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보는 탑 공략집-216화 (216/292)

216화

마인 침공 D-1. 레노아 공작의 서재.

지난 갈라크 가문 때와 비교한다면 내 입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가문의 집사와 메이드들은 나를 귀빈으로 응대하였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공작의 서재 또한 다른 용병들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라 들었다.

제국의 저명인사들조차 이 서재에 들어와 레노아 공작과 독대를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할 정도니, 지금 내가 받는 대접이 얼마나 융숭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는 E급 용병에 전력 외 취급이었는데 말이다.

“이호영 대장, 차는 입에 맞으시오?”

“맛도 맛이지만,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향기가 참 고급스럽습니다. 공작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나는 검보다 차로 칭찬을 받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이오.”

그러면서, 레노아 공작은 저 혼자 껄껄 웃는다.

제국 제일검 카헬 레노아.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기도가 느껴진다.

검은 기사단의 단장 라멜보다는 확실히 위고, 나보다 위인지까지는 직접 겨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세상은 넓다.

“이 은은한 향을 우려내는 비법을 배워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안 가르쳐 주시겠지만 말입니다.”

“허허! 우리 용병대장께선 나를 쫌생이 영감쯤으로 보신 모양이군.”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만, 방금 그 말씀은 제가 배워 갈 수도 있단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이호영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내가 서재에 들어선 순간부터, 카헬 레노아는 나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렇게 노골적인 눈빛은 당장이라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공작님의 시선을 더욱 의식하게 되는군요.”

“이런! 내가 너무 티를 냈나 보군.”

“누구라도 느꼈을 겁니다.”

“이호영 대장이 그렇게 말하니 더 미안해지는구료. 이 칙칙한 영감의 시선이 그리 달갑진 않았을 터인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칼밥 먹는 사람 치고 공작님과 독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탕발림이 마냥 싫진 않은 모양인지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럼 하나만 묻지. 내가 이 저택에 용병들을 끌어들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사실 나도 궁금한 점이었다.

이번 임무를 받은 이후 카헬 레노아에 대한 조사를 좀 해 보았다.

일곱 살 때 처음으로 검을 잡았고, 마흔 무렵부터는 제국 제일검이라 불리었으며, 말년에 들어서는 다도에 빠져 사는 인물.

괴팍한 성격에 중증에 가까운 결벽증까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본인의 저택에 좀처럼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지금 저택에 들어와 있는 용병의 규모는 갈라크 때와 비교해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카헬 레노아 가문의 전력이 약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친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가주인 카헬 말고도, 일곱 명의 아들 모두 절세 고수라 불릴 정도니까.

“설마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보지 않은 것이오?”

“아닙니다. 저도 궁금했습니다. 공작님께서 왜 굳이 용병들의 손을 빌리시는 것인지. 그리고 사실 그 의문에 대해서는 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봤습니다.”

물론, 지금 즉흥적으로 떠올려 본 생각이다.

“공작님께서는 그냥 제가 보고 싶으셨던 것 아닙니까?”

이렇게 날 노골적인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아님 말고.

“내가 이호영 대장을 보기 위해 이 많은 용병들을 내 집으로 들였다?”

“제가 잘못 짚은 것입니까?”

“하하하하! 역시 이호영 대장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카헬 레노아는 처음으로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제 생각이 맞았군요.”

“그렇소. 갈라크 저택의 임무에 참여한 용병 중에는 나의 사람도 있었지. 조만간 나도 마왕성으로부터 서신을 받을 거라 예상하는 바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아주 재밌는 것이었어.”

“저에 대한 이야기였겠군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이렇게 이호영 대장을 직접 보고 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단 생각이 들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오.”

“제국 제일검께서 저를 좋게 봐 주시니 영광일 뿐입니다.”

“내가 이호영 대장에게 하고 싶은 제안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나랑 한번 싸워 보지 않겠소?”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훅 들어온다.

이건 결코 농담이 아니다.

레노아 공작은 진심으로 나와 싸우고 싶어 한다.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

“승부의 결과와 상관없이 용병대를 제 마음대로 지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것은 내 허락이 없더라도, 용병대장이라면 마땅히 갖는 권한이라 생각하오만.”

“제가 디데이인 내일 어떤 돌발적인 짓을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레노아 가문에서는 일체의 간섭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라며, 그것에 제 요구 조건입니다.”

물론, 공작의 허가가 없더라도 나는 내 계획을 감행할 것이다.

내일은 31층의 모든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 테니까.

“좋소. 그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공작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타이밍에서 스페셜 퀘스트는 생성되지 않는군.’

약간의 기대를 해 본 것도 사실이다.

제국 제일검과의 승부가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닐 테니까.

역시 내일 계획했던 마왕성을 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 *

승패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 요구 조건에는 ‘승부의 결과와 관계없이’라는 단서를 달아 놓았으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련이 시작되고 나니 승리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세상에 져도 되는 승부는 없다.

휘이이이익!

공작은 600년 전 마왕을 상대한 레노아 가문의 독문절기를 펼쳐 내며 나를 위협해 왔다.

살초는 아니기에, 웬만해선 팔라스의 방패가 자동으로 가동되지 않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워 놓았다.

단 한 번이라도 방패가 가동되는 것은 나의 패배라고 말이다.

“이호영 대장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군.”

“그건 공작님께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만.”

사실 전력을 다한다는 기준이 나에게는 살짝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일격필살이라는 이름을 붙인 버프를 사용한다면 승부는 단번에 끝난다.

지금 우리의 대결은 동급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놀라워. 사실 이런 대결을 펼쳐 보는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야.”

사실 더 놀란 것은 나였다.

31층에 이 정도의 강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카헬 레노아와 싸운 시점이 29층만 되었더라도 명백한 나의 패배였을 터.

이렇게 탑을 계속 오르다 보면, 더 많은 강자들을 만날 거란 생각을 하게 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 궁극의 끝에는 어쩌면 사부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신주아의 예언대로 사부가 완전한 등선에 성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 내 앞에서 검을 맞대고 있는 것은 카헬 레노아.

우리는 서로에게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한 채 허공만을 베었으며, 때로는 서로의 검을 부딪치며 끊임없이 상대의 여력을 탐색했다.

나는 무명보를 밟으며 무영추혼검을 펼쳤고, 때로는 수라마혈검도 교묘하게 섞었다.

물론 두 검술을 섞는 것이 대단한 효과를 가질 리는 만무하다.

고수 간의 대결에서는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는 것은 통하지 않으니까.

다만, 지혜의 버프를 받는 31층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검술이오. 여기에 총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던가?”

“지금의 대결에선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설마, 가진 패를 다 쓰지 않고도 날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점점 제 전력을 다해 가고 있으니까요.”

총은 어디까지나 총일 뿐 검이 아니다.

이 대결에 총이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

테이아의 날개 또한 그런 이유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휘이이이이익!

또다시 공작의 검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검 끝에서 일렁이는 정순하고도 가지런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승부수로군.’

순간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승패는 이번 합에서 결정이 난다는 것을.

나 역시 엘리시온을 뻗었다.

거대한 두 개의 기운이 서로를 교차하며 쭉 뻗어 나간다.

승부는 이것으로 끝. 반의반 끗 차이였다.

타악-

공작의 명치를 여미고 있던 단추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다.

내 허리춤의 용병패는 바람에 한번 출렁거리더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제국 제일검이 바뀌는 순간이로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승부를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가진 전력을 탈탈 끌어모아 싸운 상대는 정말로 오랜만이었으며, 이런 경험은 언제나 나에게 심득을 가져다주곤 하니까.

좋은 승부였다.

* * *

하얀 사자 용병단을 끝으로 이번 임무에 참여할 모든 용병이 레노아의 저택 부근에 집결하였다.

이제 다 모였으니 이번 용병 연합을 이끌 총책임자로서 내가 무리의 앞에 나서야 할 시간.

그런데 한 가지 거슬리는 일이 생겨 버렸다.

하얀 사자 용병단.

지각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도착하고 나서도 아무도 용병대장인 나에게 보고를 하러 오지 않는다.

“무시당하고 계십니다.”

신주아의 말이 묵직하게 꽂혀 왔다.

사실 예상했던 일이다.

실전은 고작 두 번째인 내가 용병 연합의 대장을 맡고 있는 건, 누가 보아도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직접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시면, 제가 나서서 교육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좋지 않아. 디데이를 앞두고 피비린내는 맡고 싶지 않거든.”

“도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고.”

“어쨌든 내가 풀어야 할 문제야. 마침 하얀 사자 쪽에서 빌미를 주었으니, 좋은 건수 하나가 생긴 셈이지.”

일단 반스를 통해 모든 용병단을 정렬시킨 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섰다.

내게 집중하는 것은 검은 기사단이 유일했고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상은 했지만, 대장으로서의 권위가 참 말이 아니다.

“다들. 주모오옥!!!”

나는 마나를 실어 소리를 질렀다.

이런 종류의 사자후는 내 전공이 아니기에 오줌 지릴 정도의 포스는 내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는 거둘 수 있었다.

지금 용병들은 모두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눈빛들이 살짝 불량한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이번 작전에 총책임을 맡게 된 이호영입니다.”

인사 한마디 했을 뿐인데, 장내 분위기는 다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이 내 나이와 경력에 문제를 삼는 말들이다.

이 분위기를 틈타, 하얀 사자 용병단 쪽에서 한 명이 연단으로 올라왔다.

하얀 사자 쪽에서 환호성이 쏟아지는 걸 보니, 이자가 누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용병 연합의 부대장을 맡은 율리겐.

“당신이 이호영이군.”

“하얀 사자는 도착 보고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아 참! 보고를 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지금이라도 여기서 하면 되겠습니까? 크크크.”

율리겐은 사람들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 하얀 사자에서 온 부대장 율리겐이오. 아무래도 총대장께선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여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들 하시오?”

율리겐의 말에 하얀 사자단을 시작으로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율리겐은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나를 보며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인 거 같은데, 총대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녀석은 계속해서 승자의 표정을 짓고 있다.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어쩔 수 없다.

마침 카헬 레노아는 용병대 운영의 전권을 내가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으니, 내 행동에는 아무런 제약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연단 아래의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이곳의 총지휘권자로서 선언하겠다! 이 시간부로 하얀 사자의 율리겐을 부대장의 지위에서 박탈한다!”

다시 또 웅성거리는 장내의 분위기.

예상대로 율리겐은 바로 발끈했다.

“뭐? 방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날 끌어내리겠다는 건지 설명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만?”

“나는 약속 시간을 무엇보다 중요시 하는 사람이다. 신뢰를 깨뜨린 자에게 부대장 자리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만 내려가라.”

물론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다들 여기 좀 보시죠! 총대장 한 명이 권력 맛에 취해 중요한 일을 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사람들을 선동하는 게 제법 솜씨가 괜찮다.

그러니 여기서 바로 밟아 놓을 필요가 있다.

리더십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처럼 시간이 없을 땐 공포 정치가 최선.

나는 인벤토리에서 바로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뭐야? 와하하! 설마 그걸 여기서 휘두르려는 겁니까?”

타아아악!!!

나는 엘리시온을 내리찍어 땅에 꽂아 버렸다.

단단한 연단이 순두부처럼 갈라지며 엘리시온의 3분의 1이 바로 돌 밑으로 잠겨 버린다.

이 모습에 이곳저곳에서 온갖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나는 율리겐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딱 셋만 센다. 내려가.”

녀석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물론 순순히 내려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람들 앞에서 판을 벌여 놓은 것은 율리겐 본인이니까.

“하나.”

“둘.”

시범 케이스로 패는 건 한 명이면 족하다.

- 217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