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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22화 (222/292)

222화

김세용은 거침없이 거인 사슴을 사냥해 나갔다.

벌써 여덟 마리째.

이게 김세용이니까 쉬워 보이는 것이지, 거인 사슴은 우리가 그동안 상대했던 웬만한 괴물들보다 훨씬 강했다.

32층의 세계관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이유다.

“와 씨! 이번 놈은 좀 위험했어!”

여덟 마리째나 상대하다 보니 녀석도 집중력이 흐려진 것.

하지만 우리와 동행한 갈레온은 김세용의 무위에 흡족해하고 있었다.

“사냥 업계에 괴물 신인이 나타났군.”

“크크크. 영감님!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아직 내 실력의 반도 안 보여 줬다고요.”

“이미 충분히 감명을 받았다네. 남은 두 마리도 마저 빨리 잡고 돌아가도록 하지.”

“뭐 그럽시다!”

“아 참! 마을로 돌아가면 할 이야기지만, 자네 우리 쪽이랑 거래를 트는 건 어떻겠나?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 줄 테니.”

“크크크. 그런 얘긴 나중에!”

“잘 생각해 주길 바라네!”

이미 갈레온은 애가 닳아 있는 눈치였다.

타아악!

김세용이 죽은 거인 사슴의 뿔을 잡고 힘을 주자 뿔은 그대로 뽑혀 버린다.

그 모습에 갈레온은 또 한 번 감탄을 내뱉었다.

“완력부터가 미쳤군.”

“뭐, 자랑은 아니지만. 힘으로는 밀려 본 적이 없다고요. 크크크.”

“하긴 그러니 거인 사슴을 맨손으로 때려잡지. 절대 놓칠 수 없는 인재야.”

아주 둘이서 쿵짝이 잘 맞는다.

졸지에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저한테는 계약 제안 같은 거 안 하십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예상되는 반응은 뻔하지만 말이다.

“자네는 이름이 뭐였었지?”

“이호영입니다.”

“흠! 아무리 봐도 사냥꾼 할 관상은 아닌 거 같은데.”

갈레온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봐요, 영감님! 그 형님이 생긴 건 그래도 진짜배기라니깐! 계속 사람 말을 못 믿네.”

“보여 준 게 있어야 믿지! 이젠 나도 한 번은 좀 보고 싶다네. 이후영 이자가 어느 정도 하는지 말이야.”

“이후영? 와하하하!”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거인 사슴의 기척이 또 느껴졌다.

감각 스탯이나 절대 감각 스킬이 온전했다면 진즉 발견했겠지만, 디버프의 저주로 인해 이 정도로 근접해서야 알아차린다.

참 적응이 안 된다.

“호영이 형! 이번에는 형도 실력 한번 보여 줘야지?”

김세용은 자연스럽게 내게 차례를 양보했다.

거인 사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

공격 방식이나 패턴, 파괴력, 내구성, 약점 등이 대충 보이긴 한다.

김세용이 앞서 여덟 마리나 사냥을 하며 충분한 데이터를 내게 제공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두 마리까지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

아니,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럴듯한 모양새로 잡는 건 어려울 것 같다.

한 마리만 잡을 생각이라면, 결국 마지막 열 번째 놈을 사냥하는 쪽이 나아 보인다.

“세용아, 오늘은 네가 수고하기로 했잖아?”

“또 내가 하라고?”

“왜? 싫어?”

“아니! 내가 할게. 크크크!”

갈레온은 나를 보며 비웃는다.

김세용이 수차례 나를 띄워 주고 있음에도 그는 확신하고 있다.

내가 허접이라는 것을.

뻐어어억!

경쾌한 타격음이 숲에 울려 퍼진다.

김세용의 불주먹 스킬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들어갔고, 결국 크리티컬이 터지며 아홉 번째 거인 사슴은 단 한 방에 절명해 버렸다.

“이야아아아! 내 수십 년간 사냥터에 숱하게 따라다녔지만, 이렇게 호쾌한 주먹은 처음이라네!”

“그래요?”

“자! 이제 계약한 열 마리까지는 단 하나만 남았다네! 빨리 잡고 돌아가세!”

갈레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한 마리의 거인 사슴이 우리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고 있었다.

“세용아, 이번엔 내 차례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형!”

나는 성검 가이아를 움켜쥐었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예상대로 성검은 거인 사슴을 몬스터로 인식하지 않는 듯했다.

‘내가 어려운 상황일 때 성검은 진가를 발휘한다고 했었지.’

지금은 확실히 어려운 상황.

나는 검날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사실 불어 넣은 수준이 아니라 모든 기운을 쥐어 짜냈다.

모든 스탯이 바닥을 찍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한 방을 노리는 것이 유리할 거란 판단 때문이다.

다다다다다!

거인 사슴이 두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나를 향해 돌진한다.

성검과의 교감 같은 건 잘 모르겠고, 나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 오던 무영추혼검의 한 초식을 전개해 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이 일격이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다음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사아아아악!

허공에는 부드러운 호선 하나가 그려지며, 그 끝은 붉게 물든다.

핏물이 튀며, 거인 사슴의 모가지가 그대로 댕강 잘려 나갔다.

이제 마나는 단 한 톨도 남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갈레온은 나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영감님! 내가 누차 말했잖아! 호영이 형이 이 정도 하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라니깐!”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느껴지는 기운은 별 볼 일 없는…….”

역시, 32층의 원주민들은 본능적으로 사냥꾼의 능력치를 느끼고 있다.

줄기차게 나를 무시한 것도 그렇고, 직접 눈으로 본 것도 믿지 못할 정도니까.

갈레온은 바로 내게 제안했다.

“한 마리만 더 잡아 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싸울 여력 따윈 더 이상 없다.

지금 바로 거인 사슴이 튀어나오면, 김세용에게 모든 걸 맡기고 팔라스의 방패에 모든 걸 의존해야 할 정도니까.

“이번 임무에서 계약한 것은 딱 열 마리였습니다만?”

“추가 수당은 두둑하게 챙겨 주겠네. 확인해야 할 것이니 있으니 한 마리만 더 잡아 보게나.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 않은가!”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제 입장에선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고집하고는! 난 이제 자네와도 계속 거래를 틀 마음이 생겨 제안하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끝입니다.”

“뭐?”

“계약된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볼일은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기에 진작 대우 좀 해 주시지.”

만약, 이곳에 괜찮은 거래처라면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해 보아도 늦지 않다.

일단은 빨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팔라스의 방패가 있다 해도, 마나도 없이 더 이상 이 살벌한 숲에 있고 싶진 않다.

* * *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작 1이라니.

김세용은 호감도가 무려 +5나 상승했다.

녀석이 아무리 더 활약을 했다지만, 파티 플레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명백한 차별.

32층의 군주 달빛의 명사수에게 제대로 찍히긴 한 모양이다.

[호감도: -98]

여전히 내 몸을 둘러싼 디버프의 저주는 무겁기만 했다.

추가 퀘스트는 생성되지 않았기에, 일단 더 이상의 사냥 의뢰는 받지 않기로 했다.

물론 거래처 계약도 보류 상태.

퀘스트가 아니라면 낯선 이곳에서 굳이 빡세게 몰입할 이유는 없다.

김세용은 피곤하다며 여관방에 들어가 벌써 잠자리에 들었고, 지금은 나 홀로 밤공기를 마시며 인근 야산을 올랐다.

‘참 특이한 놈이란 말이지.’

나는 성검 가이아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었다.

엘리시온과 비교한다면 형편없는 외관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펙이 떨어진다.

하지만 오늘 거인 사슴의 모가지를 잘랐을 때의 그 감촉.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뭔가 이질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성검을 얻은 후 포털을 만들어 냈을 때의 그 느낌과 유사했다.

마치 검이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은 기분.

물론 지금은 또다시 보잘것없는 낡은 장검일 뿐이다.

스으으윽-

나는 성검 가이아로 허공에 원 하나를 그어 보았다.

포털을 만들었던 그때처럼.

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시 회복한 마나를 불어 넣어도, 거인 사슴을 베어 냈던 무영추혼검의 초식을 전개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 검에 에고가 존재하는 게 맞을까?’

신주아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도 일개 플레이어일 뿐이니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은 이 성검에 익숙해질 필요는 있었다.

나는 밤하늘의 달빛을 맞으며,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디버프로 인해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은 상당했고, 이는 검술 수련에 독특한 묘미를 주었다.

마치 어른의 정신을 가지고 꼬마 아이의 몸에 들어간 느낌.

놀랍게도 부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는 것만 같았다.

생각지도 않은 효과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또다시 들려온 반가운 소식.

그런데 더 반가워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공략집이 내게 보낸 건 32층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바로 이 성검에 대한 이야기가 메시지에 담겨 있었던 것.

[성검은 피의 제물에 반응하곤 합니다. 가장 좋은 피는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의 피. 제물을 바치십시오.]

성검의 어감 때문인지 이 검이 제물을 원한다는 건 그리 위화감 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 피가 가장 좋다는 건 소름 돋는 이야기지만, 시험해 볼 가치는 있다.

인벤토리에 물약은 충분히 있으니까.

눈 한번 질끈 감고 성검의 검날을 움켜쥐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아니기 때문인지, 팔라스의 방패는 작동하지 않는다.

검날에는 핏방울이 줄줄 흘렀다.

‘내가 이런 식으로 자해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베인 피부에서는 통증이 밀려온다.

사실 고통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보통은 내가 고통을 주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고통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성검의 무반응이었다.

‘설마,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 방법은 재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피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이지, 다른 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이유로 물약을 빨려는 순간이었다.

우웅-

갑자기 성검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보람 없는 자해가 될 뻔했는데, 반가운 소리였다.

우우웅-

그렇게 검의 울림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도 느껴지긴 하는데, 물론 알아들을 순 없었다.

‘어쩌면, 좀 더 많은 피를 원한다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군.’

만약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거기까진 사양하고 싶다.

내 몸은 소중하니까.

또한 성검에 정말로 에고가 존재한다면, 초반에는 튕겨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급할 것은 없다.

성검은 내 소유이며, 반응을 끌어내는 방법도 확인했으니 언젠가는 교감하는 날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물약을 사용합니다.]

그게 내 피가 되었든, 다른 존재의 피가 되었든 말이다.

* * *

다음 날, 퀘스트는 바로 생성되었다.

[집회소로 가서 두 번째 사냥 의뢰를 받아 수행하십시오. 단, 거래처는 첫 번째 퀘스트 때와 동일한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실패 시: 호감도 -20]

32층은 호감도가 -100을 찍는 순간 사망하는 곳.

여전히 내 목숨 코인은 하나뿐이다.

집회소에 도착하니, 곧바로 우리를 반긴 것은 갈레온이었다.

“여기야 여기! 난 너희들이 바로 나타날 줄 알았다네!”

갈레온은 거의 버선발로 우리를 마중을 나왔다.

“어라? 오늘은 영감님이 여기 계시네?”

“이보게, 김세용 군! 어제 그렇게 가서 얼마나 섭섭했다고! 오늘은 우리와 계약하는 거 맞지?”

그러면서 나에게도 고개를 돌리는 게, 어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호영 군. 자네도 말일세.”

집회소 사람들의 시선도 어제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우리에 대한 소문이 이곳에 한바탕 돈 모양인지 일시에 이쪽으로 이목이 집중된다.

“저 녀석들인가? 어제 그 무용담의 주인공이?”

“이상하군! 둘 중에 하나는 영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나도 저 둘에게 제안을 해 봐야겠어! 훌륭한 사냥꾼을 갈레온에게 눈 뜨고 빼앗길 순 없잖아!”

“그런데 저 비실비실해 보이는 친구도 정말 사냥꾼 맞아?”

호감도를 빨리 올리지 않는 이상, 32층에서는 저 비실비실 소리를 지겹도록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22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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