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29층을 끝내고 로비로 복귀한 플레이어는 현재로선 총 여섯.
나머지 동료들의 생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지하철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미션 진행 중]
우리에게 공개된 정보는 이 짤막한 메시지뿐이었다.
“이호영 씨, 남은 사람들도 무사히 잘 해내고 있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누구처럼 동료들 잡아먹으려는 빌런만 없다면요.”
서준호의 물음에 나는 대놓고 남소현을 가리켰다.
“야! 그거 설마 내 얘기야?”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있던 남소현은 바로 발끈했다.
이곳이 29층이었다면 바로 칼날이 날아왔을 텐데.
“응. 네 얘기야.”
“이 미친놈아! 다른 층을 상대로 빌런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내 복사판이었다고!”
“물론 알고 있어. 그래서 너한테는 다행인 일이지. 네가 직접 그랬다면, 로비에 오자마자 내가 바로 네 목을 날려 버렸을 테니까.”
“뭐? 이 개자식이!”
남소현은 씩씩거리며 흥분을 하는데 물론 그 이상의 액션은 없었다.
여기서는 더 이상 29층 군주의 버프를 받지 못하며, 내게 진지하게 덤빈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호영이 형! 저기!”
김세용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 생겨난 포털.
9층의 탑에 오르지 못하고 지하철역에 남아 미션을 진행했던 동료들도 하나둘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최정혁, 오민아 부부를 시작으로 이문학, 이문성 형제, 조병국, 고용우가 차례로 로비로 돌아왔다.
“전원 생존이군요!”
우리 구역의 쾌거는 계속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번 29층에선 나의 하드 캐리가 거의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하철역에 남은 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군.’
그곳엔 살성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72시간 후에 30층이 시작됩니다.]
간만에 긴 자유 시간이 부여되었다.
물론 이 자유를 마냥 만끽할 간 큰 플레이어는 없다.
이 탑은 나태한 플레이어에게는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캥!”
나는 곧바로 캥수를 소환하여 수련을 시작했다.
잠시 검술은 쉴 생각이다.
30층이 시작되기 전까지 내가 주력할 부분은 캥수를 키우는 것.
“캥수야. 이번에는 내가 직접 너의 스파링 상대가 될 거야.”
“캥?”
“왜? 나보다는 세용이가 더 재밌어서?”
“캥!”
“짜식이 쓸데없이 솔직하네. 그래도 당분간은 어쩔 수 없어.”
캥수가 나보다 김세용을 선호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랑은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이유도 있지만, 나의 복싱 스텝은 기본적으로 무림의 보법을 베이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캥수의 인식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나기에 녀석이 나를 통해 보고 배울 것이 많지 않다.
나와 싸워 보는 게 좋은 실전 경험은 될지언정, 교보재로써는 가치가 거의 없는 셈.
실제로 캥수는 김세용과 스파링을 할 때 가장 실력이 많이 늘곤 했다.
“나도 좀 어색하긴 하겠지만, 복싱 스타일로 상대해 줄게. 그럼 됐지?”
“캥!”
이것은 캥수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투자였다.
펫이 주인과 실력 차가 너무 벌어져 버리면 전투 시 활용도가 너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되면 조련사라는 겸업의 이점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마침 제나는 내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펫은 주인과 정신적으로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 내가 직접 주먹질을 수련하면 된다는 것.
‘생각처럼 잘될지는 모르겠네.’
내게는 관련 직업도, 스킬도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진행된 72시간의 실험.
아쉽게도 놀라운 발견도, 대단한 발전도 없었다.
그저 캥수에게 실전 경험만을 남겼을 뿐이다.
“캥!”
물론 캥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지만.
[30층이 시작됩니다.]
캥수를 키우는 것.
이 미해결 과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다.
* * *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30층 군주의 이명은 ‘지혜롭고 순결한 자’입니다.]
‘뭔가 좀 색다른데?’
탑을 지배하는 군주라고 하기엔 수식언이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혜와 순결은 모두 좋은 말들이다.
이 빌어먹을 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30층의 배경은 어느 차원에 존재하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이며, 지금부터 플레이어들은 이곳에서 생도로서 미션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들은 모두 고풍스러운 제복을 착용하고 있다.
장소는 강의실.
교단 위엔 까칠한 인상의 여교수가 강의를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서 공략집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이며, 30층의 미션은 두 파트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이론 시험입니다. 모든 생도들은 지금부터 일주일 뒤, 왕실 아카데미에서 시행되는 졸업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말 그대로 진짜 이론 시험이며, 플레이어들은 직접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단, 이 기간 중 모든 신체 수련 행위는 금지됩니다.]
충격적인 이야기다.
탑에서 진짜로 공부를 해야 한다니.
그것도 무려 일주일간이나.
[30층의 군주는 지혜를 숭상하는 군주이며, 이론 시험의 성적에 따라 추후 미션의 난이도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지금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공략집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당혹스러운데, 간략한 메시지창만 있었을 동료들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감도: 72]
이제 겨우 세 번째 군주일 뿐이지만, 초기 호감도가 이렇게 높은 건 처음이다.
공략집에 따르면, 초기 호감도의 결정 메커니즘은 두 가지.
두뇌가 명석할수록 혹은 성(性)에 대해 무지할수록 높아진다고 하였다.
군주의 이명이 ‘지혜롭고 순결한 자’이니까.
하지만 군주들도 감정이 있는 존재들이니, 호감도 결정에는 주관적인 요소도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 김세용이 압도적인 버프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높다.’
차원의 틈새에서 제나는 내 초기 호감도가 높을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준 적이 있다.
그러면서 녀석은 키득거리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기도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뭔가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나는 현자의 상태창을 통해 사람들의 초기 호감도를 서둘러 체크해 보았다.
생각보다 다들 높다. 당연히 마이너스일 줄 알았던 김세용의 수치가 무려 +34일 정도로.
‘이 녀석. 순결한 놈이었군.’
사회에 있었을 적 썰만 들어 봐서는 온갖 유흥은 다하고 다녔을 줄 알았는데.
두뇌가 명석하다는 반전은 없을 테고 말이다.
[초기 호감도는 이론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에 영향을 줍니다.]
이 시점에서 고민이 찾아왔다.
이렇게 높은 호감도를 유지하는 것은 내게 공략집을 보내는 존재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이라 하였으니까.
* * *
“호영이 형! 나 아무래도 천잰가 봐!”
강의가 끝나자마자 김세용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왜? 처음 듣는 내용인데도, 이해가 잘 되냐?”
“어!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어렸을 적에 머리 좋다는 얘기는 꽤 듣고 살았거든! 크크크. 난해할 거라 생각했던 마법 이론도 별거 아니네.”
이것이 호감도 34가 주는 버프의 위력일 터.
사실, 호감도 72인 나의 강의 이해도는 김세용 녀석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마법 스킬들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만약 내 직업이 검투사가 아닌 마법사였다면 이번 30층의 무대는 내 개인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설 씨는 오늘 수업 내용 어땠어요?”
“저요? 신기하게도 그냥저냥 들을 만했어요. 호영 씨는요?”
“저도 뭐 그냥저냥.”
채이설은 싱글싱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현재 그녀의 호감도는 99.
힐러인 그녀에게 이곳 마법 아카데미의 강의 내용은 큰 영감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채이설에겐 이번 29층을 발판으로 큰 성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영 씨, 제가 노트 필기한 거 빌려 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이론 시험에서 너무 높은 성적을 받아 버리면 곤란하다.
지금도 호감도는 충분히 높은 상태이니까.
“와! 혹시 전부 다 이해하신 건가요? 호영 씨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노트 필기한 건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마세요. 이유는 묻지 말고.”
“네!”
이론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 간의 상대적 순위.
경쟁 상황에서 채이설은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남소현, 너는 수업 듣느라 고생 많았겠다.”
“뭐? 그 말은 무슨 뜻이지?”
“네 직업이 검투사이다 보니까, 마법 이론 수업이 지루했을 거란 이야기야.”
남소현의 호감도는 -48.
당연히 이해는 거의 못했을 테고, 졸지 않고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건 이호영 너도 다를 바 없잖아! 그래도 난 오늘 수업 어느 정도 이해는 했어!”
“정말?”
“왜? 넌 아닌가 보지?”
“어. 나는 이해 안 가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던데.”
“멍청한 놈. 그럴 줄 알았어!”
남소현 이 녀석.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여정을 할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29층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다들 서둘러 도서관으로 갑시다! 시험 기간이라 자리를 맡지 못할 지도 몰라요!”
서준호가 모범생 포스를 뽐내며 말했다.
하지만 호감도는 28.
안타깝게도 30층에서는 김세용보다도 공부를 못 할 공산이 있다.
“네. 다들 일단 가 보죠.”
도서관으로 향하면서도 사실 고민은 됐다.
내 72의 호감도로 공부를 한다면 이론 시험에서는 분명 좋은 성적을 받겠지만, 현재 나의 목표는 호감도를 50 아래로 낮추는 것이니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 * *
자리를 맡으려면,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뛰었어야 했다.
자습을 할 수 있는 책상 자리들은 모두 이미 주인이 있는 상황이었고, 몇몇 책장 근처도 생도들로 북적거렸다.
아마도 인기 있는 마법서들이 꽂혀 있는 책장일 것이다.
학구열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생도들이 지금 은은하게 내뿜고 있는 마나의 기운.
‘다들 수준이 상당하네.’
강의실에서도 느꼈던 바지만, 30층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기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일단 마나 자체가 우리 탑 출신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우리 탑에서 꽤 수준 높은 마법사인 이문학, 이문성 형제도 이곳에선 평범한 수준일 것이다.
“젠장! 호영이 형, 자리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공부를 해야 해?”
김세용의 큰 목소리에 순간, 많은 눈동자들이 우리를 향한다.
민망함은 나의 몫. 나는 바로 녀석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 도서관 처음 오냐?
“어떻게 알았어?”
- 나 따라오지 말고, 공부는 각자 하자.
“혀, 형!”
그렇게 김세용을 뒤로한 채, 일단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으로 이동했다.
인파에서 멀어질수록 공기의 쾌적함이 달라진다.
물론 한적한 곳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법서 외에도 진짜 많긴 하네.’
마법 아카데미이지만, 왕실 도서관답게 이곳에는 수많은 카테고리의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마법 섹션이 아닌 이곳은 평소에도 소외받는 장소이겠지만, 시험 기간인 지금은 더더욱 생도들이 올 이유가 없는 곳. 난 여기에서 찾고 싶은 책이 있다.
캥수를 위한, 결과적으로는 나에게도 도움이 될 그런 책.
주인과 펫은 정신적으로도 깊게 연결되어 있는 사이라고 하니, 나의 독서가 캥수에게도 깨달음을 줄지 모른다.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실험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어차피 난 일주일 뒤에 있을 이론 시험에 죽자 사자 매달릴 생각이 아니니까.
‘찾았다!’
가장 끌리는 제목으로 하나 골라 봤다.
감각의 주먹.
부디 캥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길 바라며.
- 20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