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순간, 율리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나오고 있는 저 애송이 총대장 녀석.
정말 셋을 세는 동안 내려가지 않으면 한 대 칠 것만 같은 기세였다.
‘정말로 S급일까?’
일단 공식 등급이 S급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일천한 경력의 이 녀석이 이번 임무의 총대장이 된 것이니까.
하지만 율리겐은 이 공식 등급을 오롯이 신뢰할 순 없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눈앞의 이 녀석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E등급.
그런 애송이가 단숨에 S등급으로 승급한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너무 벗어났다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E급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녀석이 S급이라는 건 더욱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기사단에서 농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것이 율리겐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차라리 기회가 될 수 있겠군.’
총대장을 상대로 노골적으로 하극상을 벌일 순 없다.
아무리 애송이라 할지라도 이번 임무에서만큼은 상관이니까.
하지만,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잘하면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도 있겠어.’
무엇보다 이곳의 여론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분위기니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용병들의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율리겐은 호영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하나, 둘!”
당연히 셋을 셀 때까지 내려갈 마음은 없다.
“셋!”
궁금했다.
과연 이 애송이는 셋을 센 이후에 무엇을 할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이 애송이가 개망신을 당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기왕 이렇게 마음을 먹었으니, 자비를 따위는 베풀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율리겐은 복부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바로 알 수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단지 내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만이 엄습했다.
“우웨에엑!”
그리고는 오늘 점심에 먹은 것들을 다시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말했잖아. 딱 셋만 셀 거라고.”
잠시 정신이 멍멍해졌기에, 율리겐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애송이 녀석이 자신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것.
많은 용병들 앞에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솟구쳤다.
‘개자식이!’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이미 율리겐은 눈이 돌아간 상태였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뒈져 버려!!”
하지만 주먹은 저 애송이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퍼억!!
그 대신 본인의 하관 부근에 둔탁한 충격이 가해졌고, 입 안에서는 하얀 알맹이 몇 개가 튀어나왔다.
온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돌아간 후에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정면으로 보인다.
율리겐은 그제야 무언가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선언한다. 이 시간부로 율리겐을 부대장의 지위에서 박탈한다. 혹시라도 내 뜻에 불만이 있거든 지금 이 연단 위로 올라와도 좋다!”
애송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상황이 그냥 꿈이었으면 좋겠다.
* * *
총대장이 되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바로 잠자리였다.
지난번 갈라크 가문 때에는 텐트 막사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레노아 공작은 내게 특별히 별채 하나를 내주었다.
아담한 규모였지만 이곳에 비치된 침구나 집기류는 모두 최고급이었기에, 마치 호텔에 와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별채는 나 혼자 오롯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의 아니게 신주아와 또 부부 행세를 하게 되었으니까.
“역시 성격이 무르신 거 같습니다.”
“뭐가?”
“율리겐에 대한 처분 말입니다. 저한테 맡기셨으면 그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신주아 얘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그래서 너한테 맡기지 않은 거야.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니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라.
하긴, 탑은 본래 그런 곳이다.
온정주의보다는 비정함이 미덕인 장소.
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존이기에 신주아의 방식은 우월한 전략인 것은 분명하다.
“밖에 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반스 형님이 온다고 했었어.”
문을 열어 보니 반스의 양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다.
“자. 여기! 좋은 밤 되라고 특별히 준비한 거야.”
“내일이 디데이인 건 알고 계시죠?”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거하게 취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짜 용병이 되는 거라고! 총대장이란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
“그래서 이거 전해 주러 오신 겁니까?”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야. 잠깐 자리에 앉아서 얘기 좀 하자.”
반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두루마리를 펼쳐 놓았다.
저택의 평면도가 그려진 그림. 그리고 그림 안에는 반스가 정리해 놓은 내일의 계획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한참을 설명하는데, 겉보기와 달리 꼼꼼한 모습이 상당히 의외다.
“오늘 밤부터 병력 배치는 이대로 하면 어떨까 싶은데.”
“이거, 형님께서 직접 다 준비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단장님이 네 옆에 날 붙여 놓은 이유가 뭐겠냐? 네가 무력으로는 무쌍을 찍는다고 해도 전략과 전술은 나한테 의지를 해야 해. 알지?”
반스가 생각보다 열심히 준비를 한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것들은 내일 아무 쓸모가 없을 테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반스 형님.”
“그럼 내가 나가서 직접 병력 배치 지시한다?”
“그러셔도 되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마도 우리 용병대는 내일 저택에 없을 예정이니까요.”
“뭐라고?”
내가 얼마나 미친놈으로 보일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하지만 방어를 꼭 저택에서 하라는 법은 없다.
포털에서 나오는 족족 처리하는 편이 오히려 더 효율적일 터.
내일 우리 용병대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 *
신주아와 함께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 이제는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을 떴고, 하루의 준비를 시작했다.
저택의 장원으로 산책을 나가 보니, 용병들은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막사 텐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반스 형님이군.’
바깥이 시끌벅적하다 싶었는데 계획했던 병력 배치를 밤중에 실시한 모양이다.
아직 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사실, 어느 정도의 긴장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으니 굳이 반스를 말리지는 않았다.
시찰을 돌아보니, 어제와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달라져 있었다.
율리겐을 줘 팬 효과가 있었는지 다들 군기가 바짝 든 모습.
역시 힘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손쉽게 군중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긴장 풀고 편하게들 있도록! 물론 오늘 저녁에 중요한 지시사항이 있을 때까지만.”
긴장은 그때부터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저택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용병들의 검술을 점검해 주었다.
사실 가르치는 것만 놓고 본다면 내가 천마인 사부보다도 한 수 위다.
탑을 등반하며 무림을 비롯한 다양한 차원의 검술을 접하기도 했고 말이다.
처음에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던 용병들도 나의 지도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마움을 전하였다.
개중에는 나의 짧은 가르침에도 큰 심득을 깨달은 이들이 있었다.
“감사드립니다. 대장님! 막혀 있던 부분이 뚫린 느낌입니다.”
“이름이 제킨이라고 했던가?”
“네!”
“좋은 검술이었다. 네 이름을 꼭 기억해 두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영감을 준다는 건, 나로서도 즐거운 일이다.
이곳 31층도 이제 곧 떠나기에 긴 인연을 만들 순 없겠지만, 나에 대한 기억은 잠시 동안은 지속되고 있을 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대장님! 불새 용병단의 욜센이라고 합니다. 저도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비상 기사단의 카이셸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저도 좀…….”
다른 용병들의 검술이 순식간에 좋아지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을 테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몸이 열 개라도 되면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에 이 용병들을 전부 지도해 주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쉬운 대로 신주아를 투입했다.
“제가 검술 지도를 말입니까?”
“그래. 네 주무기가 양날 도끼라 해도 웬만한 검사보다 뛰어나다는 거 알고 있어. 거기에 지혜의 버프를 받고 있으니,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거야.”
“꿩 대신 닭 취급을 받을 게 뻔하지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꽤 그럴듯하게 가르칠 게 분명하다.
그녀의 통찰력만큼은 나보다도 월등하니까.
* * *
어스름한 저녁.
나는 테이아의 날개를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갈라크 때의 경험대로라면, 이제 곧 어딘가에 포털이 열릴 시간이 되었다.
그리 먼 위치는 아닐 것이다.
또한 포털은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생성될 터.
나는 후보지 몇 군데를 꼽아, 절대 시각을 확장하며 관찰하였다.
일단 포털이 열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시간이 아주 중요해진다.
포털에서 마인들과 몬스터가 모두 등장한 후에는, 포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니까.
마왕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 나와 신주아는 포털이 닫히기 전 그곳에 들어갈 계획이다.
물론, 그전에도 아주 중요한 선결 과제가 있다.
최대한 빠르게 마인들과 몬스터를 모두 정리해야 한다는 것.
31층의 잔여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마왕성에서 생성될지 모를 스페셜 퀘스트를 할 시간은 최대한 확보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마왕성에 들어갔는데도, 스페셜 퀘스트가 생성되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
내 팔에 의지하여 하늘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신주아.
그녀는 이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특유의 말투만은 잃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 잔여 시간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죽어라 버텨야지.”
“그리고 50만 골드를 날리시는 꼴이 되겠군요.”
신주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성검의 파편 조각을 혼자 독식하는 조건으로 신주아에게 50만 골드 양도를 약속했으며, 이 계약은 성검의 완성 여부와 상관없이 유효하다.
“재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확 놔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마왕성에 가면 분명 스페셜 퀘스트가 생성될 겁니다.”
“진심이지?”
“……그렇습니다.”
“대답이 좀 늦네.”
“착각이십니다.”
쓸데도 없는 쇠붙이 파편 6조각을 50만 골드에 사는 호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무조건 31층에서는 성검을 먹고 끝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마왕성에 가는 건 두렵지 않으십니까?”
“끽해 봐야 마왕밖에 더 있겠어?”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과는 격 자체가 다른 존재일 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마왕이 몇이나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중 하나는 잘 알고 있다.
마왕 라덴.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생각과 달리 위험한 존재는 아니다.
질척대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
그때였다.
파바밧!
파바바밧!
우리가 떠 있는 곳의 바로 아래. 어느 으슥한 숲속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다.
“포털입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지 좀 마. 아주 중요한 순간이잖아!”
“그렇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웃기지 말입니다.”
“너, 도대체 어느 부대 출신이냐?”
이제 곧 마왕성과 이곳이 연결되며, 포털에서는 마인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지금부터는 중요한 시간 싸움이 시작된 것.
타앙!
타아앙!
나는 홍염의 불도깨비를 쏘며, 반스와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반스는 경험 많은 지휘관이니, 신속하게 용병들을 이끌고 여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저택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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