공하면 호감도가 +5.’
보상만 놓고 보면 그리 매력적이진 않지만, 이번에도 내게 선택권 같은 건 없다.
탑에서 한 군주에게라도 미운털이 박힌다면, 그게 언제 어디서 비수가 되어 내 등 뒤에 꽂힐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사냥터의 영역을 대폭 축소하겠습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헬리오 산에는 반투명한 결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와 씨! 이게 뭐야!”
갑자기 김세용의 모습이 슝- 하고 사라진다.
아마도 우린 새로운 사냥터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일 터.
슝-
내 몸 역시 김세용을 따라 결계 내부로 전송된다.
겪으면 겪을수록 여긴 탑 같은 곳이었다.
“형! 여기 대박이네. 산 주제에 지가 탑인 줄 알아!”
“여길 모방해 탑을 만든 건지도 모르지.”
“그런가?”
[지금부터 미션을 시작합니다.]
헬리오 산의 선언과 함께 주변에 흐르는 기운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미니맵에는 드디어 수많은 점들이 찍히며 사냥감의 위치와 수를 표시해 주었다.
사냥터는 곰과 사슴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많긴 더럽게 많네.’
정확한 식별이 어려울 만큼 미니맵에는 점들이 많이 찍혀 있었다.
그럼에도 사슴이 훨씬 많아 보이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 압도적일 정도로.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이 정보는 참고만 하십시오. 결정은 당신의 몫입니다.]
[곰 개체 수: 90, 사슴 개체 수: 900]
개체 수가 무려 10배의 차이.
두 종족 간의 전투력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개체 수에서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애매하긴 하네.’
언뜻 보기엔 곰이 훨씬 유리해 보이지만 상당히 큰 변수가 있다.
사슴의 개체 수가 월등히 많기에 도전자들이 맞닥뜨릴 확률이 높은 종족은 사슴이며, 상위 랭커들은 재빨리 사슴 팀을 선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팀 전력에 불균형이 생길 공산이 크다는 의미.
게다가 사냥터에서 곰은 개체 수가 적은 만큼 발견 또한 어렵다.
처음에는 곰 팀이 유리해 보여도 시간이 지날수록 개체 수의 균형이 맞춰지는 상황도 배제할 순 없다.
공략집이 어느 한쪽을 적극 추천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세용아, 우린 곰이다!”
“뭐? 사슴이 아니라? 왜!”
“이유가 뭐냐면…….”
아주 단순한 이유다.
사냥을 전혀 할 수 없는 나는 곰 팀이 될 확률이 높으니, 너도 함께하자는 것.
물론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슴은 그냥 좀 불길하니까.”
“그래?”
이 단순한 녀석의 반응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혹시 알아? 어떤 곰은 몸속에 엄청난 내단을 갖고 있을지.”
“콜! 그럼 나도 곰 팀!”
역시 단순한 녀석이었다.
김세용은 현재 남은 30명의 도전자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플레이어.
이놈을 포섭한 것은 크다.
여기에 믿을 만한 상위권 한둘 정도만 곰 팀으로 더 들어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호영이 형! 저기, 바르가스 뛴다!”
마침 좋은 영입 대상이 보였다.
* * *
바르가스의 검술 스타일은 좀 독특했다.
분명 예리한 검날로 거인 곰을 베고 있는데, 사실 벤다는 느낌보다는 묵직하게 팬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녀석의 검날에서 발출되는 오러 블레이드가 몽둥이처럼 두툼하게 검 주변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퍼억-
그래서 그런지 검으로 벨 때의 타격음도 뭔가 독특했다.
분명 몽둥이로 패는 소리인데, 거인 곰의 모가지가 그대로 댕강 잘려 나간다.
김세용이 검술을 익혔다면 아마도 이런 양상이었을 것 같다.
“봤지? 네 놈은 이제 죽빵 맞을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바르가스는 의기양양했다.
녀석 머리 위의 사냥 실적에는 벌써 3이 표시되어 있다.
내기가 걸려 있기에, 바르가스의 의욕은 활활 불타오르는 중.
“설레발 좀 떨지 마. 바르가스, 넌 지금보다 더 서둘러야 할 거야.”
“웃기지 마! 지금 넌 겁을 먹고 있는 거다. 내게 맞을까 봐.”
“말이 많은 걸 보니, 너도 불안한가 봐? 자꾸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것도 그렇고.”
“불안은 개뿔! 아까 그놈 이름이 김세용이라고 했나? 그놈 페이스가 나보다 빠르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이번의 내기는 김세용과 바르가스의 대결.
누가 더 곰을 많이 잡느냐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다.
물론 김세용이 지면 죽빵은 내가 맞는 걸로.
‘둘 다 빠르긴 하네.’
김세용은 내 텔레파시를 따라 곰을 쫓았고, 바르가스는 내가 바로 옆에서 따라다니며 곰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현재 스코어는 3 대 3.
김세용이 지는 상황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
바르가스가 분발할수록 우리 곰 팀이 이길 확률은 높아질 테니까.
죽빵 좀 맞는다고 죽진 않을 것이다.
“크크크. 죽빵 맞고 죽은 사람 얘기 아직 못 들어 봤지?”
그러면서 녀석은 주먹을 붕붕 돌리는데,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바르가스는 생긴 것도 그렇고 전형적으로 김세용과 같은 과. 현재 나의 스탯으로는 제대로 맞았다간 골로 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계획은 전면 수정이다.
팀도 이기고, 죽빵도 피해야 한다.
“입 다물고, 빨리 이동이나 해.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크크크. 알았다고! 그나저나 네놈이 곰 냄새 잘 맡는 거 하나는 인정! 내가 너한테 내기에서 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이기게 해 줄 테니까 빨리 따라오기나 해.”
“희한한 놈이야. 맞고 싶어서 안달난 거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날 도와주다니.”
“팀을 위한 거라고 해 두지.”
미니맵으로 보아하니 사슴 팀의 페이스도 만만치는 않았다.
예상대로 상위 랭커들이 사슴 팀으로 대거 들어갔고, 사냥터에는 발에 채일 정도로 사슴이 많다 보니 개체 수가 줄어드는 속도 또한 상당했다.
크아아앙!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거인 사슴 하나가 달려든다.
퍼어어억!
바르가스의 몽둥이 같은 검격에 거인 사슴의 한쪽 발목이 날아갔다.
“멍청아! 상대편을 도와주면 어떡해!”
“안 죽였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겨우 막타만 남겨 놓고, 그게 할 말이냐?”
생긴 것답게 바르가스는 생각하는 것도 무식했다.
거인 사슴의 특성상 그냥 적당히 방어만 하면서 도망쳐도 우릴 쫓아오지 않았을 터인데, 그걸 기어이 반 죽여 버리고 만다.
어쨌든 우리는 서둘러 이동했다.
내가 미니맵을 보며 머릿속으로 그린 동선을 따라서.
우리의 사냥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탐색 경로를 최소화하였으며, 가급적 사슴이 있는 곳은 피해 갔다.
곰을 하나하나 죽일 때마다 바르가스는 이빨이 다 드러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왜 넌 사냥 안 해? 계속 구경만 하고 있잖아!”
“내가 너랑 같이 곰 사냥을 시작하면, 과연 넌 어떻게 될까?”
“그거야…….”
“사냥감 하나로 둘이 나눠 먹으면 사냥 실적도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내가 죽빵을 때릴 기회를 줬으니, 넌 그냥 닥치고 따라오기나 해.”
“크크크.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때리고 만다.”
현재의 페이스는 나쁘지 않았다.
김세용과 바르가스가 분발하고 있는 덕에, 곰 팀이 조금씩 더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내기는…….
여전히 승부의 향방이 오리무중.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승부 조작까지 가려면 곰 팀이 좀 더 넉넉한 상황이 되어야만 할 터.
일단은 팀의 승리에 집중해야 할 때다.
내기에서 지면 죽빵이지만, 팀이 지게 되면 나는 그 즉시 사망이니까.
* * *
“호영이 형!”
나와 바르가스의 이동 경로에 드디어 김세용이 겹쳐졌다.
이번 스테이지도 막바지라는 의미.
이제 남은 곰의 개체 수는 단 1이었다.
절묘하게도 두 사람의 사냥 실적은 18 대 18로 동률이다.
막판까지도 곰 팀과 사슴 팀의 스코어가 팽팽하게 흘러갔기에 나는 두 사람을 모두 분발시켜야만 했다.
“와 씨! 이놈 뭐야! 나랑 똑같잖아!”
“그건 내가 할 소리라고!”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스코어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각자 자신의 스코어가 압도적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호영 이 개자식아! 빨리 나를 곰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바르가스는 버럭 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세용을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나의 메시지를 들은 김세용의 표정엔 살짝 아쉬움이 묻어 있다.
상대 팀도 빠르게 사슴의 모든 개체를 전멸시켜 가고 있었기에 여기서 지체하는 건 곤란하다.
내가 다시 다그치자, 김세용은 바로 사라져 버렸다.
“빨리 길을 안내하라고! 이호영! 설마 맞는 게 무서워서 우리 팀에 엿 먹일 생각은 아니지?”
“걱정 말고 따라오기나 해.”
우리 팀은 무조건 이긴다.
바르가스, 네가 지금까지 너무 잘해 주었으니까.
이 녀석을 우리 팀으로 영입하지 못했더라면, 이번 스테이지는 상당히 버겁게 흘러갔을 것이다.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뭐? 갑자기 뭐야!”
[곰 팀이 승리하였습니다. 사슴 팀 전원을 결계 밖으로 추방합니다.]
우리 팀이 이겼다는 소식에도 바르가스는 기뻐하지 못했다.
녀석의 머릿속엔 내기 패배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테니까.
[스페셜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 -75]
드디어 내 호감도가 마이너스 70대에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디버프의 두께가 한층 얇아지는 느낌이었다.
몸도 한결 더 가벼워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무적인 사실은, 내가 이번 사냥 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사망에서는 자유로워졌다는 것.
내 호감도에 -20이 붙더라도 여전히 -95이니 목숨 코인 하나의 여유는 얻은 셈이다.
[추가 보상으로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 -70]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호감도가 대폭 상승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
이번 스테이지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느라, 마나 회복이 불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몸이 개운해지며 상쾌한 청량감이 온몸을 감싸온다.
“안 돼애애애!”
바르가스는 절망의 한숨을 쉬었다.
결국 마지막 한 마리는 녀석의 몫이 아니었으니까.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나를 때리고 싶었던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며 한번 대 줄까도 싶다가도 저 솥뚜껑만 한 주먹을 보니 고개가 절로 돌아가게 된다.
“진정해. 바르가스. 결국 비긴 거잖아. 18 대 18로.”
“비겼다고?”
김세용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사냥 실적은 여전히 18.
나의 설계였다.
김세용의 승리로 만들까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시나리오를 급 수정하였다.
마지막 한 마리는 두 사람 모두 잡지 않는 것으로.
이유는 하나였다.
바르가스의 공로를 인정해 주고 싶었던 것.
하지만 바르가스는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주 잠시만 안도했을 뿐, 다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긴 것은 곧 진 것이다!”
이 녀석이 정신을 못 차린다.
내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또 거하게 맞았을 텐데.
이렇게 날 팰 생각만 하는 녀석을 보니 아주 살짝 후회가 밀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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