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캥수와 김세용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지금 기세등등한 쪽은 단연 김세용이다.
그동안 둘 간의 스파링 전적이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반면, 캥수는 신중한 눈빛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김세용과 스파링을 하고 나면 얼굴 전체가 팅팅 붓곤 했던 게 다반사.
아무리 캥수 본인이 강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도, 이 기억은 바로 씻겨지는 것이 아니다.
“쫄지 마! 캥수!”
“캥!”
내가 소리를 지르자 캥수는 그제야 다부진 양 주먹을 맞부딪치며 응답했다.
캥수 녀석은 모른다.
본인이 정확히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흐흐흐! 쫄 필요 없다고, 캥수야. 설마 내가 널 죽이기야 하겠어? 그냥 형한테 한 수 배운다고 생각하라고!”
“캥!”
김세용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김세용, 이 녀석도 상당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벨의 상승세가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가파른 모습.
근력성애자답게 스탯 포인트는 근력에 몰빵을 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녀석이 풀파워 스윙을 휘두른다면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스쳐 맞아도 중상이다.
휘익-
휘이익-
역시 선공은 김세용이었다.
녀석은 가볍게 원투 잽을 날리며 캥수를 압박해 나갔다.
하지만, 캥수의 위빙은 훨씬 더 여유가 있는 모습이다.
상체만을 살짝살짝 젖히며 김세용의 펀치를 흘려보내는 움직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어쭈? 캥수야!”
김세용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로 펀치를 이어 가며 전진했다.
주먹에는 조금씩 마나가 더 실린다.
발 스텝도 더 분주해지는 것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했다.
슈욱!
슈욱!
하지만 캥수의 위빙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치고, 백스텝을 밟으면서도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김세용이 계속된 공격을 퍼부으며 빈틈을 노출하고 말았다.
‘카운터 타이밍!’
캥수도 알고 있다.
지금이 찬스라는 것을.
캥수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퍽!
결국 김세용은 캥수가 가볍게 휘두른 잽에 안면을 허용했다.
녀석의 목이 뒤로 젖혀진다.
물론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을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빈틈을 보고 가볍게 끊어 친 잽이니까.
하지만 정신적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와 씨!”
김세용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가드를 고쳐 잡았다.
“캥수야! 너 좀 좋아진 거 같다?”
“캥!”
김세용은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방금 전의 공격.
캥수가 지나치게 신중함을 보이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큰 공격을 날리거나, 연속기를 펼쳤더라도 충분히 통했을 테니까.
물론 캥수도 이제는 느꼈을 것이다.
김세용을 상대로 해 볼 만하다는 것을.
“형이 방심한 거야! 알지?”
“캥?”
기회는 계속 올 수밖에 없다.
파워를 제외하면 스피드, 기술, 동체 시력, 반사 신경 어느 하나 캥수가 뒤질 것이 없으니까.
무조건 캥수가 이기는 그림이 나온다.
김세용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거리를 벌렸다.
“캥수! 이것도 한번 막아 봐!”
피융-
피융-
드디어 녀석이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세용의 새로운 시그니처, 권풍이 쏘아져 나온다.
갑자기 주먹에서 나오는 불바람에 캥수는 살짝 당황했는지, 전부 피해 내지는 못한 채 두 발을 몸통에 허용하고 말았다.
“캐앵!”
“크하하. 어떠냐! 캥수야!”
피융-
피융-
김세용은 바로 돌파구를 찾았다는 생각에 자신 있게 권풍을 계속 쏘아 댔다.
하지만 캥수의 적응은 빨랐다.
스킬의 패턴에 익숙해지자 캥수의 스텝도 거기에 맞춰 갔으며, 이윽고 모든 불바람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캐앵!”
캥수는 불바람을 가르며 김세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컴 온! 캥수!”
김세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녀석의 진가는 근접 상황에서 발휘된다.
‘불주먹 스킬이군.’
녀석은 주먹에 마나를 한가득 장전한 뒤, 캥수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웬만한 가드로는 소용도 없다.
저 스킬은 웬만한 물리 방어 따위는 다 때려 부수며 나아갈 테니까.
캥수 역시 주먹에 마나를 싣는다.
스킬에는 스킬로 맞서겠다는 뜻.
발동 타이밍은 살짝 늦었지만, 캥수의 펀치 역시 전광석화처럼 쏘아졌다.
스킬명 핵주먹.
결국, 두 주먹은 허공의 한점에서 만나며 마나의 대충돌을 일으켰다.
치이이익!
물론 나는 이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핵주먹과 불주먹. 어감부터 어느 쪽이 강한지는 명확하다.
“아아아악!”
소리의 진원지는 예상대로 김세용.
녀석은 얼얼한 주먹에 신음을 뱉어 낸다.
그리고 캥수가 연속으로 쏘아 낸 펀치는 결국 녀석의 안면을 강타하고야 말았다.
퍼어억-
30층과 31층. 두 층의 상당 시간을 할애하여 캥수를 키운 보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캐앵!”
김세용은 넋 나간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버렸다.
“와 씨! 또 방심했어!”
그래도 입은 여전히 살아 있다.
“기다려 봐. 이설 씨 데려와서 힐 걸어 달라고 할 테니까.”
“힐은 무슨! 그냥 이렇게 있다 보면 금방 회복된다고! 그리고 방심한 거야, 방심!”
녀석은 누워 있는 채로 방심했다는 말만 계속 되뇌었다.
멘탈이 나간 듯하니, 오늘 스파링은 이쯤에서 마무리 될 것 같다.
김세용 성격상 이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스파링을 요구할 테니, 당분간 캥수가 좀 귀찮아지게 생겼다.
* * *
32층 시작 전까지 부여된 시간은 단 1시간.
수련을 하기엔 자유 시간이 짧았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캥수와 김세용의 스파링 이후에는 로비 한쪽 구석에서 개인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생각할 게 좀 많다.
지난 두 개의 층을 겪으며 얻은 새로운 데이터들은 내게 혼란을 주었으니까.
‘지혜롭고 순결한 자.’
열두 군주 중 하나인 그가 내게 공략집을 보내는 존재라는 것은 거의 확인되었다.
하지만 몇몇 의문점들은 남는다.
‘열두 군주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은 가장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내가 느낀 대로라면, 군주들끼리는 오롯이 협력하는 관계가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
확실히 31층의 군주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호감도만 해도 그러했다.
실제로 나는 버프를 최대치로 받고 있었지만, 내 호감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나에게 정체를 숨기기 위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으나, 호감도가 조작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기각.
31층의 보상이 성검으로 바뀐 이후, 잔여 시간이 말도 안 되게 설정된 점도 확실히 이상한 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성검의 파편을 한 조각 부족하게 모은 채 31층을 마쳤어야 할 테니까.
마왕성에서 라덴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31층에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을 공산이 크다.
‘고로, 지혜롭고 순결한 자는 나를 은밀하게 돕고 있다.’
이것은 현재 내가 세워 볼 수 있는 가설이었다.
다른 군주들이 엿볼 수 없는 은밀한 장소 ‘차원의 틈새’의 존재도 이 가설을 지지한다.
이 탑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내가 그 결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탑을 계속 오르다 보면 이 퍼즐 조각들은 하나하나 맞춰질지도 모른다.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이 의문들도 풀 수 있는 것이니까.
‘어쨌든 강해졌다.’
신화급 아이템 팔라스의 방패를 새롭게 얻었고, 라덴이 내 영혼에 새긴 에테르는 약속했던 대로 일부분이 마나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성검 가이아.
생긴 것과는 다르게 신비한 권능을 가진 놈이었다.
‘포털을 열어 버리다니.’
발동 조건이 충족되면 성검은 차원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31층에서 성검을 획득한 직후, 나는 그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성검을 들고 마력을 불어 넣어 허공에 원을 그리니 바로 포털이 만들어진 것.
물론, 내가 원하는 장소까지는 지정할 수 없었다.
31층의 잔여 시간을 무시하고 로비로 복귀하는 정도에만 그칠 뿐이었으니까.
만약 장소까지도 나의 통제권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곧 사부나 혈마와 대등한 경지일 것이다.
휘이이익!
나는 성검을 들어 올려, 그때처럼 허공에 원을 그려 보았다.
검 끝이 지나간 궤적에는 미세한 잔상이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현재로선 조금 신기한 현상을 일으키는 검.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장소도 지정할 수 없지만, 포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타이밍 또한 내 의지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신주아의 생각이나 물어볼까?’
그러고 보니 로비로 복귀한 후, 신주아와는 아직 대화를 나눠 보지 않았다.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내기도 한 사이인데 그동안 로비에서는 유난히 신주아와 접점이 없는 편이었다.
신주아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바로 성검에 대해 묻는다.
“그게 성검이로군요.”
“어. 겉으로는 별거 없어 보이지?”
상점창에서 파는 싸구려 낡은 장검과 비교해도 외양상으로는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성검이라는 명칭이 아까울 정도로.
“확실히 50만 골드짜리로는 보이지 않는 군요.”
그녀는 내게 바로 채무 관계를 상기시켜 주었다.
“참고로, 6만 골드는 까야 해.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너를 치료하느라 엘릭서를 구입했거든. 정확히는 6만 골드보다 더 많이 쓰긴 했는데 그냥 이 정도로 퉁 쳐줄게.”
“확인할 수 없는 말이로군요.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하지.”
“믿겠습니다. 그럼 현재 채무 관계는 44만 골드.”
“걱정하지 마. 떼먹을 일은 없을 테니까.”
성검을 얻고 나니, 50만 골드가 큰 금액은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성검을 좀 더 진보된 형태로 쓸 수 있는 날이 와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포털을 열었어.”
신주아에게 31층 마왕성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 성검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기능과 함께.
공략집은 현재까지도 불통 상태였기에, 그녀가 이 성검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물론 그것이 정답은 아니겠으나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템 설명도 없고, 발동 조건도 알려진 게 없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언젠가는 더 자유롭게 쓸 날이 오긴 하겠지만, 네 생각은 어때?”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이 성검에는 에고가 있을지도 모르니 자주 사용하면서 서로 교감을 늘려 나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에고?”
“방금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성스러운 검을 몬스터를 상대로 사용한다면, 검이 거부할 거란 말을 들으셨다고.”
“거부한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이를 테면 검의 위력이 감소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탑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일단 저는 성검에 자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나가 나에게 해 준 말을 신주아는 색다르게 해석을 한 것이다.
검에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니.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고마워. 좋은 참고가 될 수도 있겠네.”
“50만 골드보다 더 부를 걸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그래 봤자 소용없어. 그 이상은 안 줄 거니까.”
“어쨌든 성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니, 훗날엔 그 쓰임이 더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혈마는 내게 이런 말은 한 적이 있었다.
플레이어의 탑 등반보다 탑이 확장되는 속도가 더 빠르기에, 어쩌면 영원히 이 탑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성검은 나를 탑의 결말로 안내할 마스터키가 되어 줄지도.
[이제 곧 32층이 시작됩니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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