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기다란 원목 테이블. 그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 여덟 개와 다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여덟 명의 사람들.
모두 각 층을 대표해서 이 회담 자리에 나온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런데 왜 여덟 명이지?
분명 탑은 아홉 층으로 되어 있는데.
[회담 시간은 30분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자유롭게 나눌 수 있습니다.]
[단, 이곳에서는 어떤 식의 무력 충돌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상했던 얼굴들이 자리에 있었다.
1층의 남소현, 7층의 서준호, 8층의 김세용까지.
무려 여덟 명 중에 네 명이나 탑 출신들이다.
“야, 이호영! 너 뭐냐?”
대뜸 적막을 깬 것은 남소현이었다.
모르는 네 명은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만나자마자 뭐냐는 건 또 뭐야?”
“너, 갑자기 실력이 쓰레기 됐잖아!”
무슨 얘긴가 했다.
나의 복사판이 남소현에게 발릴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
그런데 이 반응을 보니 예상보다 더 심하게 발린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쓰레기였길래?”
“검술이 진짜 못 봐줄 수준이었어. 그런데 너 일부러 그런 거였냐?”
역시, 내가 얻은 심득까지는 복사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오래전에 사부는 상태창에서 내 검술 스킬을 삭제해 버렸으니, 심득이 없다면 나는 직업만 검투사지, 삼류 무사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
“내 꼭두각시도 아닌데, 일부러 그러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건 그런데, 그 이호영 새끼는 너무 쓰레기였어! 구역질 날 만큼.”
“총은?”
“그 이호영 새끼는 총 안 쏘던데?”
“이상하군.”
“진짜 이상한 새끼긴 했어. 말하는 게 겉멋 든 건 너랑 똑같은데 실력이 진짜 쓰레기였거든. 너무 이상해서 고문을 하려고 했는데, 그 새끼가 바로 자살을 해 버리더라고.”
자살이라.
신주아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놈도 진짜 이상한 새끼다.
그런데 왜?
생각을 해 보니, 고문을 당했으면 곤란할 뻔했다.
내가 아닌 그 복사판 녀석은 나에 대한 어떤 비밀을 털어놓을지 알 수 없으니까.
‘같은 논리로 생각한다면…….’
신주아 역시 말 못 할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쨌든 다행이군요!”
갑자기 서준호가 외쳤다.
“뭐가요?”
“이호영 씨의 복사판이 총도 안 쏘고 검술도 형편없다는 거 말입니다! 이호영 씨의 복사판이 원판과 같은 실력이었다면, 여기에 남소현이 1층 대표로 못 왔을 거 아닙니까?”
“야,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설마 내가 이호영한테 죽었을 거란 소리야?”
서준호의 말에 남소현이 버럭한다.
“남소현, 흥분 좀 하지 마. 어쨌든 우리가 지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어.”
“이호영, 저거 또 나댄다. 실력도 쓰레기 다 됐으면서.”
나는 남소현의 말을 무시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1회차 전쟁에서는 대부분 공격을 맡은 쪽이 승리를 거두었고, 방어를 맡은 복사판이 이긴 건 단 1건인 거 같아. 여기 여덟 명밖에 오지 않았잖아.”
“그럼, 여기에 오지 않은 하나의 층은…….”
“전멸했겠지.”
몇 층이 전멸했을지는 대충 예상이 된다.
1층의 남소현을 공격했던 2층일 공산이 크다.
그만큼 29층에서 살성이 받는 버프는 어마어마한 것일 테니까.
“2층 대표가 안 보여!”
역시 당연한 결과다.
남소현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와! 이호영, 이 새끼는 운도 좋네! 하필 9층이라 제일 오래 살아남게 됐잖아?”
당연히 운이 아니다.
공략집을 통해 이 9층 탑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미리 알았고, 남소현을 마지막에 만나도록 판을 설계했다.
7층에 서준호와 채이설, 8층에 신주아와 김세용이 배치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이 탑에서 살성 남소현은 최종 보스인 셈.
살성을 만나기 전에 최대한 스탯을 올리고 아이템을 맞춰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2층을 제외하고는 복사판이 모두 졌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 복사가 완전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그런데 야, 김세용!”
“어, 호영이 형!”
이놈은 내가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화색이 돈다.
방금 전 죽이고 온 복사판과는 영 딴판이다.
“7층으로 공격하러 갔을 때, 서준호 씨랑 채이설 씨 어땠어? 평소의 수준과 비교해서 말이야.”
“아……. 그게…….”
“그게 뭐!”
“모르겠어! 전쟁 중에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어딨어. 그냥 닥치는 대로 싸우는 거지!”
이 자식.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일단 복사판은 완전하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중요한 전제는 하나 더 있다.
과연 전쟁의 회차가 거듭되어도 복사판의 불완전성은 그대로일지, 아니면 점점 더 완전한 형태로 변하게 될지.
신주아가 있었더라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세용아.”
“어, 형.”
“다음부터 너 말고 신주아한테 오라고 해.”
“뭐? 형!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내 자리에 있는 과자도 다 너 줄 테니까, 다음부터는 오지 마. 절대 오지 마.”
김세용은 내가 건넨 과자를 받고는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이놈이 머리는 나빠도 감투 욕심은 있어서.
“어쨌든 이번에는 온 김에 하나만 묻자. 너 평소 나한테 불만 있냐?”
“불만은 무슨! 나처럼 충실한 오른팔이 어디 있다고!”
“나 혼자 고고한 척하는 게 구역질 났다거나, 제대로 한판 붙어 보고 싶었다거나 뭐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를 하는 건데!”
너의 복사판이.
이 부분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정말로 나에 대한 불만을 쌓아 두고 사는 것이라면, 언젠간 뒤통수를 맞게 될지도 모르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지금 이놈이 내는 마음의 소리만 놓고 보면 결백한 건 확실하다.
마음으로는 진짜 억울해하고 있으니까.
“저기…… 혹시, 저희도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4층 출신의 대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넷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회담에 온 이후 쥐 죽은 듯 조용히만 있는데, 생각해 보니 우리끼리만 너무 떠들었나 보다.
이들 역시 다른 차원의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며, 지금 이 회담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을 터.
“미안해요. 편하게 얘기들 하세요.”
남소현은 나의 이런 멘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이호영, 니가 뭔데!”
사사건건 나에게 불만이 많다.
한때는 나한테 탁 달라붙어 검술도 배운 주제에.
쥐죽은 듯 조용히 있던 네 명은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한 그룹을 만들게 되었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리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한참 떠들고 있는 저 3층의 대표. 다음 회담 때에는 볼 수 있을까?
1회차 전쟁 때에는 나름 과정과 결과가 좋았던 모양인데, 저 해맑은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더 딱한 생각이 든다.
‘남소현이 황소개구리로군.’
스페셜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다들 희망을 품고 지상으로 올라왔을 텐데, 너무 안 좋은 상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에 서준호와 김세용에게 전할 메시지를 작성했다.
시기가 조금 늦을 뿐, 이들도 후반부에는 남소현의 복사판을 만나야만 한다.
그 전에 최대한 열심히 싸우면서 스탯을 올려놓고, 가능하면 골드를 아껴 놓으라는 조언을 적었다.
‘그리고 최대한 포악한 모습을 보일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체크 포인트였다.
29층 군주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호감도를 높이면 버프 적용을 받을 테니 말이다.
[30분이 경과하였습니다. 회담이 종료됩니다.]
* * *
2회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두 층 내려와서 7층.
서준호에게 미리 들었던 대로 7층의 배경은 사막이었다.
휘이이잉-
모래바람이 불어와 시야를 방해한다.
푹푹 꺼지는 모래들은 거동을 불편하게 했으며, 쨍쨍 작열하는 태양빛은 불쾌지수를 한없이 높여 주었다.
[적을 섬멸하십시오.]
2회차의 미션 역시 변함없는 멸망전.
이번에 내게 허용된 PK의 수는 일곱이었다.
호감도가 아직 -40이니 제약이 너무 크다.
‘어떻게든 호감도를 빨리 올려야 하는데.’
남소현을 만나기 전에 스탯을 1이라도 더 올리려면 최대한 PK를 많이 해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마지막 8회차까지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29층의 군주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
이놈에게 미운털이 한번 박히고 나니, 만회하기가 꽤나 어렵다.
“신창훈. 준비됐지?”
“준비됐어. 1회차 때처럼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최대한 골드 아끼는 거 잊지 말고.”
골드는 마지막 1층 전투에서 몰빵 할 생각이다.
“이번에도 네 말대로 하면 이길 수 있겠지?”
“이기는 건 문제가 아니야. 최대한 희생을 줄여야지.”
전력만 놓고 보면 7층은 지난 8층에 비해 떨어질 공산이 크다.
채이설과 서준호가 약한 것은 아니지만, 신주아와 김세용은 탑에서도 최상위권의 플레이어니까.
변수는 복사판의 힘이 1회차 때와 비교해서 어떤지 알 수 없다는 것.
“신창훈, 준비됐으면 돌격 개시.”
“롸져!”
휘이이이잉-
나는 테이아의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위에서 연사를 갈길 생각인데, 조금 더 포악한 표정을 짓는 게 효과가 있을지 살짝 고민이 된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내면의 악마를 끌어내어 과감하게 감행해 보기로 했다.
여기에 사악한 웃음소리를 살짝 얹어, 땅 밑을 향해 탄환을 갈겨 본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너무 이입을 했다가는, 계산보다 마력이 많이 실릴 수 있으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벌써?’
1회차 때보다는 훨씬 좋은 페이스.
미미하지만, 효과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탄환을 맞은 사람들의 신음성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며, 9층 플레이어들의 거센 공격이 시작된다.
1회차 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깔끔하게 연사를 마무리한 뒤 바로 낙하를 했다.
내게 허용된 7명의 PK 중 타깃 둘은 이미 정해져 있다.
첫 번째는 채이설.
기분이 묘하다.
신주아나 김세용이라면 몰라도, 채이설에게 검을 들이민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일이니까.
“이호영!”
신주아와는 달리 날 보자마자 반말을 하는 채이설의 모습은 낯설다.
사실 신주아가 특이 케이스였다.
공략집에 따르면 복사판의 마음에는 포악한 감정만 남는다고 했으니까.
“빨리 끝내 줄게.”
그것이 고통도 적을 것이다.
“나쁜 놈! 네 말을 듣고 7층을 선택한 게 잘못이었다.”
“왜지?”
“이 빌어먹을 사막! 여기서 지내게 된 건 다 네 탓이다!”
채이설의 이런 멘트를 더 듣고 있는 건 괴로운 일이다.
스으으윽!
엘리시온이 한줄기 섬광을 발하며, 채이설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몸통과 분리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남은 PK: 6]
다행히, 이번에도 살인 페널티는 0이다.
다음 타깃은 서준호.
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깔끔하게 죽일 생각은 아니다.
복사판의 수준이 본체와 비교해서 어떤지 서준호를 통해 확인해 볼 생각.
나와 같은 검투사이기에 서준호와는 숱하게 검을 섞어 봤고, 그의 검술 실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기왕 미안한 거 좀 더 포악하게 상대해 봐야겠다.
- 19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