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신림역 쪽 사람들은 지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의 계획에 없었던 일일 테니까.
봉천역에 대한 배신이 정해진 수순이었다고는 하나, 그 타이밍이 당초의 계획보다 너무 빨랐기에 다들 당황했을 터.
무엇보다, 배신을 명령한 리더 최병대가 곧바로 죽어 버렸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멘탈이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금 봉천을 공격해야 하는 거 맞지?”
전쟁에서 지휘권의 부재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다.
더욱이 지금처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우라면 더더욱.
“캥수야! 공격!”
캥!
이렇게 상대방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몰아칠 필요가 있다.
더 정신을 못 차리도록.
퍼억-
퍼어어억-
캥수는 신림 쪽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펀치를 날려 댔다.
펀치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오함마의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정통으로 맞으면 바로 중상일 정도로.
퍼어어억-
“허어업!”
벌써 신림역은 몇 명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오늘 캥수의 컨디션은 베스트.
“캥수야! 워워!”
캥!
하지만 너무 흥분하지는 않도록 절제시킬 필요도 있었다.
캥수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일은 곤란하다.
녀석이 웬만한 플레이어들보다는 훨씬 강하겠지만, 단독으로 무쌍을 찍기엔 아직은 부족한 수준이니까.
지금은 이런 식으로 실전 경험을 쌓으며, 상대방을 헤집어 놓는 것이면 족하다.
봉천 쪽 사람들이 쫄지 않고 제대로 싸워 볼 수 있도록.
퍼어어억!
캥수는 이곳저곳을 빠르게 치고 빠지며 공격의 첨병 역할을 해 주었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압도적인 스피드를 활용하여 영리하게 적진을 흐트러뜨려 놓는 모습.
바로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는 걸 보니 흐뭇할 뿐이다.
캥수의 활약을 신호탄으로 봉천 쪽 사람들 역시 신림에 대한 총공세를 퍼붓는 중이었다.
‘바보는 아니군.’
신창훈.
봉천의 리더를 맡고 있는 저 녀석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션의 조건은 2호선 노선도의 왼쪽을 공격하여 10kill 달성하기.
신림과의 동맹이 깨졌으니 코앞의 타깃을 놓칠 이유가 없다.
“일단 10명만 끝내!!”
신창훈이 박력 넘치는 외침에 봉천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비록 신림에게 전력에서는 밀리더라도 10kill만 달성할 수 있다면, 반전을 노려볼 수도 있다.
봉천이 미션을 클리어하는 순간, 전쟁의 승리가 확정되며 신림은 페널티를 받게 될 테니까.
‘최병대 놈이 멍청하긴 했지.’
전력의 격차를 감안해도 여기서 동맹을 깨는 것은 너무 큰 도박이었다.
현재 미션 클리어의 방향은 노선도의 왼쪽을 공격하기.
신림으로선 노선도의 오른쪽인 봉천을 아무리 공격한다 한들, 미션 클리어와는 무관하기 때문.
“겁먹지 마! 딱 10명이면 돼!”
그동안 봉천이 아무리 신림의 밥이었어도, 희생자를 10명 이내로 막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휘권자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
봉천의 미션 클리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두 진영의 전쟁을 바라만 보았다.
참으로 잔혹한 종말의 게임이다.
전쟁의 이유는 이념의 차이 때문도, 경제적 이득을 위함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도 아니다.
그저 게임의 룰이 그러하니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피가 튄다.
살점이 베이고, 비명 소리가 난무한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전쟁의 끔찍함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이런 장면에도 무감각해졌으니까.
[봉천역이 미션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봉천의 피해도 적진 않았으나, 예상대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방어에 실패한 신림역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안 돼애애!!”
퍼어엉!
퍼어엉!
소름 돋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마나가 폭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폭발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몸속.
신림역 사람들이 하나둘씩 피를 토하며 죽어 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고통에 절규하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누가 죽을지, 몇 명이 더 죽을지는 알 수 없다.
마나 폭발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순간이 곧 페널티의 종결.
퍼어엉!
수십 구의 시체가 더 쌓인 후에야, 신림역 사람들의 절규는 끝이 났다.
그리고 봉천역 사람들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들렸을 것이다.
[스페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인접한 한 개의 역을 섬멸하십시오.]
[각 노선마다 스페셜 퀘스트를 가장 빠르게 완수하는 한 구역에는 지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합니다.]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
지금 어느 쪽의 기세가 높은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 * *
“종전을 요청한다!”
신림역 쪽에서 나온 제안.
그들은 스페셜 퀘스트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봉천역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도 알고 있다.
“뭐? 먼저 배신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종전?”
신창훈이 코웃음을 쳤다.
“계속 싸우면 어차피 공멸이야! 정말로 너희 봉천이 우릴 섬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신림 쪽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봉천이 지금의 기세를 이어 간다 해도 본래의 전력 차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
물론 내가 봉천 쪽으로 가세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봉천의 미션 클리어 이후 양 구역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언제 다시 살육전이 재개돼도 이상하지 않다.
“네 힘이 필요하다! 우리 봉천을 도와다오. 이호영!”
스페셜 퀘스트에 대한 신창훈의 의지는 확고했다.
비록 위험 부담이 크지만,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순 없을 테니까.
“고맙단 말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야?”
“그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거기서 최병대의 목을 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힘든 싸움이었겠지. 그러니 한 번만 더 도와다오.”
물론 도울 생각이다.
아직 ‘봉천역 장악하기’라는 나만의 개인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기에, 내 활약이 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만, 살인 페널티가 살짝 마음에 걸린다.
비록 니케의 반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량 학살 속에서도 페널티 0이 계속 뜰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도와주지.”
“고맙다. 이호영!”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너희들의 전쟁 방식에 ‘투항’의 개념은 없는 거냐?”
내 물음에 신창훈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로 이상해! 너는 신림이 배신할 거란 걸 미리 예상했으면서도, 이 지하철역 전쟁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말했잖아. 나는 지금 막 서울에 온 것이라고.”
“네가 물어본 투항.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종말의 초반에만 활용했을 뿐, 더 이상은 쓰지 않는 방식이다.”
“왜지?”
“투항을 하는 순간, 그동안 쌓은 모든 스탯이 종말 전으로 초기화되니까. 쓸모없는 유닛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장 빠르게 신림역을 삭제하는 방법이 있었네.”
“뭐?”
“내 힘이 필요하다고 했지? 나한테 맡겨 봐.”
최선과 차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선순위는 명백하다.
어느 정도는 자신도 있으니까.
* * *
투항을 끌어내기 위한 최우선적인 요소는 상대로 하여금 극한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단순히 무력을 과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내게 있었다.
부우우웅-
나는 테이아의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신비감을 주는 방식으로, 조금씩 부양해 올라갔다.
휘이이이잉-
그리고 마법을 이용하여 바람을 일으켰다.
물론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다.
“뭐…… 뭐야! 저게!!”
“하늘을 나는 거야??”
놀란 것은 단지 신림 쪽뿐만이 아니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너희에게 투항할 기회를 주겠다.”
지금 이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하늘을 나는 것 이전에도 이미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었다.
바람처럼 등장해 신림의 리더 최병대의 목을 단칼에 베었고, 영물처럼 보이는 캥수를 소환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까지.
여기에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을 생각이었다.
“배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너희 신림은 스페셜 퀘스트가 생성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나의 발언은 경악의 강도를 한층 더해 주었을 것이다.
신림 쪽에 예언가가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니까.
“너희들은 투항으로 인해 스탯이 초기화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봉천의 일원이 되어 우리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 새롭게 시작하면 될 것이다.”
물론 지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말을 멈추자, 잠시 침묵이 감돈다.
투항. 종말이 한참 진행된 현시점에서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지금은 지상 진출이라는 특이점을 앞둔 시기.
신림의 한 녀석이 내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신…… 입니까?”
잘 걸렸다.
한 놈만 제대로 물면, 줄줄이 엮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너는 투항할 것이냐?”
나는 녀석을 가리키며 대답을 촉구했다.
결국 녀석의 동공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답은 뻔하다.
“투항하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첫 단추가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플레이어 한지혁의 소속이 봉천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변절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겠지만, 지금은 재밌는 광경이 펼쳐졌다.
고뇌 가득한 저 눈빛들.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꾹 눌러 참았다.
“저도 투항하겠습니다.”
[플레이어 김지혜의 소속이 봉천역으로 바뀌었습니다.]
“투항하겠습니다.”
“투항하겠습니다.”
잠시 후, 이곳에 신림역의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 * *
일부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
신림역에서 수비를 맡고 있던 절반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나의 권능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나는 차마 그 낯 뜨거운 장면을 두 번이나 연출할 수 없었기에 일부의 무력 충돌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타아아앙-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저항을 하던 이들의 동작이 일시 정지가 되어 버린다.
반응을 보니, 종말 이후에 총소리를 들어 보는 건 처음인 듯했다.
더 이상 내가 직접 투항을 독려할 필요가 없었다.
나 대신 설득을 해 줄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물론 끝까지 저항을 하는 이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지는 않았다.
타아아앙-
나에게 경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실력 행사는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두 개의 퀘스트가 동시에 완료되었다.
하나는 봉천역을 장악하라는 나만의 퀘스트.
다른 하나는 이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을 지상으로 인도할 스페셜 퀘스트.
“결계가 사라졌어!!”
누군가가 외쳤다.
봉쇄되어 있던 지상으로의 출구가 드디어 열리는 순간이었다.
“종말의 끝이 보이고 있어!”
희망 가득한 목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미안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곳은 내게 29층의 시작일 뿐이니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29층의 군주,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
그놈은 이제 본격적인 전쟁의 무대를 연출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