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감각의 주먹.
표지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걸 보니,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찾지 않은 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마법 아카데미의 도서관에 이런 종류의 서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내가 첫 번째 독자일지도 모르겠군.’
왕실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대부분 지체 높은 가문의 귀하신 자제들. 이런 야만적인 서적을 읽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나는 빠르게 책을 탐독해 나갔다.
30층에서 나의 초기 호감도는 72.
지식의 습득 속도나 탐구력, 직관력, 이해도 등이 어느 정도는 뛰어나리라 예상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있었다.
‘미쳤다!’
그냥 뛰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탁월하다 혹은 천재적이다 등의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금 내 두뇌가 받고 있는 버프는 그냥 미친 수준이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은 내 머릿속에서 선명한 이미지로 구현되고 있다.
마치 고성능의 양자 컴퓨터가 내 두뇌에 심어진 느낌?
당연히 책의 모든 내용들이 실시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호감도가 고작 72인데?’
99를 찍은 채이설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마법 수업을 들을 때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이다.
그때는 마법의 이론적 난해함에 살짝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으니까.
나는 아주 빠르게 감각의 주먹을 완독할 수 있었다.
관건은 내가 깨달은 심득이 캥수에게 얼마나 전달되었냐는 것.
그리고 책으로 배운 주먹질이 실제로 구현되는 데 어느 정도 유효하냐는 것.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나는 바로 도서관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으슥한 장소를 찾아가 바로 캥수를 소환했다.
“캥!”
이 녀석은 제 주인이 자신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할까?
어쨌든 녀석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 마냥 신난 모습이다.
“캥수야, 예전이랑 비교했을 때 뭐 달라진 거 없어?”
“캥?”
“못 느끼고 있구나.”
아니면 효과가 전혀 없거나.
캥수의 표정만 놓고 보면 완전 뜬금없다는 반응.
어쩌면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뭐든지 책으로 배우는 것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기왕 소환해 낸 거 확인은 해 봐야겠지.
“캥수야, 섀도 복싱 좀 해 보자.”
마음 같아서는 스파링이라도 해 주면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이론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모든 신체적 수련이 제약으로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캥!”
“눈앞에 가상의 상대를 상상해서 해 봐.”
캥수는 나와 정신적으로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 아주 훌륭한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두뇌는 거의 고성능 컴퓨터 수준이니까.
“캥!”
캥수는 달밤에 체조하듯 슬슬 몸을 풀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몸동작이 격렬해지기 시작한다.
휙! 휙!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실제 캥수의 펀치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상대로 아주 훌륭한 가상의 상대를 만들어 낸 모양이다.
지금 캥수가 내뻗는 주먹의 놀림, 그리고 발동작들.
어딘지 새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캥수야! 상대의 수준을 좀 더 높여 봐!”
“캥! 캥!”
캥수의 두뇌가 풀가동 되었는지, 변화는 즉시 찾아왔다.
녀석의 몸놀림은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도, 흐트러지는 기색은 없다.
오히려 영점을 잡아 가며, 모든 동작들이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진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캐애애애애앵!”
희열에 찬 캥수의 외침.
“성장했구나!”
“캥!”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 * *
졸업 이론 시험까지는 D-6.
오늘의 강의 스케줄은 오전부터 저녁까지 꽉 채워져 있었다.
이 아카데미는 졸업이 다가올수록 일정이 살인적인 게 이색적이다.
하필 우리가 30층에서 겪어야 할 시점이 아카데미의 막바지라는 것이 원통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빌어먹을 탑은 그런 모든 상황들을 고려해 미션을 설계했을 테니까.
[서브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헤이니 교수를 만족시킬 만한 발표를 하시오.]
[성공 시: 호감도 +2]
따지고 보면 부조리한 퀘스트였다.
애당초 호감도가 높아야만, 강의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발표도 할 수 있는 것.
초기 호감도가 낮은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강의를 열심히 들어도, 도서관에서 밤새 마법서를 읽어도, 빼곡하게 적어 놓은 필기 노트를 보며 자습을 해도, 다 부질 없는 일이다.
호감도의 버프를 따라잡을 수는 없으니까.
“자,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누가 대답을 해 보겠나?”
헤이니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강의실엔 침묵만이 감돈다.
도도하기 그지없는 여교수의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녀는 거의 확신하고 있다.
이 강의실의 누구도 자신의 강의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잠시 후 그녀는 이런 멘트를 날릴지도 모른다.
- 네 녀석들은 왕실 아카데미의 수치야! 이런 기본적인 마법 술식 하나 응용하지 못하면서 졸업을 하겠다고?
그런데 헤이니의 속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현 상황은 다소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이 많은 생도들 중 손을 드는 사람이 아직 아무도 없다.
분명 이 중엔 천재들도 있을 텐데 말이다.
‘30층의 군주가 플레이어에게 기회를 주려고 정신적 개입을 한 건가?’
잠시 이런 뻘 생각마저 들 정도.
나는 근처 자리에 앉은 채이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호감도는 99.
노트 필기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수업에 집중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고, 분명 헤이니 교수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호감도 72인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흠…….’
영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채이설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
방금 그녀가 낸 마음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기에, 나는 신주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감도 78.
미세하긴 하지만 나보다 높은 수치이니, 그녀 역시 발표를 할 수 있어야 이치에 맞는다.
하지만 반응이 없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확실히 이상했다.
지금 이 수업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
호감도가 72임에도 말이다.
‘왜…….’
현재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밖에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호감도가 조작되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의 호감도가 조작되어 있거나.
만약 둘 중 하나가 맞다면, 전자일 공산이 크다.
조작하는 입장에선 그게 훨씬 덜 번거로울 테니까.
잠시 동안의 고민을 끝낸 후, 나는 바로 손을 들었다.
발표를 해 볼 생각이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정답이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기에.
“방금 손든 생도, 자네는 이름이 뭐지?”
“이호영입니다.”
“발표해 보게.”
“네.”
나는 정리된 생각들을 차분하게 발표해 나갔다.
언령에 마나를 불어 넣고 각 마법 원소들에 적절한 술식을 부여하는 일. 오늘의 강의 주제는 원소 간들의 통섭이었으며, 헤이니 교수의 응용 문제는 꽤 복잡한 술식을 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크게 문제 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버프를 받고 있는 나의 지적 능력은 문제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정말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건가?’
나만 이해하는 것 같았기에, 수차례 검토를 해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발표를 하기 위해 손을 든 것.
“……이름이 이호영이라고 했나?”
“네.”
“발표는 잘 들었어. 빈틈없이 완벽한 술식이야.”
이것이 내 발표를 들은 헤이니 교수의 소감.
역시 나는 강의를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었다.
[호감도가 2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호감도: 74]
물론 제나가 경고한 바는 잘 알고 있다.
내 호감도가 너무 높으면 곤란하다는 것.
그랬기에, 그녀는 30층의 초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호감도를 깎으라고 조언도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명백히 내 호감도가 조작되어 있으니까.’
비록 상태창에는 74로 표시되어 있지만, 결코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어젯밤 단 1회독만으로 생전 처음 보는 권법 도서를 완벽히 이해했으며, 호감도 99의 채이설조차 대답하지 못하는 헤이니 교수의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냈다.
결론은 현재 내 상태가 지난 29층에서 남소현이 받은 버프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
내게 엄청난 편애와 특혜를 부여하고 있으며, 호감도를 조작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제나가 모시는 존재이자, 그동안 내게 공략집을 보내온 존재.
그리고 [지혜롭고 순결한 자]
30층의 군주.
확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호감도를 조작하며 감출 이유가 없을 테니까.
* * *
“대단해요! 역시 이호영 씨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채이설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내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마침 잘 됐다.
마지막으로 확인 좀 해 봐야겠다.
“이설 씨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요, 뭐.”
“아니에요! 오늘 이호영 씨가 발표했던 그런 발상은 꿈도 못 꿔요! 솔직히 이번 30층에선 제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헤헤.”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 실제 호감도는 99를 초과하는 상태.
그렇다면 굳이 호감도를 깎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나중에 제나를 만나게 되거든 할 말도 생겼고 말이다.
“하여간 이호영 저 잘난 척 대마왕!”
내 뒤통수를 따갑게 노려보는 것은 당연히 남소현이었다.
아카데미 생도가 되더니, 말투도 유치하게 변해 버린 모양이다.
“오늘 강의는 들을 만했냐?”
“당연하지! 누구처럼 꼭 티를 내야만 강의를 잘 들은 건 아니거든!”
“이론 시험은 자신 있고?”
“너보다는 잘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6일이면 금방인데, 쓸데없는 허세를 부린다.
공략집에 따르면 이론 시험의 결과에 따라 향후 미션의 난이도가 달라질 거라 했는데, 이 녀석 앞날이 걱정이다.
“남소현.”
“왜!”
“뛰는 게 어떨까?”
“뭐?”
“도서관 자리 말이야. 다들 자리 맡으려고 뛰고 있잖아.”
강의실은 실시간으로 휑해지는 중이다.
심지어 김세용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사라질 정도니, 30층의 분위기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됐어! 난 도서관 체질이 아니야. 공부는 기숙사에서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이 녀석. 이미 이론 시험은 포기한 모양이다.
좋은 판단이다.
호감도로 줄 세우기를 하면 남소현이 단연 꼴찌이며, 이 차이는 결코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는 나빠도 동물적인 본능은 뛰어난 녀석.
터덜터덜 걸어가는 남소현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텅 비어 버린 강의실.
나 외에도 여유를 부리며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30층의 원주민도 아닌, 플레이어.
“신주아. 너는 도서관에 안 가냐?”
“공부는 할 생각이지만, 호들갑 떨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서울대 출신의 자신감인가?”
“그게 탑에선 크게 의미 없다는 건 아실 텐데요. 어차피 이론 시험의 결과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을 거란 예감 때문입니다.”
역시 예리하다.
이 탑은 현실 세계보다 재능의 위력이 압도적인 곳.
그리고 30층 이론 시험에선 호감도가 곧 재능이다.
“그럼 예언 하나만 해 줘 봐. 내가 이론 시험에서 몇 등이나 할지.”
“거절하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싫습니다.”
역시, 만족스러운 답변.
그럼 이제 도서관에 가서 마음 놓고 캥수를 위한 작업에나 몰두해야겠다.
모름지기 천재는 시험 하루 전 벼락치기로 1등을 해 줘야 제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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