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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91화 (191/292)

191화

[29층이 시작됩니다.]

[이제 곧 B-563EA7 구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번에 이동할 장소는 탑의 열두 군주 중 하나가 관장하는 지역.

군주들의 영역에 한하여, 나에겐 성가신 제약 하나가 있다.

다른 군주들의 호감을 너무 얻으면 안 된다는 것.

나에게 공략집을 후원하고 있는 군주가 질투를 한다는 것이 이유인데, 웃기는 점은 나는 그 군주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차원의 틈새에서 만나는 제나는 대리인일 뿐이니까.

‘어쨌든 까라면 까야지 뭐.’

그렇다고 호감도를 무작정 낮춰 버리면, 퀘스트의 난이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적정선을 유지하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공략집을 얻는 반대급부로 고달픈 설정도 감내해야 하는 것.

나는 이틀 전 전송된 공략집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29층을 다스리는 군주는 ‘포악한 광기의 전쟁광’입니다.]

[초기 호감도는 28층까지 플레이어들이 보여 준 포악성에 따라 결정되며, 모든 살성들은 매우 높은 버프를 적용받으니 절대 이들과 충돌하지 마십시오.]

[시시때때로 생성되는 퀘스트를 해결하며 ???일 동안 생존하시길 바랍니다.]

전쟁광이라는 수식이 마음에 걸린다.

차라리 사냥이라면 마음이 편하겠으나, 전쟁은 몬스터를 상대로 벌이는 것이 아닐 테니까.

과연 29층의 무대는 어떤 곳일지, 살짝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B-563EA7 구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암전되었던 배경에 빛이 들어오며 그 베일을 벗었을 때, 우리 모두는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여…… 여기는!”

“설마 서울이야??”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매우 익숙한 광경.

서울 시가지의 모습이었으며, 저 멀리 남산 타워도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다들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서 있을 뿐이다.

꿈에서나 그리던 고향을 이렇게 갑자기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알던 서울이 아닐 겁니다.”

적막을 깬 것은 신주아였다.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고? 딱 봐도 맞는데 아니라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신주아의 초 치는 말에 김세용은 흥분을 하며 대꾸했다.

“저기, 옥외 전광판!”

신주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물의 대형 화면에서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뭔가 낯설어 보이는 화면. 우리가 알던 그 대통령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자막으로 나오고 있는 이름 또한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위화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거리에 아무도 없어!”

평소라면 수많은 자동차와 인파로 북적여야 할 대로변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이 넓은 곳에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우리들뿐.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평행 세계인 것 같습니다.”

서준호가 소리쳤다.

익숙한 지명이 적혀 있는 표지판과 건물들. 그리고 남산타워까지. 이곳은 서울 그 자체이지만 또한 완전히 다른 곳이기도 했다.

어쩌면 데라 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상의 세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평행 세계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때! 여기는 우리가 항상 그리워했던 고향의 모습인데!”

조병국의 말에 몇 명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상태창에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호감도: -45]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낮은 숫자.

전쟁광이라는 군주는 내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호감도가 여기서 더 낮아지면 곤란하다.

제나는 -50 밑으로 내려가는 일도 항상 경계하라고 했으니까.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실실거리며 웃는 소리.

남소현이었다.

[호감도: EX]

심지어 100도 아닌 EX.

지난 번 군주에게 총애를 듬뿍 받았던 것이 김세용이라면, 이번에는 남소현인가 보다.

우리 동료들은 저마다 본인에게 부여된 호감도를 확인하며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이었다.

다들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 호감도가 높아질수록 퀘스트의 난도가 떨어지며 능력치에 버프를 받게 된다는 것을.

[29층의 미션이 시작되기 30분 전입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일단은 서울의 모습이나 실컷 감상해야겠다.

내가 살던 서울이 아니라 할지라도 29층이 끝난 후엔 많이 그리워질 테니까.

투욱-

그 순간 남소현이 내 어깨를 치며 지나갔다.

“뭔데?”

“그냥 한번 쳐 봤어. 띠꺼우면 지금 한 판 떠 보든가.”

중2병스러운 대사에 순간 손발이 오그라들 뻔했다.

이 녀석. 믿는 구석이 있으니 아주 대놓고 시비를 건다.

“불만 없어.”

“왜 불만이 없는 건데? 나 방금 일부러 널 치고 지나갔거든?”

“어, 괜찮아.”

“이런 재미없는 새끼.”

내가 조그마한 응징이라도 하면 역관광을 시키려는 의도인가 본데, 이런 유치한 도발에 걸려 줄 생각은 없다.

입에다가 고구마나 넣어 줘야겠다.

“당분간 사이좋게 지내자. 남소현.”

“짜증 나! 꺼져!”

만약 남소현이 나를 이길 자신이 있고, 눈치를 볼 사람이 없어진다면 살성 특유의 살인 충동이 튀어 나올지도 모른다.

‘당분간 이 녀석을 주시해야겠군.’

탑이 예고한 30분이 모두 흘러가며, 드디어 29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지하철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원하는 노선을 선택하십시오.]

전쟁광 녀석은 우리 플레이어들을 뿔뿔이 흩어 놓으려는 모양.

우리에게 상의할 기회 따윈 없었다.

‘2호선.’

내 선택에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출퇴근 시간에 주로 이용하며 익숙했으니까.

[2호선 중 랜덤으로 시작 위치가 결정됩니다.]

잠시 후, 나는 서울 시가지에 아무도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 * *

봉천역.

“당신!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이 봉천역에 밀집해 있었고, 저마다 손에는 창, 칼, 활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확실히 일상적인 지하철역의 풍경은 아니다.

“저도 모릅니다. 제가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일단은 분위기부터 파악해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 서울대입구역에서 온 첩자 아니야?”

“맞아! 우리랑 동맹을 맺은 신림역 쪽에서 배신을 했을 거 같지는 않고, 아마 서울대 쪽에서 온 놈이겠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대사지만, 무슨 상황인지 대충은 알 것도 같다.

그 순간 퀘스트 하나가 생성되었다.

[봉천역을 장악하십시오.]

[제한 시간: 24시간]

[성공 시: 호감도 +1]

[실패 시: 호감도 -15]

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방법은 너무나 명확했다.

토론으로 여기 있는 수백 명을 굴복시킬 순 없을 테니까.

“이미 말했지만, 난 첩자가 아니야.”

“그거야, 지금 바로 족쳐 보면 알게 되겠지.”

순식간에 여섯 명의 거한들이 나를 에워쌌다.

‘이들은 플레이어가 아니야.’

상태창이 보이지 않으니, 이들은 이곳의 원주민이라는 의미.

하지만 기감을 일으켜 이들의 마나 수준은 느낄 수 있었다.

‘플레이어와 비슷한 수준.’

나를 에워싼 여섯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죽일 이유는 없다.

퀘스트의 달성 조건은 이 역을 장악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바로 덮쳐!!”

여섯 개의 근접 무기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쏟아진다.

그중에 하나. 찔러 오는 창날은 그나마 위협적인 마나를 머금고 있다.

타아아악!

그 순간, 나의 엘리시온은 공중에서 한 바퀴 원을 그려 냈고,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아악!”

“안 돼!”

간신히 창을 잡고 서 있는 한 명.

‘역시, 이 녀석이 리더군.’

나는 지체 없이 창기사에게 접근하여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녀석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허어업!”

순식간에 여섯 명을 정리한 효과는 나름 괜찮았다.

더 이상 달려드는 이는 없었고, 그저 경악의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래도 내가 첩자라고 생각해?”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가 첩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잖아. 다시 말하지만, 난 첩자가 아니야. 왜 이곳으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봉천역 사람들. 이들의 옷가지는 너덜너덜한 넝마였으며, 곳곳에는 오래된 핏자국과 아물지 않은 상처들도 보인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가까운 과거는 아니라는 의미다.

“갑자기 떨어졌다는 건, 방금 전까지도 지상에 있었다는 것인가?”

내 주먹에 쓰러진 창기사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

“거짓말! 종말의 열 번째 스테이지 이후 모든 서울 시민들은 지하철역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도 지상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종말.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형태는 다르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 역시 종말을 겪고 있었다.

“일단 나는 서울 시민이 아니니까. 우리나라엔 지하철이 안 다니는 땅이 훨씬 더 넓다는 거 몰라?”

“서울 시민이 아니라고?”

“그래. 난 강원도 출신이야. 그중에서도 홍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이니까.

“여전히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멀쩡하던 세상에 종말이 온 건 이상하지 않고?”

“그…… 그건!”

궤변이긴 하지만, 불리할 때 쓸 수 있는 만능의 문장이다.

종말보다 이상한 것은 없으니까.

그 순간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또 전쟁을 해야 한다고?”

“이번엔 1호선 왼쪽 방향이야!”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하지만 이들만의 공감대가 있는 것을 보니, 여기에서도 메시지를 통해 미션이 전달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 봐. 혹시 알아? 내가 도와줄지.”

봉천역을 장악하라는 퀘스트.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보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쪽이 빠를 지도 모르겠다.

* * *

이곳의 서울 시민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메시지의 지시에 따라 때로는 노선도의 왼쪽을 향해, 때로는 오른쪽을 향해 쳐들어가야만 하는 처지였다.

내가 맞이한 종말보다 훨씬 가혹한 환경이다.

“이번 미션의 성공 조건이 10Kill이라고 했던가?”

“그래. 노선도의 왼쪽으로 이동해서 열 명을 죽여야 한다. 그래도 이번 미션은 제시된 킬 수가 적어 수월한 편이다.”

나와 나란히 걷고 있는 신창훈은 내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날 경계하고 있었다.

“바로 왼쪽은 신림이잖아. 거기랑은 이제 동맹을 맺었으니 건너뛰고 신대방으로 가는 건가?”

“신림과 연합하여 쳐들어가기로 약속되어 있다.”

미션에 실패하는 구역은 랜덤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누가 죽을지, 몇 명이 죽을지도 알 수 없기에 사람들은 꾸역꾸역 전쟁을 해 나가는 입장.

한 구역의 절반은 공격을, 절반은 역을 방어를 해야 하는 규칙이 있기에 나는 공격을 맡은 쪽을 따라 왔다.

잠시 후 도착하게 된 신림.

멀리서부터 기감을 통해 느끼긴 했지만, 봉천역보다는 세력이 더욱 컸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수준이 좀 다른데.’

적당히 차이가 난다면, 동맹의 의미가 있겠지만 이 정도로 수준차가 난다면 신림의 입장에선 얻을 것이 별로 없다.

노선도의 오른쪽을 향해 공격하게 되는 경우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왔어?”

얼굴에 칼자국이 난 녀석이 우리의 등장에 인사를 건넨다.

“이제 바로 신대방으로 출발하는 건가?”

“그래! 어제까지는 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잘해 보자고, 봉천역 동지들. 크크크.”

칼자국 녀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전개될 클리셰가 너무 빤히 보이는 것 같아, 여기가 소설 속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 19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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