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B급 용병 제롬. 그는 이 바닥에서 꽤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일단 B급이라는 등급 자체가 그의 경력과 실력을 보증하는 강력한 증거.
신입 용병은 E급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들 중 8할이 이런저런 이유로 D급 승급을 하는 데 실패하고, D급으로 올라선 이후에도 몇 년은 굴러야 C급으로 승급을 하게 된다.
그래도 여기까진 근성과 노력의 영역이기에 타고났다는 소리까지는 듣기 어렵다.
하지만 B급 정도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독으로 상위종의 몬스터를 잡아야만 승급할 수 있는 등급이니까.
B등급은 절대, 순수한 노력만으로 올라설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 봐야겠군.’
제롬은 검을 다시 고쳐 잡으며 호영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첫 합에서 검을 놓친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호영이 E급이라는 사실에 너무 방심을 했던 탓.
물론 방심을 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E급 신출내기를 상대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깊이 통감하는 바였기에, 이번에는 정말로 힘의 차이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들어와 봐. 신참!”
약속대로 처음 세합은 양보해 주겠지만, 마냥 피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다.
있는 힘껏 호영의 검을 쳐 내서 세 번 모두 땅에 떨어뜨릴 작정.
그쯤 되면 어느 정도는 자존심을 회복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선배님.”
호영은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터벅터벅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E급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발걸음.
제롬이 생각하기에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신참 입장에선 배우겠다는 자세로 바짝 긴장을 해야 하니까.
휘이익!
호영의 검이 허공을 베며 들어온다.
어떤 예비 동작도 없이 정직하게 날아드는 저 검날을 강하게 쳐 내리라.
제롬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심하게 휘두른 신참의 저 검날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어?’
이상한 일이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공기를 타고 짓눌러 온다.
심지어 신참의 검은 보이지도 않는다.
서둘러 방어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해 온다.
제롬은 그냥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틱!
검 끝과 검 끝이 살짝 교차하며 지나간다.
이 정도면 거의 묻어 간 수준.
‘하아!’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하지만 신참의 두 번째 공격이 또다시 지체 없이 들어온다.
첫 합과 거의 비슷한 느낌.
신참 녀석은 아주 무심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롬은 검에 마나를 한껏 불어 넣었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이번엔 반드시 녀석의 검을 떨어뜨린다.
라고 생각했지만,
틱!
놀랍게도 신참의 검은 뱀처럼 휘어져 또다시 검 끝과 검 끝이 스치며 지나갈 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의 두합, 그리고 그 이전의 한합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무려 세 번 연속으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연이 가능한가?’
놀랍지만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제롬 본인이 의도한 일이 아니며, 신참 또한 이걸 의도하여 실행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불안한 예감이 든다.
이 우연은 또 한 번 반복될 것 같은 느낌.
신참의 세 번째 공격도 지체 없이 펼쳐져 온다.
이번엔 찌르기 공격.
제롬의 검 또한 반사적으로 호영의 검을 향해 찔러 들어가고 있었다.
틱!
검 끝과 검 끝이 한점에서 만난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허어업!!”
검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순간적으로 털썩 빠져나간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채애앵!
제롬은 또다시 검을 떨어뜨렸다.
개망신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는 그저 멍하니 호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이 기막힌 우연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잠시 후 제롬은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넌!”
“E급 용병, 이호영입니다.”
신참 녀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출이라고?”
“네. 그런데 선배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 그런 거 같군!”
컨디션이고 뭐고, 귀신에 홀린 느낌.
오늘 이 얘긴 절대 아무한테도 못 한다.
제롬은 평생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오후.
나는 마지막 점검을 위해 처음으로 아민의 별채를 방문했다.
신주아에게 아민을 맡겨 놓은 후, 이쪽엔 신경을 꺼 두고 있었기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무심했나?’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보냈으며, 동이 튼 이후에도 한참을 함께 있었다.
그사이 여러 메이드가 청소와 식사 준비를 위해 들락거렸고, 심지어 갈라크 가문의 가주 내외가 별채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별 소동이 없었다는 것은 신주아가 망나니 단속을 잘하고 있다는 것.
내가 별채로 들어서자, 신주아는 특유의 초월적인 눈빛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밤사이 한 번 정도는 와 보실 줄 알았습니다.”
“왜? 서운했어?”
“서운했다기보다는 따분했습니다.”
“따분했다니 의외로군.”
아민, 이 망나니 녀석과 함께라면 따분할 틈이 없었을 거 같은데.
그나저나 아민의 얼굴이 이렇게 핼쑥했던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대공자님?”
“그렇다!”
반말을 하고는 있지만, 뭔가 군기 바짝 든 이등병의 느낌이다.
“제 와이프와 함께 지내기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부…… 불편하기는!”
심지어 말도 더듬는다.
어제, 내가 길들이기를 할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는데.
“신주아! 대공자님, 잘 모시고 있었던 거 맞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자님?”
“네, 그렇습니, 그, 그렇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
신주아와는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놨기에, 사람을 하루 만에 얼간이로 만들어 놓는 것인지.
그건 그렇고, 이제는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세상은 어두워져 가고, 저택 내에서 경계 중인 용병들의 긴장감은 어제와는 사뭇 달라졌다.
“긴장되시겠지만, 대공자님은 안심하세요. 별채 주변의 경계는 완벽하니까.”
“두렵지 않다! 마인 놈들 따위를 겁냈다면, 진즉 저택에서 몸을 피했었겠지!”
물론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오히려 저택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신주아, 혹시라도 별채 내에 위급 상황이 생기면 소리를 질러.”
“알겠습니다.”
사실, 신주아의 비명 소리는 상상이 잘 되진 않는다.
어쨌든 이제 모든 준비는 완료된 상태.
마인들은 예고한 대로 오늘밤 갈라크의 저택을 습격할 것이며, 그들의 최우선 척결 대상은 이 가문의 적장자인 아민 갈라크일 것이다.
* * *
상공 1킬로미터의 높이. 나는 이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마인들의 습격을 기다렸다.
어느 루트를 통해 녀석들이 이동해 오는지가 궁금했기 때문.
마인들의 본거지로 예상되는 마왕성은 아직도 그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데 사실 이 부분은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마왕성이 지근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면 습격을 위한 이동 거리가 상당할 텐데, 지금까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뭔가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이상해.’
비록 어두운 밤이지만, 이 높은 상공에서 내 절대 감각으로도 아직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건 내 예상 밖의 일이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동을 하고 있기에.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다.
분명 마인들은 오늘밤 갈라크의 저택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때였다.
저 멀리 어두컴컴한 숲속에 갑자기 생겨난 푸르스름한 빛.
깜빡깜빡거리며 허공에 불꽃을 뱉어 내는 이 영롱한 빛의 군집은 점점 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 모습은 탑에서 자주 보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
‘포털!’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까지의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이동 방식은 다름 아닌 포털.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었다.
31층의 메인 테마는 마왕과 마인일 터, 저 포털이 만약 마왕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이는 상당히 값진 정보일 것이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나는 테이아의 날개로 상공을 비행하며 포털이 생성된 숲으로 접근하여 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마인들이 내뿜는 에테르의 기운이 정신을 어지럽힌다.
‘상당한 규모군!’
마인들의 규모는 어림잡아 대략 이백. 숫자만 놓고 본다면, 저택에 주둔 중인 용병들과 비슷한 정도다.
문제는 마인으로 끝이 아니란 것이다.
포털이 뿜어낸 것은 마인 외에 까다로운 몬스터 종들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일단 저택이 쑥대밭이 된다는 건 기정사실이 된 것 같다.
‘놈들 중에 리더는…….’
퀘스트의 달성 조건은 리더를 죽이는 것.
녀석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누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지는 분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저놈이군.’
대가리 둘 달린 늑대형 몬스터를 타고 있으며, 양손에는 검을 든 녀석.
31층 초반부에 와이번을 타고 있던 그놈보다는 확실히 격이 떨어져 보이긴 한다.
마인들은 지체 없이 갈라크의 저택 방향으로 이동해 나갔다.
내가 숲속으로 내려온 것은 그들이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진 이후.
파바바밧-
여전히 포털은 열려 있지만, 스파크를 발산하는 기운이 확연히 줄어들며 소멸 직전의 모습이었다.
내가 포털 안쪽으로 발 하나를 걸치자 메시지가 펼쳐진다.
[마왕성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내가 원하던 바로 그 문구.
이제는 나도 갈라크의 저택으로 향해야겠다.
이제 곧 전투가 한바탕 펼쳐질 테니까.
* * *
“야! 신참! 너 뒤질래?”
이제 막 마인들의 습격으로 교전이 시작된 모습.
A급 용병 반스는 복귀한 나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포털을 확인하고 오느라,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운 시간이 너무 길어졌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부대장님. 갑자기 배가 아파서.”
“뭐? 배가 아파? 도망치려다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이런 의심도 무리는 아니다.
신입 용병들 중엔 계약금만 받고 먹튀 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개자식! 전투가 끝나고 나면 단단히 문책을 할 줄 알아!”
“넵!”
“일단 자리로 돌아가 임무 수행해!”
그래도 많이 늦진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으며, 겨우 탐색전 정도만 시작한 형국이다.
내가 배치된 곳은 아민이 머무는 별채 주변.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저택의 입구 쪽인데, 몬스터들의 흉포한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앙!!
탑에서 종종 상대해 본 흑혈랑들이다.
저놈들은 머지않아 별채 쪽으로도 들이닥칠 것이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흑혈랑의 개체 수가 어마어마했으니까.
‘캥수가 참 좋아하긴 할 텐데.’
전투에 잔뜩 굶주려 있는 데다가 새롭게 얻은 스킬을 사용할 좋은 기회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용병들의 눈에는 캥수나 몬스터나 별 다를 바가 없기에.
“저기!!”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곧바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성난 이빨의 흑혈랑 떼였다.
입구컷을 하기엔 엄청난 물량빨이긴 한데, 그럼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이곳까지 당도했다.
하긴, 마인들의 조련을 받고 있으니 야생의 몬스터들보다는 훨씬 더 일사불란할 것이다.
우리 구역의 지휘를 맡고 있는 반스가 외친다.
“일단 자리 지켜!”
성급히 달려들지 말고 맡은 자리에서 상대를 하란 것인데, 이건 흑혈랑의 습성을 몰라서 내린 판단.
이 성난 늑대 떼들의 기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야! 신참! 내 말 안 들려?”
부대장 반스가 나 때문에 여러 번 버럭을 한다.
아직은 사리 분별 못 하는 E급 용병으로 보이겠지만, 잠시 후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굳이 힘을 숨길 마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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