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확실히 바르가스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이번에 공개된 미션에 따르면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는 도전자는 단 30퍼센트.
일분일초가 아까울 텐데 그럼에도 녀석은 여유를 부리며, 나에 대한 원한 관계를 먼저 정리하고자 했다.
바르가스는 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아주 단단히 미쳤나 봐? 응? 설마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녀석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찢어 죽일 기세로 살기를 분출했다.
“그래. 널 기다렸다. 보아하니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푸핫! 뭐? 그런 놈이 아까 전에는 꽁무니를 빼?”
“생각은 자유니까, 그건 너 편할 대로 해석하면 될 문제고.”
“개자식이, 아주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좋아, 여기서 바로 죽여 주지!”
바르가스는 검을 빼 들어 다시 나를 향해 겨누었다.
첫 만남 때와 아주 유사한 그림.
이번엔 김세용이 나서려 하고 있었다.
내 계산에 따르면, 버프까지 감안해서 두 사람은 거의 백중세.
나서 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스페셜 퀘스트 생성에 방해가 되니까.
- 세용아, 그냥 나한테 다 맡겨.
내가 바로 텔레파시를 보내자, 세용이 녀석은 살짝 멈칫하며 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토를 달지 않고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이런 야생마 같은 놈을 내가 길들이다니, 새삼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졌다.
“아까처럼 내 검을 쳐 보든가! 응?”
바르가스는 행여 내가 정말로 쳐 낼까 봐 자신의 검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녀석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인다.
“굳이.”
“뭐라고?”
“무의미해. 이미 한 번 해 본 건.”
나의 무심한 말투에 녀석은 더욱 흥분할 뿐이었다.
“개자식! 죽여 버린다!”
“대회 도중에?”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래서 자신 있게 날 기다린 거였나?”
녀석은 내 코앞까지 검을 들이밀며 위협의 강도를 더해 왔다.
나는 굳이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녀석이 혼자 흥분해서 떠들어 대도록.
“여기 시작 위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야. 네놈 하나 죽어 나가도 밖에 있는 관중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몰랐던 사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헬리오 산은 도전자들의 사냥하는 모습을 위주로 홀로그램으로 전송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이 대회 자체부터가 천하제일 ‘사냥’ 대회이고 말이다.
정말로 날 죽이기까지는 안 하겠지만, 최소한 죽도록 팰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멍청한 놈.”
“뭐?”
“지난 대회 6위라고 하기에 기대했는데.”
“기대했는데?”
“……실망이군.”
일단 이렇게 질러 놓고 나니, 녀석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무슨 개수작이야!”
“도전자들끼리 서로 피를 튀기며 싸우는데, 그걸 밖에서 아무도 못 본다고? 지금 넌, 이 신성한 헬리오 산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다.
몇몇 단어들에는 힘을 주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실망’이라던가, ‘신성한 헬리오 산’이라던가.
“개소리하지 마! 지금 넌 내 앞에서 겁을 내고 있는 거야!”
라고 말은 하지만, 녀석의 말투엔 확신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차이점이다.
나는 녀석의 검을 두 손으로 잡아 살짝 밀어 내렸다.
이 정도 동작에도 마나의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물론 표정은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왜 고작 6위에 그쳤는지 알 만하군.”
고작. 이라는 표현에 녀석의 눈빛이 또다시 흔들린다.
[스페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바르가스를 참교육시키십시오.]
[성공 시: 호감도 +3]
참교육이라는 표현이 모호하긴 하지만, 아까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할 것이다.
넘치게 클리어한다면 추가 보상이 있을 테고.
“바르가스. 너에게 제안하지.”
“뭐?”
“죽빵 세 대. 내기에서 지는 쪽이.”
나는 녀석을 보며 씨익 미소를 날려 주었다.
* * *
바르가스는 내가 제안한 내기를 받아들였다.
죽빵 세 대.
상호 합의하에 내기를 한 것이니, 도전자 간의 싸움이 아니며 따라서 규정 위반도 아니었기에 녀석은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
게다가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디버프의 저주는 나를 비리비리하게 보이게 만들었기에, 녀석은 죽빵만으로도 날 골로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
“호영이 형! 그런데 내기가 뭐 그래?”
“왜?”
“맥이 끊기는 느낌이잖아. 고작 세 마리 먼저 잡기라니. 세 마리 잡고 나서 다시 만나려고?”
“만나야지. 죽빵 때려야 하니까.”
“그러다가 시간 다 간다고!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그러다가 이번 스테이지에서 탈락하면 어떡하려고!”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내게 승산이 너무 낮다.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세 마리만 잡아도 거의 방전이 될 터.
클리어 보상을 받아서 마나 충전을 해야만 또다시 사냥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서둘러야지. 세용아 전방 50미터 거인 곰! 그건 네가 맡아!”
“형은?”
“잠시만 흩어져. 텔레파시로 계속 연락할게!”
나는 무조건 거인 사슴으로 시작을 해야 한다.
이번 미션의 규칙은 곰과 사슴을 번갈아 가며 잡는 것.
내 마나 수준으로 곰-사슴-곰을 사냥하는 것은 무리.
사슴-곰-사슴은 그래도 가능성이 훨씬 크다.
[미니맵 스킬이 가동 중입니다.]
다행히 이 근처에 바로 사슴이 보인다.
아무리 디버프가 있다지만, 미니맵을 갖고도 내기에서 지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성검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언제 이 짓을 끝낼 수 있을지!’
왼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며 통증이 밀려온다.
성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내 피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 여간 거슬리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이 미친 방법 말고는 교감할 길이 없으니 짜증 나도 해야만 했다.
공략집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게 서운할 뿐이다.
카아아앙!
괴성을 지르며 두 발로 성큼성큼 뛰어오는 거인 사슴.
마나도 부족하니 무조건 한 방에 해결을 봐야만 한다.
서걱!
사람이 극한에 몰리니,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성과는 훌륭하다.
벌써 이게 몇 번 연속인지 나 스스로도 놀랍다.
[거인 사슴을 사냥하였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나 소모의 효율성마저 좋았다.
마나 안배에 있어 여유를 갖게 된 것.
이러다 또다시 무영추혼검의 묘리를 발견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서둘러야겠군.’
미니맵을 보니, 내가 노리고 있는 거인 곰 쪽으로 또 다른 도전자 한 명이 이동 중이다.
무조건 내가 빨라야만 한다.
* * *
서걱-
거인 곰 한 마리가 또다시 내 앞에서 절명했다.
방금 전의 일격은 32층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한다면 놀라운 발전.
마이너스 80대로 진입한 호감도의 위력은 예상대로 훌륭(?)했다.
디버프의 두께가 줄어들다 보니 마력 운용에 여유가 생겼고, 몸에 달고 있는 모래주머니 일부를 덜어 낸 느낌이었기에 검술도 매끄럽게 펼쳐졌다.
‘이러다 마이너스 70대가 되면…….’
테이아의 날개가 없이도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 김세용의 사냥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 텔레파시를 따라 녀석은 벌써 네 마리를 잡은 상황이다.
확실히 세용이는 버프를 받는 몸이라 그런지, 사냥감의 위치만 특정되면 이동 속도도 빠르고, 사냥 자체도 일격필살이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이 녀석이 1등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나는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모든 도전자들에게는 실시간 현황판이 공개되고 있는데, 현재 내가 잡은 2마리면 여유 있게 30퍼센트 안에는 들어가니까.
- 세용아 5시 방향. 100미터 부근 거인 곰!
이제 슬슬 김세용과 합류할 타이밍이 되었다.
내 시야에는 이미 거인 사슴 한 마리가 들어온 상태.
마나는 내가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남았다.
‘이번엔 제물 없이 한번 해 볼까.’
자해는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았기에, 가능한 상황이라면 순정 상태로 도전할 생각이다.
게다가 나의 무영추혼검도 성검과 함께 발전하는 느낌.
잡힐 듯 말 듯, 한층 더 높은 검술의 묘리가 이제 가까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 *
우리가 나타나자 바르가스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놀라? 다 알고 있었으면서.”
김세용이 다섯 마리. 내가 세 마리. 그리고 바르가스가 두 마리.
물론 내기는 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빨리 정산하자. 피차 시간 없으니까 말이야.”
“정말로 내 죽빵을 때리겠다고?”
“농담으로 내기한 건 아니잖아?”
“싫다면?”
이런 반응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이놈의 캐릭터상 배 째라 식으로 나올 가능성도 다분했으니까.
“싫으면, 여기서 대회 접을 각오해야지. 널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으니까.”
대회 중인 것이 녀석의 발목을 잡는다.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지만, 내 뒤엔 김세용이 서 있다.
녀석으로선 세용이의 현재 성적이 상당히 신경 쓰일 것이다.
“X 같네.”
“대신 한 가지 제안하지. 정산이 끝나면, 똑같은 내기로 한 번 더 가는 걸로.”
“시발! 그럼, 빨리 시작해!”
그럴 줄 알았다.
이것으로 일타이피.
흐름상 스페셜 퀘스트는 한 번 정도는 똑같은 걸로 또 생성될 공산이 크다.
오늘의 희생양으로 바르가스가 쐐기를 박는 순간이다.
“억울하면 네가 이겨서 똑같이 되돌려 주면 돼.”
“시발! 빨리하라니까!”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참교육.
부디 첫 방에 보상이 있길 바라본다.
지금 내겐 마나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니까.
“호영이 형! 제대로 한 방 먹여 봐! 크크크.”
마음 같아선 김세용에게 대신 시키고 싶지만, 교육은 내가 직접 해야만 한다.
빠아아악!
주먹에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녀석의 죽빵을 돌렸다.
마나뿐 아니라 근력 스탯 자체도 바닥을 기고 있었기에, 호쾌한 한 방은 애당초 노리지 않았다.
다만, 교육적 효과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친 거야? 시발, X 같네. 아프진 않은데 그냥 X 같아!”
누가 봐도 비교육적인 리액션.
하지만 32층 군주의 생각은 조금 다른가 보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호감도가 +3이 되었습니다.]
[호감도: -86]
[추가 보상으로 마나가 10퍼센트 회복되었습니다.]
“호영이 형! 왜 이런 놈한테 자비를 베푸는 건데!”
“크크크. 시발! 뒷감당이 겁나나 보지? 이제 두 대! 빨리하라고!”
나로선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추가 보상으로 마나의 회복.
내 다음 행동에 따라 추가의 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빠아아아악!
회복된 마나를 아낌없이 털어 넣었다.
마나도 그렇고 호감도도 늘어났기에, 확실히 아까보단 파괴력이 확연히 늘어났다.
“시발!”
[추가 보상으로 마나가 20퍼센트 회복되었습니다.]
“시발! 기껏 힘줬다는 게 이 정도면, 뒷일이 겁나나 보지?”
바르가스 녀석.
이번엔 살짝 아팠을 텐데, 허세를 부린다.
이제 마지막 한 방.
괜히 마나 아낀다고 남겨선 곤란하다.
32층의 군주는 그런 쪽으론 얄짤 없을 테니까.
빠아아아아아악!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추가 보상으로 마나가 50퍼센트 회복되었습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오늘은 여기가 잘 퍼 주는 맛집이다.
- 22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