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신주아! 괜찮아?”
에테르의 혼탁한 기운에 신주아의 상태는 확실히 심각해 보였다.
총기 넘치는 그녀의 눈빛도 서서히 초점을 잃고 있다.
“야, 괜찮냐고!”
여전히 묵묵부답.
뭔가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에테르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나?’
강렬한 매캐함에 호흡이 힘든 것은 사실이나, 솔직히 나는 아직까진 견딜 만했다.
그래서 더욱 의외였다.
나보다는 신주아가 더 독종인 게 확실하니까.
쿵-
하지만 신주아가 느끼는 한계는 나와는 많이 다른 듯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목각처럼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신주아!!”
- 왜? 마누라가 죽었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
또 갑자기 라덴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왕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질리는 스타일이다.
- 아주 잘들 논다. 탑에서 부부 놀음이라니. 어쨌든 걱정할 거는 없어. 정신이 좀 오염되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하긴, 네놈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하니, 네 마누라의 심장 소리 정도는 듣고 있겠네.
“그럼 설명 좀 해 주시죠.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 나한테 무슨 설명 맡겨 놓은 것처럼 말하네.
“그럼, 전 조용히 다시 퀘스트나 하러 가고요.”
- 뭐, 어쩌겠어! 이호영이 설명하라는데 해 줘야지.
그녀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어 가는 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 정확히 뭐가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너만 무사한 이유를 묻는다면 넌 에테르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동안 나랑 거래도 좀 해 봐서 알잖아. 그렇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다.
그동안 라덴에게 영혼의 일부를 살짝 넘기는 대가로 내 영혼에 에테르를 새기곤 했으니, 면역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록 오염된 부분은 바로 엘릭서로 치유해 버리긴 했지만.
- 그런데 그동안 서운하지는 않았어? 요새 내가 너한테 나타나지 않아서 말이야.
“무슨 대답을 원하시죠?”
- 알았어. 이 나쁜 놈아! 네 마음 정도는 나도 다 알고 있다고! 얘가 립서비스라는 것도 할 줄 모르네!
31층에서 라덴이 나타난 것은 내게 한 가지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내게 공략집을 주고 있는 ‘지혜롭고 순결한 자’는 마왕과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
처음 마왕 라덴을 만났을 때를 돌이켜 봐도 그러했다.
여러 선택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공략집은 내가 라덴과의 접점이 생기는 것을 유도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
마왕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이제는 한 가지 확률 높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지혜롭고 순결한 자]는 나를 조력하기 위해 은밀하게 마왕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
또 돌이켜 보면, 라덴은 나의 영혼 치유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영혼에 에테르를 새기는 대가로 힘을 빌려주곤 하였는데, 나는 도움만 받은 후 항상 영혼을 원상복구 시켜 놓았다.
처음엔 라덴이 모르고 넘어갔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든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던 거로군.’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내 가설이 맞다면, 왜 마왕은 악역의 가면을 쓰고 나를 은밀하게 조력해야만 하는가?
물론 직접 물어볼 수는 없기에,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럴 땐 나도 모른 척하는 게 상책.
- 뻔한 레퍼토리긴 한데, 지금 나한테 영혼 팔 생각 없어?
이제는 이 제안도 달리 느껴진다.
은밀하게 감춰져 있을지 모를 나에 대한 호의를 생각하니, 이 목소리도 조금은 덜 질리게 느껴진다.
물론 덜컥 수락해 버리면 모양새가 이상하다.
“글쎄요. 지금 저한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 이유가 없긴 왜 없어! 너 퀘스트 해야 하잖아! 이 많은 마인들 중에서 내 분신 찾는 게 쉬울 줄 알아?
“모르셨나요? 저한테는 니케의 반지가 있다는 거.”
- 그래. 네놈이 그거 믿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냐? 네 생각대로 되진 않을 텐데.
“무슨 뜻이죠?”
- 여긴 마왕성이야. 나의 영향력이 그 어느 곳보다 강하게 미치는 곳이지! 네놈의 아이템이 내 의지보다도 강할 거라고 생각해? 못 믿겠으면 한번 시험해 보든가!
라덴의 이 자신감은 결코 뻥카가 아닐 것 같단 예감이 든다.
물론 못 이기는 척 나에게 져 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걸 확인하고자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
“좋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죠. 단, 제가 팔게 되는 영혼은 예전과 동일한 양으로!”
- 기왕 파는 김에 좀만 더 팔아. 그 대신 너에게 힘을 주지.
“힘이요?”
- 에테르의 일부를 마력으로 완벽하게 변환해 주겠다는 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영혼 오염은 어차피 엘릭서로 치유가 가능한 것.
하지만 마력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찝찝하지만, 받아들이죠.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별도리가 없으니까”
- 흐흐흐흐. 좋아. 거래는 성사되었다! 이젠 네놈의 모든 스킬과 아이템들이 정상으로 가동될 거야.
솔직히 아직은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력도 그대로이고 말이다.
라덴이 그렇다고 하니 일단은 믿는 수밖에.
타아아앙!
타깃을 설정한 뒤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지금도 매캐한 에테르의 기운이 역겨웠기에,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빨리 종료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마탄을 맞은 마인은 여지없이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마왕의 분신이 사망하였습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어?
효과가 이렇게 직방으로?
[보상으로 성검의 파편 한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조각 모음: 7/7]
드디어 성검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 *
“어때? 소감이?”
제나의 질문은 뜬금없었다.
사실 이 차원의 틈새에 다시 들어오게 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연이어서 오른 이번 30층과 31층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의문을 남겼었기에.
“무슨 소감?”
“그냥 무엇이든 좋아. 지금 네 심정이 궁금한 거니까.”
“네가 궁금해하는 거냐, 아니면 네가 모신다는 그분이 궁금해하는 거냐?”
“둘 다. 그러니까 빨리 말해 봐!”
[빨리!]
[빨리!]
[빨리이이이!]
이 콩알만 한 것이 엄청 보챈다.
“그냥 좀 혼란스러워.”
“소감을 물었는데, 그게 다야?”
“한편으로는 지치기도 했지.”
“아주 배부른 소리만 하시네요? 또?”
“그래서 쉬고 싶어졌어. 빨리 이 탑 전체를 클리어한 다음에 말이야.”
“오오! 이건 좀 마음에 든다. 탑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인가?”
“그런 셈이지.”
“75점!”
“뭔데?”
“있어, 그런 게.”
“내가 물어볼 게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
“어, 그런데 다 얘기해 주지는 않을 거야. 그냥 너는 네가 짐작한 것을 믿으면 돼.”
“지혜롭고 순결한 자! 맞지? 네가 모시고 있는 그 존재.”
“말했잖아. 다 알려 주진 않을 거라고.”
직접 대답을 들어 봤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
경고를 무시하고 30층의 초반부터 호감도를 올린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도 없고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도 결국 똑같을 것이다.
“알겠어. 그럼 성검에 대한 것이라도 좀 묻자. 이건 말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어, 일단 축하해. 성검의 기능 한 가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래. 이미 사용해 봤으니까.”
전투용으로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으나, 놀라운 기능이 한 가지 있었다.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이 검을 이용해서 포털을 열 수 있다는 것.
사부나 혈마만이 가능하던 것을 내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처럼 원하는 때에 자유자재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마왕성에서의 스페셜 미션을 클리어한 후, 나는 성검을 사용하여 바로 포털을 열 수 있었다.
그리하여 31층에서의 잔여 시간이 1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미리 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
내 상태창에는 여전히 잔여 시간과 함께 31층 군주의 호감도가 표시되어 있으며 지혜의 버프 또한 받고 있다.
“앞으로도 몬스터를 상대할 땐, 그냥 네가 사용하던 엘리시온을 그대로 써.”
“그럼 성검은?”
“이 성스러운 검으로 설마 몬스터를 썰려고? 아마 성검이 거부할걸?”
“까다로운 녀석이군. 심지어 아이템 등급도 없잖아.”
[성검 가이아]
- 등급: 없음
심지어 효과에 대한 설명도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이템이 아니니까. 하지만 성검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도 극복하게 해 줄 거야. 이 검엔 그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겉으로 보기엔 잘 모르겠지만, 이미 포털을 연 것만으로도 놀라움은 충분히 확인했다.
“단, 네가 언더독이 아니라면 성검의 성능이 생각처럼은 발휘되지 않을 거야.”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쉽게 만날 수는 없잖아. 게다가 몬스터도 제외해야 하고.”
“그러니깐 위급한 상황에서만 쓰면 되는 거잖아! 도대체 탑을 얼마나 날로 먹으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검을 쓸 기회가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포털을 열 때는 제외하고.
“32층은 어떤 곳이지?”
“네게는 고난과 역경이 될 만한 곳.”
“또 다른 군주의 영역이겠군. 내 초기 호감도는 완전히 개판일 테고.”
“로비에다가 돗자리 펴도 되겠네.”
나는 또 무슨 이유로 한 군주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인지.
나 역시 32층이 벌써부터 격렬하게 싫어진다.
“그러니 이 차원의 틈새에서 마음껏 쉬다 가도 좋아. 이번에는 특별한 보상은 없이 그런 이유로 널 여기로 부른 것이니까.”
나무 밑 정자에는 먹음직한 음식들과 다과가 가득 놓여 있었고, 매혹적인 향을 풍기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도 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차려 준 건 고마운데 기왕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있으면, 수련이나 좀 하다 가려고. 차원의 틈새에선 아직 지혜의 버프가 작동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주 뽕을 뽑으려고 하는구나. 뭐, 거기까진 내가 터치할 순 없으니까.”
[니 마음대로 하세요.]
잔여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혹시 또 모른다.
심득이란 것은 찰나의 순간에도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니까.
* * *
전원 생존.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과였다.
다른 플레이어는 몰라도 남소현은 31층에서 힘들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30층에서 유일하게 마이너스 호감도를 찍은 플레이어였으며, 아카데미 이론 시험에서도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으니까.
이론 점수와 연계되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고난도의 31층이었을 터. 하지만 남소현은 보란 듯이 31층을 통과하고 로비로 복귀했다.
그런 걸 보면 살성이 상시 기본적으로 누리는 버프는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들 많이 성장했군.’
남소현을 제외한 모두의 호감도가 플러스였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지혜의 버프를 누렸을 것이다.
모두들 스킬의 숙련 등급이 한두 단계 이상 상승했으며, 레벨업에 따른 스탯 상승폭도 상당히 가파르다.
“호영이 형!”
“잘 지냈냐?”
“자알 지냈지! 형한테 자랑할 만큼 강해지기도 했고.”
김세용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씨익 웃는다.
강해졌다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31층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30층에서 호감도 99를 찍었던 채이설만큼이나 성장했을 정도니까.
“그럼, 오랜만에 캥수랑 스파링 좀 해 볼래?”
“캥수랑?”
“왜.”
“형! 미안한데, 이제는 내가 캥수랑 놀 레벨이 아니야. 뭐 예전에도 아니긴 했지만. 크크크.”
“캥수 이기면 1000골드 준다.”
“1000골드? 그럼 콜!”
김세용이라면, 새로 태어난 캥수를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상대.
기대된다.
캥수가 어떤 식으로 세용이 녀석을 꺾을지.
- 22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