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나의 텔레파시 스킬에 등록되어 있는 플레이어는 총 다섯 명.
그중 세 명이 현재 9층의 탑에 머물고 있다.
김세용, 채이설, 서준호.
나는 곧바로 셋 모두에게 텔레파시를 전송하였다.
이 중에 최소 한 명은 지금 정상 회담에 참여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 이호영입니다. 저는 지금 잘 살아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소속된 9층에서는 아무도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지금쯤 그곳 분위기는 뒤집어져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우리가 공격한 7층은 그리 부각되는 장소가 아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을 터.
일단, 내 동료들에게 나의 안부를 전하였다. 그리고.
- 9층에서 아무도 회담에 참여하지 않은 건 제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나는 이 세 명에게 현재 실험 중인 결과를 그대로 전했다.
정상 회담에 보이콧을 해 버리자 호감도가 +20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들도 나의 실험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지금 만약 회담장에 있다면, 남소현을 제외한 다른 층 사람들에게도 은밀하게 알리세요. 참고로 저는 다음 회담에도 불참할 예정입니다.
물론 호감도 +20의 결과는 단발성으로 그칠 가능성도 있다.
다음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기에, 이 부분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만약 모두가 나의 뜻에 따라 준다면…….’
다음 정상회담엔 남소현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이다.
그녀 혼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캥!”
“어? 캥수야 미안. 많이 기다렸지?”
그러고 보니 스파링을 하자고 소환해 놓고선, 캥수랑은 제대로 놀아 주지도 못했다.
“캥!”
“괜찮다고?”
캥수는 내 손등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온갖 아양을 떤다.
사실 캥수가 3회차 전쟁에선 수고가 많았다.
나와 함께 병사들을 수호하느라 이곳저곳을 불나게 뛰어다녔으니까.
덕분에 캥수도 레벨이 많이 오르긴 했다.
‘내가 캥수한테 권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네.’
스파링까지는 해 줄 수 있지만 내가 스킬을 가르칠 순 없다.
캥수에게 제대로 된 필살기 하나만 있었어도,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상대도 안 됐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쉬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다음에 제나를 만나면 방법이 없는지 한번 물어나 봐야겠다.’
캥수와의 스파링이 끝날 무렵, 신창훈은 내가 있는 산 정상으로 올라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
이번에는 무슨 말로 날 놀라게 할지.
“이호영, 지금 막 과자를 배부하고 왔어.”
“수고했어. 어때? 반응은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그럼?”
“몇 명은 과자를 받으면서 감격의 눈물도 흘렸어.”
“야,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사람들이 울기까지 해.”
“별로 어렵지 않아. 너는 이미 충분한 권능을 눈앞에서 직접 보여 줬잖아.”
“그래서 날 신격화하기가 쉬웠다?”
“어. 다들 너를 구원자로 여기고 있어. 아포칼립스의 현실에서 세상을 구할 슈퍼 히어로!”
“보나마나 네가 MSG를 팍팍 친 거네.”
“그게 잘못된 건가?”
“아니.”
이 녀석은 종말이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거물이 되었을 놈이다.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전쟁 4회차가 시작됩니다.]
이미 호감도가 상당히 올랐다.
초기 수치가 너무 낮았던 터라 여전히 마이너스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번 4회차만 잘 마무리한다면 나도 플러스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5층으로 이동합니다.]
5층의 복사판을 만나게 되면 애도를 표할 생각이다.
지금쯤 원판은 1층에서 남소현을 만나고 있을 테니까.
[호감도: -6]
[허용된 PK: 44명]
호감도가 0에 근접하게 되니 제약이 대폭 줄어들었다.
‘뭔가 잔인한 운명이군.’
애도를 표하자마자 학살을 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 * *
“역시 너는 우리의 구원자였어!”
6층 원정이 끝나자마자 신창훈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럴 만도 했다.
사망자 0명.
심지어 중상 이상의 부상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말했듯이 이번에 과자는 없어. 민심 수습하는 데 괜찮겠어?”
“눈에 보이는 보상을 좋아하니, 다른 거라도 가져갈 생각이야.”
“어떤 걸?”
“이 나뭇가지.”
“그게 뭔데?”
“네가 4회차 전쟁 전, 나에게 작전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지휘봉. 어쩌면 전설급 아이템과 동급 취급을 받을지도 몰라. 4회차 전쟁은 전설 그 자체였으니까.”
“미친 놈.”
“지금 병사들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지? 네가 전쟁 중에 똥을 싸도 박수를 칠 사람들이라고!”
다들 미쳤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선동을 당할 수 있는 존재라니.
이들이 쓰는 골드와 호환만 된다면, 벗겨 먹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병사들한테 가 봐. 이번 승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치하해 주도록 하고.”
“어. 그건 내 전문이지.”
이번 4회차 전쟁의 성과는 사망자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29층에서 내 호감도가 플러스 상태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호감도: 5]
[군주의 가호를 받으며, 미세한 버프가 적용 중입니다.]
꽤 만족스러운 결과.
여기에 호감도가 한 번 더 점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정상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회담장으로 향하는 포털이 서서히 닫혀 간다.
과연 몇 명이나 내 뜻에 동참해 줄지 궁금할 뿐이다.
[호감도가 15 증가하였습니다.]
[버프의 효과가 두 겹 덧씌워 집니다.]
처음 보이콧 때처럼 +20의 효과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상당히 괜찮은 결과다.
어차피 나는 +50 이상의 호감도를 얻으면 곤란해지는 처지.
상황이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는 즉시 동료들에게 현재의 결과를 텔레파시를 통해 전송했다.
* * *
정상회담장.
그곳엔 남소현만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내가 와 있는 줄도 모르고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중이다.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은 총 네 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현재 네 곳이 생존 중이군.’
남소현의 1층과 나의 9층을 제외하면, 역시 가능성 높은 곳은 7층과 8층이다.
동료들이 나의 지시에 따라 아주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덧 전쟁은 마지막 8회차를 앞두고 있는 상황.
웬만하면 마지막까지도 회담에 불참하려 했는데, 호감도 조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
[호감도가 20 하락하였습니다.]
[호감도: 27]
호감도가 상당히 가파른 각도로 내려와 버렸다.
괘씸죄가 적용된 모양인데, 그래도 호감도가 플러스 상태라는 것은 천만다행인 일이다.
“어? 뭐냐. 넌?”
남소현은 이제야 내가 와 있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내가 이호영이라는 것까지는 모른다.
현재는 인피면구를 착용 중이니까.
“그러는 넌 누구?”
“개자식아, 내가 먼저 물었잖아!”
역시 남소현. 초면에도 거침이 없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30분 동안 잘 쉬다 갈 생각이다.
“야! 귓구멍에 뭘 처박은 거야! 너 정체가 뭐냐고! 보아하니 전쟁 중인 플레이어는 아닌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2층부터 9층까지 모조리 전멸한 상황이니까.”
역시 남소현은 회담의 불참을 전멸로 간주하고 있다.
커피잔 개수로 의심 정도는 해 봤어야지. 이 단순한 녀석.
“눈치 빠른 아가씨로군. 그래. 네 말대로 난 플레이어가 아니야.”
“그럼 넌 뭐지?”
“어떤 높으신 분의 대리인.”
나는 다시 커피 한 모금을 홀짝 들이키며 말을 이어 갔다.
“반갑다. 살성 남소현.”
사실 이러려고 회담장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날 알고 있어? 심지어 내가 살성인 것까지?”
“말했잖아. 난 어떤 높은 분을 모시고 있다고. 그분께선 탑의 모든 일을 굽어보고 계시지.”
“서…… 설마, 이 탑의 관리자?”
“거기까지는 말해 줄 수 없어.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너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기 위해서야.”
경고라는 말에 남소현의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모시는 그분께선 품격을 아주 중요시하셔. 그런데 남소현 너는 살성이라는 탑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품의 유지가 엉망이야. 그분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로.”
“내가 뭘 어쨌다고!”
“지금 그 눈빛만 봐도 그래. 눈에 힘 좀 빼지 않을래?”
남소현의 동공이 다시 또 흔들리더니 눈빛이 단번에 순해진다.
“좋아. 항상 이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 그리고 말투도 마찬가지야. 그분께선 너의 상스러운 말투를 상당히 싫어하시거든.”
“내…… 내 말투가 뭘…….”
“그분께선 너에게 페널티를 내리기로 결정하셨다. 원래는 살성의 지위를 박탈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아량을 베풀기로 하셨으니 감사하게 생각해.”
“갑자기 페널티라니. 너무 당혹스럽잖아.”
이 정도면 상당히 고분고분한 말투.
기대 이상의 효과다.
“34층까지 살인 금지. 이게 그분께서 네게 내린 페널티야.”
“무슨 미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살인을 금지시키면…….”
“거기까진 나한테 따져도 소용없어. 아무튼 나는 그분의 뜻을 전달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어.”
이 타이밍에 뿅 하고 사라지면 정말 극적인 연출이 될 텐데, 아쉽게도 그럴 수 없으니 나는 말 없이 커피만 들이켤 뿐이었다.
‘정말로 믿으려나?’
이런 황당한 거짓말을 믿으면 바보.
하지만 남소현이라면 또 모른다.
진짜 단순한 녀석이니까.
* * *
[이제 곧 8회차 전쟁이 시작됩니다.]
최후의 전쟁.
가장 중요한 1층 원정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상회담에 참가를 하는 바람에 호감도가 내려온 것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버프는 적용 중이다.
“신창훈, 다시 한번 병사들 각오를 단단히 다져 놔.”
“어, 이미 다들 이번 전쟁을 성전(聖戰) 수준으로 대하고 있어. 그래도 한 번 더 정신 교육은 시켜 놓을게.”
“아이템은 풀세팅 상태인지 다시 한번 점점하고.”
“이미 했지만 더블 체크 할게.”
최종 보스 남소현을 만나기 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는 다 해 놓았다.
7층과 8층의 플레이어들도 성공적으로 공략을 마친 듯하니, 우리 9층이 실패할 이유는 전혀 없다.
[1층으로 이동합니다.]
마지막 무대의 배경은 울창한 숲속 길.
커다란 나무를 방패 삼아 곳곳에 은신 중인 1층의 플레이어들이 내 절대 시각의 안에 들어온다.
나는 홍염의 불도깨비를 꺼냈다.
항상 그랬듯이 선빵은 무조건 총이다.
‘연사에 곡사까지 추가해야겠군.’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울창한 숲은 총성으로 가득 메워진다.
거침없이 날아가는 마력탄은 현란한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어김없이 적들의 몸통에 박혀 들어갔다.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한다.
호감도가 플러스 상태가 된 이후 더 이상의 제약은 없다.
‘가자. 남소현 잡으러.’
총성이 멈추자, 이번에는 더 큰 함성이 숲 전체에 울려 퍼진다.
충천하는 사기가 29층의 군주를 감동시켰는지, 우리 병력 전체에 버프 한 겹이 덧씌워진다.
이젠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쟁이 되어 버렸다.
- 20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