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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213화 (213/292)

213화

창백한 피부에 넋 나간 표정. 눈동자의 초점은 있는 듯 없는 듯. 마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부자연스러웠으며 마치 가면처럼 느껴졌다.

이 녀석들의 리더라 해서 별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왜소한 체구에 다른 마인들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모습은 무리 중에서도 쭈구리로 오인할 정도.

‘그래도 확실히 다르다!’

녀석이 내뿜고 있는 에테르의 기운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른 마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전에 와이번을 타고 왔던 그놈과 비교하면 살짝 부족해 보이지만, 그 수준이 전투력 판독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당시 내가 그놈을 죽일 수 있었던 건 템빨에 스킬빨에 요행까지 겹쳐져서 가능했던 것이니까.

[팔라스의 방패가 완전 수복되었습니다.]

30분 전에 뜬 메시지.

타이밍은 절묘하게 나를 돕고 있었다.

마인 녀석들이 몬스터를 먼저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이 저택과 용병대의 피해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일단, 기다리자.’

다른 마인들을 모두 뚫어 내고 저 우두머리와 대면한다 하더라도, 그 순간은 오히려 내가 기습을 당하기 쉬운 상황.

물론,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되어 나를 보호하겠지만, 이 아이템을 항상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금 아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 저 우두머리 녀석이 다른 마인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인들의 총공세가 시작되면 기회는 온다.’

이곳은 갈라크 저택의 별채 주변. 저놈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 별채에는 적장자 아민 갈라크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아민은 마인들의 최우선 타깃이니 지금 당장 모든 전력이 별채를 향한다 해도 이상한 건 없다.

"신참! 너 이 새끼, 계속 멍하니 서 있기만 할 거야?"

부대장 반스. 참 징한 녀석이었다.

판을 크게 봐야 하는 지휘관의 역할임에도 내 쪽으로만 레이더를 켜고 있으니.

"기 모으는 중입니다."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해?"

"그럴 리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너 이 새끼, 끝나고 봐!"

도대체 끝나고 보자는 말만 몇 번째인지.

그 순간, 마인들의 움직임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무질서하게 저택과 용병대를 향해 공격을 퍼붓던 마인들이 조금씩 규칙성을 갖춰 가고 있는 것.

에테르의 기운은 한쪽을 향해 쏠리고 있다.

‘별채!’

녀석들이 드디어 총공세 개시 시점을 잡은 것이다.

마인의 우두머리는 한껏 움츠린 쭈구리 자세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

파바밧-

파바바밧-

마인들이 일시에 검기를 쏟아 내며 별채를 향한다.

"다들 별채를 사수해!!"

반스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지자 모든 용병대는 황급히 몰려들었다.

하지만 나의 움직임은 반대 방향.

나는 별채로 달려드는 용병대와 마인들을 모두 지나치며 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팔라스의 방패가 가동됩니다.]

쏟아지는 마인들의 공격을 뚫어 내며 나는 타깃을 향해 달려갔다.

저 우두머리의 공격도 충분히 방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4시간마다 단 한 번. 마나를 증폭시킬 수 있는 은혜로운 버프를 사용할 생각이다.

‘일격필살.’

내가 스스로 명명한 이 공격이 마인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펼쳐진다.

"케에에엑!"

물론 녀석의 반격이 바로 이어졌지만, 신화급 아이템의 방어를 온전히 뚫어 내기엔 역부족일 터.

솨아아아-

엘리시온에 마나의 버프가 휘몰아 감기며 녀석의 뱃가죽이 잘려 나간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성검의 파편 한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조각 모음: 3/7]

됐다.

이젠 갈라크의 저택이 망가지든, 대공자 아민이 마인들에게 찢겨 죽든 나와는 크게 상관없다.

‘그래도 마누라는 구하러 가야겠지.’ 신주아는 지금 별채 안에서 아민을 호위하고 있으니, 마인들이 날뛰도록 그냥 둘 순 없는 노릇.

마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별채에 매달려 진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용병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타아앙-

타아아앙-

홍염의 불도깨비가 다시 불을 뿜으며, 마인들의 등에 구멍을 낸다.

우두머리를 잃은 녀석들의 기세가 조금씩 꺾이는 게 느껴진다.

결국 전세가 역전되며, 용병들은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신참!"

"기 모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타아앙-

타아아앙-

요란한 총성의 울림은 갈라크의 대저택을 꽤 오래 휘감았다.

* * *

용병대장 잘미르. 그리고 부대장 반스.

두 사람의 신경전은 꽤나 날카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호영은 우리 달빛 용병단 소속이야."

"네. 어제까지는 그랬겠지요. 잘미르 대장님."

"이봐, 반스! 그래서 기어이 검은 기사단의 자금력으로 우리 신참을 빼내겠다?"

"어차피 모든 것은 돈의 논리로 결정됩니다."

"이런 도적놈들!"

"저는 달빛 용병단이 더 도적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반스는 잘미르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중.

웃기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나의 의견은 아직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뭐? 우리가 도적 같다고? 상도덕도 모르는 놈이 그런 헛소리를 해!"

"잘미르 대장님, 이호영의 용병패는 확인해 보셨겠지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E급입니다. E급!"

"E급이 뭐가 어때서? 신입들은 거의 E급으로 시작하잖아!"

"그러니까 달빛 용병단이 도둑놈 심보라는 겁니다. 오늘 이호영이 활약하는 건 당연히 못 보셨겠지요?"

"구역이 다르니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본채 쪽을 맡고 있었으니까."

"저는 검은 기사단의 상부에 요청할 생각입니다. 이호영을 B급 헌터 조건으로 스카우트할 것을 말입니다."

"미친놈!"

둘 다 어이가 없다.

E급이고 B급이고, 다 거기서 거기.

내 진가를 몰라봐서 서운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지나치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모습을 사부가 봤다면 우리 셋 다 죽었다.

내 죄목은 우습게 보인 점.

그 순간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검은 기사단으로 소속을 옮긴 후, 첫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임무: 아직은 미정]

[보상: 성검의 파편 한 조각]

잘미르나 반스보다 더 어이없는 건 31층의 군주다.

임무가 아직은 미정이라니.

이젠 대놓고 31층이 급조되어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셈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소속을 바로 옮기라니.’ 아무리 그래도 B급은 안 된다.

내 활약을 보고서도 이런 계약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

"이봐, 이호영. 자네 생각을 한번 말해 보게. 신입으로서 E급 대우가 정말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나?"

잘미르가 묻는다.

당연히 내가 싸우는 걸 못 봤으니 이해는 하지만 말은 바로 할 생각이다.

"네."

"뭐라고?"

"방금 대답한 대로입니다. 신입이란 이유로 아무런 평가도 없이 등급을 최하로 책정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죠."

나의 대답에 반스는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잘미르 대장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재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선 곤란하다고요. 이봐, 이호영, 그럼 우리 검은 기사단 쪽으로 가는 거지?"

반스가 제시하는 조건은 위약금 플러스 B급 계약.

물론, 이보다 훨씬 못한 조건을 내걸었더라도 가야만 한다.

나는 퀘스트를 따라야만 하는 운명이니까.

"제 요구 조건이 관철된다면 검은 기사단으로 가는 것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배짱 한번 부려 볼 생각이다.

* * *

검은 기사단의 총단.

듣던 대로 규모부터가 다르다.

나와 신주아가 차를 마시고 있는 응접실의 외관도 아주 훌륭했다.

"어때? 여기 오기 잘한 거 같지 않아?"

"저희에게는 어차피 선택권이 없는데 말입니다."

"선택권이 왜 없어? 그냥 퀘스트 무시하고 남은 기간 동안, 여기 눌러사는 것도 방법이잖아."

사실 ‘남은 기간’이라는 것만 없다면 한 곳에 평생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탑에서 하루하루 미션을 수행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니까.

사실 나는 지구로 다시 돌아가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고아로 자랐기에 보고 싶은 가족도 없기에.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당신은 이곳에 평생 눌러살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엔 다시 탑을 오르는 선택을 할 겁니다."

"왜?"

"당신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탑의 마지막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군."

신주아와 이야기를 할 때면 종종 놀라곤 한다.

마음 스킬을 갖고 있는 나는 신주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데, 오히려 그녀는 나의 내면을 심층까지 보고 있는 느낌이다.

탑의 마지막.

그게 어디쯤에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예전에 혈마는 내게 탑이 계속 확장되는 중이라는 말을 하였고, 그 확장 속도는 어쩌면 우리의 등반 속도보다도 빠를지도 모를 거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탑 등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아직은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할 단계가 아니긴 하다.

한 층 한 층마다 매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준에서 굴레를 논한다는 건 시기상조.

일단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강해져야만 할 것이다.

신주아와 차를 다 마셔갈 때쯤 응접실로 들어온 건 반스, 그리고 검은 기사단의 단장 라멜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반스로부터 라멜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용병단의 모든 역사와 기록을 갈아치우며, 최연소로 단장에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라멜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궁금하군! 반스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얘기할 정도면 분명 보통내기는 아닐 테니까."

"그래도 당황스러우셨을 겁니다. 제 요구 조건이 용병단의 역사상 없었던 일이라 들었으니까요."

"과거는 항상 깨지기 마련이지. 나도 그런 과거들을 밟고 올라선 경험이 있기도 하고."

"기대되는군요. 단장님께서는 과연 어떤 테스트를 준비해 오셨을지."

"사실 생각해 둔 테스트가 있었는데, 자네를 보게 되니 생각이 달라졌어. 반스가 내게 엉터리 정보를 전한 거 같아서 말이야."

옆에서 듣고 있는 반스의 동공이 확장된다.

"단장님! 단장님께서는 이놈이 활약하는 걸 보지 못하셔서 그러는 겁니다. 이놈 생각보다 물건이 확실합……."

"그래. 물건이 확실해 보여. 문제는 자네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라는 거지만."

라멜은 나를 내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므노이 산에 가서 라이칸 슬로프를 사냥해 오게. 그럼 자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반스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멜의 말을 잘라 먹었다.

"단장님! 이놈이 아무리 물건이라고 해도, 이제 막 용병이 된 신출에게 라이칸 슬로프라니요! 그걸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건 저희 용병단에서도 단장님뿐 아닙니까?"

"물론 단독으로 시킬 생각은 아니야. 옆에 파트너가 있질 않은가. 보아하니 마나님께서도 보통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단장이라 그런지 눈과 감각이 보통은 아니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마냥 여기서 뺐다면, 나는 자네를 달빛 용병단으로 돌려보냈을 거야. 물론 거기서 자네의 곤란해질 처지는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닐 테고 말이야."

말은 이렇게 해도 라멜은 어떻게 해서든 날 붙잡았을 것.

그 순간 예기치 못한 탑의 메시지가 있었다.

[스페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므노이 산에서 단독으로 라이칸 슬로프를 한 마리씩 사냥하십시오.]

[보상: ???]

신주아와 내가 각각 한 마리씩이니 총 두 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

사실 문제가 되는 건 라이칸 슬로프를 잡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려 두 마리나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

최상위종의 몬스터는 존재 자체가 레어일 테니까.

"단장님께 분명히 해 둘 게 하나 있습니다."

"또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되는군."

"저희 부부는 모양 빠지게 둘이서 몬스터 하나를 합공하여 잡지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 한 마리씩 잡아 오겠습니다."

이번에는 반스뿐만이 아니라 라멜의 표정도 조금은 황당하다는 반응.

아무래도 나보다는 마누라가 더 무시당한 분위기인데, 신주아의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상당히 강해졌다.

이번 31층에서 들어서 그녀의 호감도는 쭉쭉 올라가고 있으니까.

- 21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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