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정상회담장에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최대의 이슈는 역시 남소현의 거주지인 1층.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1층으로 원정을 떠난 2층과 3층이 모두 전멸했으니, 다음 차례인 4층 대표는 거의 멘붕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남소현을 붙잡고 애걸복걸하고 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만 좀 징징대라!”
사실, 남소현에게 애써 봐야 소용이 없다.
1층에서 방어전은 펼치는 것은 남소현이 아닌 그녀의 복사판이니까.
4층 대표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정상회담장에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것이다.
‘제대로 즐기고 있군.’
남소현은 자신에게 쏠린 관심에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이번 29층은 피의 날 이후 그녀의 살성적인 면모가 오랜만에 돋보이는 스테이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남소현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곳 9층의 탑에서 플레이어인 동시에 최종 보스의 포지션이다.
따라서 남소현이 없는 9층의 탑을 상상해 본다면…… 모든 플레이어들이 타 층의 복사판을 성공적으로 공략하며, 매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는 그런 그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아마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도 든다.
‘남소현이 없는 탑이라고 정말 쉽기만 할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 의문에 긍정의 답을 하기는 어려워진다.
탑은 절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니까.
남소현이 없었더라도, 여기 9층의 탑은 아주 지랄 맞은 곳이었을 공산이 크다.
우리가 모르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남소현이 없는 이곳의 난이도를 보정해 놓을 것이다.
‘그게 뭘까?’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신주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물었다.
“해답을 찾고 계십니까?”
“어.”
“항상 당신은 강박에 빠져 계신 것 같습니다. 모든 걸 짊어지려는 혼자만의 책임 의식 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1층에서 죽을 것 같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 확실히 남소현 저 녀석은 여기 29층에서만큼은 꽤 강해 보이거든.”
“그런데 남소현이 아니었다면, 이 9층의 탑 최대 난코스는 9층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있는 9층?”
“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남소현이 2층, 3층을 차례로 전멸시킨 까닭에 9층에서는 두 번 연속으로 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 그렇게 말했었지.”
“남소현이 없었더라면, 9층에서도 계속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당신의 복사판은 점점 더 완전한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럼 후반부에 가서는 9층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지옥 아니겠습니까? 특히 제가 있는 8층은 최악의 상황일 테고 말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한 이야기다.
마치 내 마음이 들켜 버린 듯한 기분.
신주아는 절묘하게 내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곳 9층의 탑에 나와 남소현, 둘 다 없었더라면?”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탑은 어떻게 해서든 판을 짰을 테니까요.”
신주아의 말에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탑이라면 왠지 그랬을 것 같은 느낌.
“결국 이렇게 설계된 판을 뒤집을 방법은 없을 거란 의미야?”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저는 남소현이 최종 보스로 존재하는 현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최종 보스였다면 저로서는 정말로 답이 안 나왔을 겁니다.”
신주아는 꽤나 담담하게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도 1층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진 못한다.
다만 우리는 후반부에 1층과 전쟁을 벌이게 되니, 다른 층과 비교한다면 준비할 시간이 그나마 더 있다는 것.
물론 전쟁 회차가 거듭되면서 잃게 되는 병력도 있지만 말이다.
‘병력 손실을 얼마나 최소화하느냐도 관건이겠군.’
우리 9층의 병력은 점점 정예화되고 있으니, 3회차 전쟁부터는 내가 가장 전면에 서서 병사들을 보호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회담장에 비치된 과자들을 인벤토리에 챙겼다.
신창훈의 말에 따르면, 다들 이 과자를 나의 은총이라 여긴다고 하니 최대한 많이 가져갈 생각이다.
“신주아, 너는 과자 안 좋아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뭘 맛있게 먹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아 참. 술은 예외다. 어쨌든 과자 안 좋아하면, 네 자리에 있는 거 나 좀 줘 봐.”
신주아는 본인 몫으로 비치된 과자들을 건네며 말했다.
“저도 좋아하지만, 필요하신 거 같으니 드립니다. 나중에 더 좋은 걸로 갚으십시오.”
“어. 고마워.”
역시 눈치 하나는 엄청 빠르다.
협상 없이 화끈하게 건네는 것은 더 마음에 들고.
신주아 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탑 출신은 남소현과 채이설.
남소현한테는 달라고 해 봤자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울 테고, 나는 채이설에게 물었다.
“과자 좋아하세요?”
사실 그녀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데, 가벼운 눈인사만 건넬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드릴게요.”
채이설은 내게 과자들과 함께 쪽지 한 장을 건넨다.
- 그동안 고마웠어요.
메모지에다가 뭐를 적나 싶었는데, 뜬금없이 고맙다니.
나는 텔레파시로 그녀에게 답했다.
- 지금은 제가 할 말이잖아요.
그녀는 다시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번엔 좀 길다.
- 제가 이번에 회담장에 나온 건 이호영 씨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어서였어요. 서준호 씨에게 들었어요. 이번 1층은 아주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걸요.
- 쉽지는 않겠지만, 이설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서준호 씨도 있기도 하고요. 이렇게 무겁게 분위기 잡을 필요는 없어요.
-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꼭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었어요.
- 저 역시 항상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 과자도 고맙고요.
- 참 신기한 탑인 거 같아요.
- 뭐가요?
- 전쟁 중인데 이렇게 매번 회담 자리도 마련해 주고, 이것도 나름 배려라면 배려잖아요.
이런 걸 배려라니.
채이설다운 착한 발상이다.
이런 채이설이 지난 2회차 전쟁에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걸 생각하니, 소름이 밀려왔다.
“야! 너희 둘! 지금 뭐 하는 거냐? 혹시 연애질이라도 하는 거야?
남소현은 내게 쪽지를 건네는 채이설을 발견하고는 버럭 짜증을 냈고, 그 순간 정상회담은 종료되었다.
[제한 시간 30분이 경과하였습니다.]
* * *
‘배려라…….’
채이설이 한 말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탑과는 절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번 29층의 군주는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하는 이 잔혹한 녀석이 우리를 배려해 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 채이설이 한 말에 귓가에 계속 맴돈다.
배려.
물론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너무 너무 이상했다.
전쟁광인 이 녀석이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회담 자리를 마련해 주다니.
회담은 보통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여는 것.
실제로 우리는 이 회담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며 이 전쟁의 장을 무사히 넘길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29층의 군주가 좋아할 만한 그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설마!’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이 든다.
나의 망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다.
물론, 일단은 곧 다가올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창훈!”
“어. 회담은 잘 다녀왔어? 별 얘기는 없었고?”
“특별한 건 없었어. 그냥 병사들한테 한 가지만 공지해.”
“뭘?”
“3회차 전쟁이 끝나고 내가 특별히 대량의 과자를 하사하겠다고 말이야. 받고 싶으면 반드시 살아남으라고 전해.”
“물론 이런 멘트는 닭살 돋게 연출하는 것이 좋겠지?”
“그래. 그런 게 네 전공이잖아.”
“어. 맡겨 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매번 내가 지시하는 것 이상으로 수행해 내다니.
이제 곧 있을 3회차 전쟁의 상대는 6층.
우리 탑 출신의 플레이어가 없으니, 지난 7, 8층과 비교한다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곳에서의 목표는 우리 측의 사망자를 한 자릿수로 막는 것.
관건은 내게 허용된 PK의 수다.
내가 마음껏 PK를 할 수만 있다면, 내 목표는 쉽게 달성될 수 있겠지만 그놈의 호감도가 문제.
[전쟁 3회차가 시작됩니다.]
[6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듣던 대로 6층의 배경은 혹한의 빙하 지대였다.
살을 벨 것만 같은 칼바람이 불어오자, 다들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하는 모습.
어이가 없다.
이런 곳에서까지 전쟁을 해야만 한다니.
[호감도: -35]
[허용된 PK: 10명]
두 자리 수로 늘어나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대열의 선봉에 서서, 홍염의 불도깨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아주 포악한 표정을 지으며 연사를 갈겼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더라도, 나의 병사들을 보호하며 전쟁을 치르는 것이 최우선 과제.
이미 신창훈은 이와 관련한 일장연설을 끝마친 상태였다.
다들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뒤를 따르고 있다.
* * *
“집계 끝났어?”
“사망자 수 일곱 명!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나도 놀랄 지경이야! 그리고.”
“그리고 뭐?”
“너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은 훨씬 더 깊어졌어. 병사들을 수호하는 네 모습에 다들 감명을 받은 모양이야.”
나도 사람인지라 모두를 구하지는 못했다.
“죽은 일곱에 대한 애도의 의식은 각별히 신경 써서 해 주도록 해.”
“어! 네가 우리 병사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다들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할게.”
연출이라니.
하여간 신창훈 이 녀석도 보통은 아니다.
“과자는 공정하게 지급하는 거 잊지 말고.”
“알고 있어. 이제 곧 정상회담이지? 잘 다녀오고.”
“아니, 이번엔 불참할 생각이야.”
“안 간다고? 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너한테도 다 뜻은 있겠지만, 거기서 무슨 정보가 돌지도 모르잖아. 괜찮겠어? 그러고 보니 다음 턴엔 과자도 없겠네.”
“별 정보 없을 거야.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테지 뭐.”
회담의 불참.
이것이 내가 원하는 효과를 가져다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 번의 불참으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회담장으로 향하는 포털이 내 앞에 열렸다.
여전히 신창훈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너보고 들어가라고 안 하니까 병사들한테나 가 봐.”
“어.”
물론 과자는 좀 아쉽다.
아쉬운 만큼 다른 쪽에서 소득이 있길 바랄 뿐이다.
“캥수야.”
“캥!”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30분 동안, 캥수랑 스파링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야겠다.
마냥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초조하기만 하니까.
“캥! 캥!”
캥수는 마냥 신났고, 그렇게 스파링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였다.
[호감도가 +20 상승하였습니다.]
“캥수야! 잠깐!”
“캥?”
내가 이럴 줄 알았다.
29층의 군주,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
회담을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라 치고, 이렇게 유치한 장치를 마련해 놓다니.
‘머지않아 마이너스 호감도 상태에서 벗어날지도 모르겠군.’
29층에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버프 효과.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199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