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난 31층에선 공략집의 ‘공’ 자도 구경해 보지 못했기에 더욱 반가웠다.
항상 맵핵이 켜져 있다 보니, 꺼져 있는 순간이 찾아오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실감하게 된 것.
나는 차분히 공략집을 읽어 나갔다.
[32층의 군주는 ‘달빛의 명사수’이며, 모든 플레이어들은 끊임없는 사냥 미션에 직면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사냥이라면 마음에 든다.
단순한 스테이지에서는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만, 제나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 가혹한 곳이 될 거라 했었지.’
능력치로 보나 템빨로 보나, 사냥만 하는 곳은 나에게 최적의 장소.
그럼에도 가혹한 곳이 될 것이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호감도.
상당히 낮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무슨 이유로 미운털이 박혔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공략집의 메시지는 계속 되었다.
[플레이어들은 2인~4인이 한 조가 되어 32층 미션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층에서 당신은 2인 파티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살성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지는 곳이니 주의하십시오.]
일단 공략집은 이것으로 끝.
대단히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공략집의 물꼬가 터졌다는 데에 의의를 두어도 될 것 같다.
‘32층에선 본격적으로 공략집이 계속 전송될 테니까.’
잠시 후, 전체 메시지가 있었다.
32층이 시작되기 전에 파티 구성을 끝마치라는 내용이다.
‘32층이 나에게 가혹한 곳이라면…….’
이번의 파티 구성은 나에게 꽤 중요해진다.
게다가 2인 파티를 구성하는 경우, 선택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단 한 명.
나는 로비를 빠르게 둘러보며 동료들의 능력을 스캔해 보았다.
그럴듯한 선택지는 대략 넷이다.
먼저 채이설.
우리 구역의 유일한 힐러인 데다가, 준수한 능력치에 빠른 적응력도 장점이다.
게다가 무한 사냥 미션에서는 힐러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내겐 팔라스의 방패가 있긴 하지만 이중으로 보험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의 그녀의 공격력. 내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테 채이설은 단독으로 피니시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선 확실히 의문이 남는다.
그러니 채이설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양보하기로 하자.
다음으론 최정혁도 고려해 볼 만하다.
프로 게이머 특유의 감각으로 이번 사냥 미션에선 상당히 활약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최근 능력치가 상당히 올라온 것도 인상적인 일.
하지만 내가 곤경에 빠졌을 경우에도 믿을 만한 동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나는 2인 파티를 구성할 생각이니 이놈은 마누라에게 양보해야겠지.
최정혁도 역시 패스.
결국 남은 것은 신주아와 김세용이었다.
능력치만 놓고 보면, 이 둘은 탑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일 것이다.
전투 능력은 비슷한데, 그 외의 효용성은 신주아가 월등하다.
특히 그녀의 직감과 판단력은 내게 종종 도움을 줄 정도니까.
‘그럼 이번에도 신주아인가?’
김세용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어차피 녀석도 누구와 파티를 이루든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을 터.
결국, 신주아에게 제안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신주아! 너 나랑 한번 하자.”
남소현의 뜬금없는 제안.
의외였다.
그동안 남소현은 신주아를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으니까.
당연히 난 신주아가 그 제안을 수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32층은 살성의 활동이 활발해질 곳으로 예정된 곳. 신주아도 계시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남소현의 위험성을 인지했을 공산이 크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주아의 답변은 완전히 의외였다.
“좋습니다.”
혹시 살성 관련 계시는 받지 못한 것인가?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신주아의 이어지는 말은 더 이상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파티는 저희 둘만 이루는 조건으로.”
“좋아! 콜!”
[1파티: 남소현, 신주아]
이것으로 두 여자의 파티는 단번에 확정되었다.
확실히 의문투성이다.
남소현이 신주아를 지목한 것도. 신주아가 승낙할 때 내걸은 조건도.
어쨌든 돌이킬 수 없으니, 이제는 차선책에 오퍼를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호영이 형! 이번에는 나하고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녀석은 내가 먼저 오퍼를 보낼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쏟아지는 러브 콜들.
“이호영 씨! 당연히 4인 파티로 가실 거죠?”
“이봐, 호영이 형님! 오랜만에 나하고도 한번 하자!”
“야 이호영, 너는 보면 꼭 하는 사람이랑만 하더라?”
32층에선 내가 개털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다들 난리다.
* * *
[32층으로 이동합니다.]
다들 적절하게 파티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주아와 남소현. 알고 보니 두 사람 모두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정황상, 두 사람 모두 32층에서 살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신주아가 수락했다는 것은.
‘자신 있다는 거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남소현이 다른 동료들과 파티를 이루게 되는 상황이라면, 32층에선 팀킬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파티원이 신주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오히려 신주아가 남소현을 컨트롤할 수 있을 테니까.
다시 로비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32층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호감도: -99]
안 좋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마이너스로 정점을 찍고 시작할 줄이야.
극심한 디버프로 인해 스탯이 현격하게 떨어졌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2층이 왜 내게 가혹한 곳이라 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달빛의 명사수는 당신에게 무척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당신이 살성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 달빛의 명사수는 살성 시스템의 창안자이며, 당신을 살성으로 영입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군주였습니다.]
공략집을 보고 나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호기롭게도 살성 제안을 두고 밀당을 펼쳤으며 최종적으로는 살성 제안을 거절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99라니.’
뒤끝이 너무 심한 것이다.
모든 스탯은 1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져 있으며, 스킬 사용에도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캥수도 주인 따라 변변치 않을 테고, 라덴으로부터 새롭게 얻은 마나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할 판.
그럼에도 불행 중 다행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검술 하나는 온전하다는 것.
사부가 내 검술을 스킬창에서 떼어 버린 후, 검술은 스킬이 아닌 심득이 되었기에 디버프의 영향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초라해진 마나 덕분에 큰 공격은 어려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호영이 형! 형만 믿을게!”
김세용은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태도야.”
“그건 뭔 소리야!”
“내 버스만 믿고 있으면, 넌 발전이 없잖아.”
“발전이야 뭐, 형 뒤만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되는 거지! 우리 구역의 생존율만 봐도 그렇잖아?”
이놈은 역시 내 버스를 타기 위해 파티를 맺은 것.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내가 네 등에 올라탈 생각이다.
다행히 김세용의 호감도는 상당히 높다.
무려 66.
좋은 버스다.
* * *
32층의 미션은 큰 틀로 보면 생존.
생존의 조건은 단순하다.
호감도가 -100이 되는 순간 플레이어는 죽는다.
고로 나에게는 1코인밖에 없는 셈.
[마을의 집회소에 가서 첫 번째 퀘스트를 받아 클리어하십시오.]
[실패 시: 호감도 -20]
“그런데 형은 호감도가 몇이야?”
“그건 왜?”
“32층에선 호감도가 목숨 코인인 셈이잖아. 몇 목숨이나 있나 체크하려고 하지.”
“세용아. 나랑 같이 있으면서도 코인 하나로 클리어할 생각을 한 거야?”
“하긴. 그러네. 크크크크.”
그렇게 떠들며 우리는 집회소에 도착했다.
집회소에 모인 사람들은 인근에 존재하는 괴물을 잡아 줄 사냥꾼을 모집하는 중.
우리 입장에선 일종의 NPC인 셈이다.
우리는 그중 한 명에게로 다가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우릴 보며 묻는다.
“자네 둘. 사냥꾼인가?”
“그렇습니다.”
“한 명은 좀 비리비리하게 생겼는데, 자네도 정말 사냥꾼이 맞는가?”
비리비리한 것은 분명 나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여전히 내가 못미덥다는 눈치.
놀랍다.
내 몸에 둘러싸여 있는 디버프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김세용은 넉살 좋게 노인에게 말했다.
“이보세요. 영감님! 내 옆에 있는 이 형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렇게 녀석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말릴까도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이 노인은 우리 둘에게 임무를 주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는 눈치는 아니다.
노인은 그저 김세용의 다부진 체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좋네! 그럼 믿고 맡겨 주지. 대신 선수금은 없다네.”
“괜찮습니다.”
선수금만 없는 게 아니라 착수금도 시세보다는 낮다고 한다.
아무래도 우리는 검증된 것이 없는 신출내기 사냥꾼이니까.
“그런데 어떤 괴물을 잡아 오면 되는 것입니까?”
“거인 사슴 열 마리. 길잡이를 하나 딸려 보내 주지.”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세용은 몰라도 나에게 주어진 건 코인 하나.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끝장이다.
* * *
“여기가 바로 거인 사슴이 자주 출몰하는 숲이라네.”
길잡이로 따라온 갈레온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덕분에 32층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들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잡아야 할 거인 사슴은 이족 보행의 괴물로 반신반수라고 하는데, 우리가 탑에서 사냥해 온 몬스터들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성검 사용도 가능하겠군,’
신주아의 말대로 일단은 성검과 좀 친해질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엘리시온은 인벤토리에 잠시 넣어 두었다.
“형, 그거 못 보던 검이네?”
“어. 가끔씩은 아이템도 좀 바꿔 주면서 기분 전환을 해야지.”
“검 생긴 것만 보면 기분 전환이 전혀 안 될 거 같은데?”
“이 검이 어때서 인마. 잘생겼잖아!”
나는 성검 가이아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칭찬을 해 주었다.
물론 반응은 없다.
갈레온은 내 손에 든 성검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그걸로 정말 거인 사슴을 잡을 생각인 겐가?”
“보시는 것과 달리 검 성능이 꽤 괜찮습니다.”
“그래 알겠네. 하긴 더 걱정되는 건 사냥꾼이지, 검이 아니니까.”
-99 호감도의 디버프는 단지 스탯과 스킬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층의 사람들은 나를 비리비리하게 보고 있으며, 내가 약할 거란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디버프의 기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실제로도 약한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때였다.
스르르륵. 하며 기다란 풀숲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풀 위로 뿔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32층 세계관에 존재하는 거인 사슴.
“저기 저놈이야!”
갈레온은 소리쳤다.
놀랍게도 거인 사슴은 도망치지 않고 우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왔다.
“세용아, 네 몫이야!”
“어! 알겠어!”
우리가 잡아야 하는 건 총 열 마리.
그중 상당수를 김세용에게 할당할 생각이다.
지금 이 비루한 스탯으로는 거인 사슴에 대한 데이터를 좀 더 축적한 후에야 나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김세용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한 걸음 더 나가 거인 사슴의 질주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뻐어어어억!
불주먹 스킬이 불을 뿜으며 거인 사슴의 대가리를 강타했고, 괴물이 비틀거리는 사이 김세용의 연속 공격은 현란하게 펼쳐졌다.
‘확실히 버프가 있군.’
핸드 스피드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결국 거인 사슴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 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이야! 자네 역시 생긴 거대로 힘이 장사로구만!”
갈레온은 김세용의 활약에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표정은 단번에 식어 버린다.
역시 나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는 않다.
군주만이 느끼는 호감도가 아니라 모두의 호감도. 그런 생각이 들 무렵 갈레온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기! 또 한 마리!!”
“세용아! 이번에도 네 몫이야!”
“또? 나라고?”
“그래. 너야.”
아직은 데이터를 수집할 생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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