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가주님과 이야기는 잘 나누고 오셨습니까?”
깊은 밤이지만, 신주아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방은 여전히 환하게 점등되어 있었으며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지금까지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해?”
“잠이 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 시간까지?”
“가주님과는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궁금했으니까요.”
“그런 이유라면 잠을 자면서 시간을 삭제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잖아.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하지만 사람들은 늦은 밤까지 선거 개표 방송을 보기도 하고, 밤을 새어 월드컵 조 추첨 결과를 확인하기도 하지요.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네.”
“우리가 원하는 걸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맞혀 봐.”
굳이 예언가가 아니더라도, 분위기를 보면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지.
“표정이 좋으십니다. 여전히 술 냄새가 풀풀 나는 게 굳이 취기도 몰아내지 않으신 거 같고.”
“어.”
“역시, 잘 해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뭔가 얻어 낸 거 같아. 이르면 내일 바로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너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그동안 고생했어. 얼떨결에 내가 부부 설정을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사실 내가 더 고생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저와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이 시간에?”
“마지막 밤이니까요.”
“뭐, 좋지.”
지금의 알딸딸한 기분이 나름 괜찮았기에 반가운 제안이었다.
탑에서는 자주 누릴 수 없는 호사.
일반적으로 탑에서 우리 플레이어들은 식욕을 비롯한 모든 욕구를 느끼지 않으니, 이 무드를 좀 더 누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탑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술맛이 그립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이 생생한 알딸딸함은 조금 더 간직하고 싶다.
이런 욕구야말로 플레이어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니까.
“규칙은 알지?”
“네. 마나를 일으켜 취기를 몰아내지 않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규칙을 제안했던 건 명백한 판단 미스였다.
나는 이미 듀퐁과 술자리를 가지며 한바탕 퍼붓기도 했고, 신주아는 듀퐁에 버금가는 술고래니까.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테이블 위에는 정말 많은 술병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신주아와 술을 마시며 나눴던 대화는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해서, 듀퐁이 은밀하게 해 온 연구들, 그리고 바다 건너의 가짜 데라 대륙. 그리고.
‘……어?’
그 뒤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얼마만큼 마셨는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
“그 뒤로,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신주아의 짤막한 대답이었다.
“정말로?”
“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님.”
“잘 다녀오거라. 요한아. 그리고 이호영 부단장도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네.”
결국 요한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그의 일곱 병사 그리고 니엘까지도 함께 말이다.
이는, 성년이 된 요한이 정식으로 떠나는 출정식이기도 하였다.
파바바밧-
일곱 개의 구슬은 어비스로 인도할 포털을 만들어 냈고, 우리는 듀퐁의 배웅을 받으며 하나둘씩 그 입구를 통과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잠시 후, 우리 앞에 펼쳐진 신비한 세상.
“……여기가 바로!”
데라였다.
방금 전까지도 우리가 발을 딛고 있었던 그곳, 데라.
하늘 위의 구름도, 드넓게 펼쳐진 들판도, 듀퐁의 저택에서 훤히 보이는 그 야산도 그대로였다.
“듣던 대로 데라 그 자체군요. 이호영 부단장.”
“네. 단장님.”
다만 달라진 것은 듀퐁의 저택을 비롯한 모든 인공물들이 사라졌으며, 이 포털에 들어온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
이곳으로부터 우리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든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드넓은 데라의 땅에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우리들뿐.
확실히 이상한 곳임은 분명했다.
어비스이되 데라와 완벽하게 닮은 땅.
다른 어비스들과 다르게 미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출발의 위치로 돌아와 포털을 통과하여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부단장도 이미 아버님께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이 어비스에서 발견된 특이점은 아직 없어요. 실제 데라와 똑같이 생긴 땅이라는 것. 그것이 결론이었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탐험해 보지 않은 곳으로 가 보려 합니다.”
“이 어비스의 미개척지는 없다고 들었어요.”
“있습니다. 단 한 곳.”
악마의 낭떠러지. 바다 끝에 존재하는 이 세상의 끝.
데라 사람들은 그 너머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바다의 끝으로 간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낭떠러지로 가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단장님.”
듀퐁의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곳.
그곳만큼 의심스러운 장소는 없다.
악마의 낭떠러지는 이전에 비행을 하며 바다를 건넜을 때 미지의 경외감을 느꼈던 곳이다.
나의 절대 시각으로도 그 끝을 볼 수 없는 심연의 구렁.
만약 그때 그곳으로 바로 들어갔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인생에서 ‘만약’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으니까.
다만 실제 세상에서의 그곳과 이 어비스에서의 그곳은 명백히 다른 장소.
내가 원하는 일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 벌어질 공산이 크다.
“부단장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거길 가겠…… 아! 설마 그 방법으로?!”
나는 요한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단장님, 죄송하지만 그곳에 모두가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날개가 있는 것은 부단장 혼자뿐이니까요.”
“일단은 저와 제 아내. 이렇게 둘만 선발대로 가 보려 합니다.”
애초에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음에도 요한 그리고 종자들과 함께 이 어비스에 들어온 건, 우리가 떠난 이후를 위해서였다.
떠나기 전 이곳에서 수라마혈검을 전수해 줄 생각이다.
아직은 28층의 제한 시간이 넉넉한 편이니까.
신주아는 내게 오지랖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진 않았다.
요한도 요한이지만, 검투사로서 니엘의 천재적 재능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내게 너무 가혹한 일.
니엘이라면 그 천재적인 재능으로 이 궁극의 검술이 가진 극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땅에서 검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리란 것을.
나는 그 초석만을 다지고 떠나게 될 뿐이다.
* * *
휘이이이이잉-
긴 시간을 날아 도착한 곳은 바다의 끝.
저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이러니 사람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주아, 도착했어. 눈 떠.”
이미 신주아는 한참 전부터 질끈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 바다를 건널 때에도 느꼈던 사실이지만, 신주아의 고소공포증은 평소 이미지와는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는다.
“눈 뜨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이런 진귀한 장관을 안 보겠다고?”
바다의 끝에서는 물의 흐름이 멈춰 있다.
이상한 물리 법칙이지만, 데라의 사람들에게는 이게 당연한 일이다.
만약 바다의 모든 물이 낭떠러지로 쏟아져 내린다면, 이미 바다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안 보면 후회한다니까!”
“보는 것이 후회입니다.”
마치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 느낌이다.
어쨌든 바다의 끝에 다다랐으니, 이제부터는 하강할 일만 남았다.
어느 정도 밑으로 내려가야 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바다를 횡단한 것보다도 긴 거리가 될지도. 그러니 일단은 마나 충전부터 해야겠다.
[키르아의 룬을 사용합니다.]
[마나를 회복하였습니다.]
“이제 내려가시는 겁니까?”
“어. 그리고 잠깐 실례.”
차악!
좀 더 효율적인 하강을 위해, 자세를 바꾸어 신주아를 뒤에서 안았다.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신주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니 자유 낙하 방식으로 떨어질 거야. 중간에 무서우면 신호를 보내. 그때 날개를 펴서 추락의 속도를 늦출 수 있으니까.”
“날개를 펴고 내려갈 순 없는 겁니까?”
“어, 안 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나를 아껴야 하잖아.”
“……알겠습니다.”
체념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
신주아는 빠르게 납득을 했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두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휘이이익-
질질 끌 거 없이, 나는 바로 악마의 낭떠러지를 향해 스카이다이빙을 시작했다.
중력에 온전히 몸을 맡기자, 우리의 몸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가속되어 나갔다.
절대 시각을 통해 주변의 모든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모든 것이 경이적이다.
낭떠러지의 절경도, 이 어마어마한 높이도.
분명 나와 신주아의 낙하는 어마어마한 속도에 도달했을 텐데도, 우리의 추락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빠른 시간 내에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시공간의 왜곡!’
이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신주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 나는 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신주아도 보통은 아니다.
아까부터 읍! 읍! 하는 신음소리를 끊임없이 내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나에게 구호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어진 낙하.
마침내, 우리는 어느 순간 특이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곧 드래곤의 레어입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역시 그러했다.
일곱 개의 구슬을 모으면 마땅히 드래곤이 등장해야만 한다.
우리가 엄밀히 원하는 것은 드래곤의 알이지만 말이다.
“입장.”
“우웩!”
신주아는 드래곤의 레어에 입장하자마자 본인의 영역 표시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참은 거라니, 미련한 건지 독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날개 좀 펴 달라고 하지 그랬어.”
“했…… 우웩!!”
“뭐? 했다고?”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신주아는 계속해서 속을 게워 내는데, 이제야 살짝 연민이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날개를 한 번 정도는 폈어도 되는 건데.
그래도 덕분에 마나 상태는 충만하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도착하게 된 이곳은 드넓은 드래곤의 레어.
악마의 낭떠러지 아래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곳 어딘가에는 드래곤이 존재할지도 모르며, 아직 부화되지 않은 드래곤의 알은 반드시 숨겨져 있을 것이다.
“신주아, 넌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선택한 28층의 난이도는 136이었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플레이어의 10배 수준의 어려움. 사실 여기까지 왔으면 난이도 136의 숫자는 많이 소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걸 보니, 이제 정신을 다 차린 모양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드래곤의 레어에 왔다고 드래곤과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난이도는 고작 136에 그쳤을 리가 없으니까.
“이렇게 직접 이곳에 와 보게 되니 상황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데?”
“드래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존재이거나, 혹은 이 레어에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때였다.
- 설마 너희는 인간인가?
갑자기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음성.
물론 이 음성의 주인은 의심의 여지없이 드래곤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서둘러 허공에 대고 대답을 했다.
- 인간 주제에 겁도 없이 나의 둥지에 들어오다니. 죽여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버려라!
“혹시, 여긴 인간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까?”
- 그렇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때 썩 꺼지도록 하여라!
좋은 정보를 확인했다.
인간은 드래곤의 레어에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드래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야, 신주아. 드래곤 지금 여기 없나 보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래곤은 이곳 레어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빠르게 알을 찾아서 터뜨리는 것.
이제부터는 드래곤을 상대로 협박을 좀 해 볼 생각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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