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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88화 (188/292)

188화

요한의 성년식은 끝났지만, 식이 거행된 대저택의 정원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어비스에 들어간 요한이 나오길 기다리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으며, 수다를 떨었다.

대화의 이슈는 역시 요한의 거취 문제.

요한의 여덟 형제들은 모두 성년식 이후로도 후계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번의 자격 시험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요한의 지위 박탈은 아주 유력한 상황이니까.

만약 그것이 현실화된다면 이번 대(代)에서는 최초의 케이스.

최근 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요한 녀석, 결국 최초라는 타이틀은 얻게 되는 셈이네. 크크크.”

자멜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 보면 우리 형제 중에서 요한을 제일 싫어하는 건 자멜 형인 거 같아. 나도 더러운 피가 섞인 그 녀석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형은 뭐랄까 필요 이상으로 그 녀석을 견제하는 느낌?”

“견제라니! 단어 선택이 틀렸다 아우야. 난 그냥 그놈이 싫은 것뿐이야. 생긴 것도 싫고 목소리도 싫고, 그 녀석이 검을 휘두르는 것만 봐도 토가 쏠릴 지경이야.”

“더러운 피가 섞여서 그렇지, 생긴 건 솔직히 나무랄 데가 없지 않나? 오늘 하객으로 온 여자들, 요한 녀석의 얼굴을 보곤 완전 난리던데.”

“그런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얼굴이 뭐 대수라고! 난 그 자식이 어비스 안에서 뒈져 버렸으면 좋겠어!”

“자멜 형! 목소리가 너무 커. 아버지 들으시면 어쩌려고.”

“뭐 어때? 어차피 이제 우리 가문에서 쫓겨날 녀석인데.”

자멜은 짜증 난다는 듯이 돼지코를 벌렁거리며, 두껍게 썰어진 고기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기안은 그런 셋째 형 자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자멜 형은 질투를 하는 게 틀림없다.

천민의 피가 섞였으면서도 곱상하게 생긴 얼굴에, 나쁘지 않은 검의 재능,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듀퐁 밀레티노는 단 한 번도 자멜을 인정해 준 적이 없으니까.

“요한 그 머저리 같은 자식은 행여 붉은 마녀를 만나기라도 하면 바지에 오줌부터 지릴걸?”

“자멜 형! 그 붉은 마녀가 그 정도로 기가 세?”

“너도 직접 눈 한 번 마주치면 바로 움찔할걸? 배포가 나 쯤 되지 않으면 제대로 말 섞는 것도 쉽지 않지. 크크크.”

기안은 차마 반응하지 않았다.

셋째 형이 오줌을 지렸다는 소문을 믿진 않지만, 그렇다고 배포가 있다는 건 지나가던 똥개가 웃을 얘기.

검에 살짝 베이기만 해도 온갖 엄살을 떠는 게 자멜이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어! 저기!!”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순간 한곳으로 집중된다.

지지지직-

스파크가 튀며 공간이 찢어지고 있었다.

“크크크. 요한 그 얼간이 자식, 제한시간을 다 넘겨서 결국 어비스에서 쫓겨나는 거지 뭐.”

“자멜 형! 그게 아니잖아! 스파크의 색깔을 봐!”

“색깔이 뭐!”

“붉은색이잖아! 미션 클리어의 징후!”

“에이, 서…… 설마!”

스파크의 색은 점점 더 농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완연한 붉은 빛.

정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등장한 것은 요한을 비롯한 그의 병사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 * *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녹이고 나니 머리까지 개운해졌다.

신주아도 아직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모양.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긴 생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며칠 째 부부 행세를 하다 보니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어느새 자연스럽다.

“이제, 가주님을 뵈러 가시는 겁니까?”

“어, 피곤하긴 한데 부르시니 안 갈 수가 있나. 마침 할 가주님께 할 이야기도 있으니 잘됐지 뭐. 신주아 너도 같이 갈래?”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굳이 가고 싶진 않습니다.”

“어차피 부부 설정이잖아. 네가 함께한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어.”

“됐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혼자 다녀오지 뭐. 아참! 자멜 그 녀석 결국 붉은 마녀한테 사과하러 갔다는 얘기 들었어?”

“니엘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녀석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온다.

오늘 오후, 자멜의 표정은 정말로 가관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오늘 보고야 만 것이다.

“그 녀석. 여벌 팬티 한 장은 더 가져 갔으려나?”

“가주님 앞에서는 절대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가주님의 아들 아닙니까. 괜히 그러다가 미움 받으십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와이프 같잖아.”

“착각이십니다.”

“어쨌든 다녀올게. 늦을 거 같으니까 먼저 자고 있어.”

“그러겠습니다.”

어쩌면 밤을 새울지도 모른다.

밀레티노 듀퐁은 바다 건너의 또 다른 듀퐁만큼이나 술고래니까.

물론 마시는 술의 종류가 너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크로코스 180년산일세. 한잔 받게.”

“네. 가주님.”

듀퐁은 내가 오기 전부터 서재에서 이미 몇 병을 마신 모양.

은은한 고급술의 향이 서재 전체에서 진동을 한다.

“처음 만난 날, 야산에서 자네에게 술대접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일세.”

“각오는 하고 왔습니다.”

“그래 마음에 드는군. 규칙은 알고 있겠지?”

“네, 절대로 마나를 일으켜 취기를 몰아내지 않기.”

“좋아. 그럼 마시게나.”

그렇게 시작된 듀퐁과의 독대.

웬일인지 듀퐁은 어비스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막내 요한과 관련한 고맙다는 말도, 앞으로의 나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었다.

그냥 우리는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는 것이 나는 더 편하다.

어차피 나에 대한 듀퐁의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까.

“와하하하!”

그는 모든 격식을 내려놓은 채 시종일관 웃었다.

오늘 그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밀레티노 듀퐁은 주정뱅이 듀퐁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지 생김새나 술을 좋아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곳, 서재를 가득 채운 방대한 양의 서적들만 해도 그렇다.

단지 장식용이 아닐 거란 느낌이 든다.

나는 술을 마시며 적당한 기회를 보고 있었다.

듀퐁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으니까.

‘분명 듀퐁은 실마리를 쥐고 있을 거야.’

공략집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듀퐁에게 호감을 산다면, 28층의 미션을 클리어할 단서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마침, 듀퐁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물었다.

“자네,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지 아마?”

역시, 듀퐁은 흘려듣지 않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내가 요한의 자격 시험을 성공적으로 돕게 되는 경우, 그는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의 질문.

“네. 가주님께서는 아마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물어보려고 하는지 기대가 되는군.”

“가주님께서는 대륙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드래곤의 행방에 대해 아십니까?”

이미 붉은 마녀로부터 일부의 단서는 들었다.

‘어떤 감춰진 어비스.’

듀퐁은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잠시 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역시 자네는 참 신비로운 친구야. 도무지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것도 놀라운데, 질문의 내용은 더욱 놀라워.”

역시, 은밀하게 내 뒷조사를 한 모양이다.

아무리 캐 봐도 나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을 테고, 그게 가장 의문이었을 것이다.

듀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자네는 내가 은밀하게 연구 중인 사업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왜 제게 말하시는 겁니까?”

“왠지 자네는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혹시 내 말이 틀렸나?”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굳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주님으로부터 질문의 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은밀한 연구라…….

역시 밀레티노 듀퐁은 바다 건너의 듀퐁과 상당히 닮아 있다.

“좋아. 약속한 것도 있으니 자네에게 내가 아는 부분까지는 털어놓겠네. 술이 깨고 나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어떤 식으로든 가주님께 도움이 될 테니까.”

“그래. 나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황당한 이야기 하나를 해 주겠네. 이곳 데라와 똑 닮은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자네는 믿을 수 있겠나?”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믿어 보겠습니다.”

“가설을 뒷받침하는 몇몇 증언들이 나오고 있어. 포털을 통해 또 다른 데라에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물론 아직은 괴담 정도로 치부되긴 한다네.”

“그런데 이게 드래곤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데라와 똑 닮은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네는 이게 자연 발생적일 거라 생각하나?”

나는 두 개의 데라를 모두 경험했기에, 이것이 단지 가설이 아닌 진실임을 알고 있다.

확실히 자연 발생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나와 함께 연구를 진행 중인 동료들 모두 이것이 드래곤이 부려 낸 조화라고 생각하네. 물론 드래곤이 창조주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단지 우리의 데라를 바탕으로 가짜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뿐이니까.”

“무슨 목적으로 말입니까?”

“그건 내가 드래곤을 만나게 된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군.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말이야. 자! 그럼 돌고 돌아 자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주지. 드래곤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는가? 드래곤은 어비스 어딘가에 있다는 게 우리 연구팀의 결론이네.”

그건 확실하다.

붉은 마녀도 그렇게 대답했으니까.

“이 세상 곳곳에는 백여 개의 어비스 구슬이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

28층의 미션에는 시간제한이 있으니 말이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우리 가문이 가진 것 중엔 없다네.”

“그럼, 도대체 어디에…….”

“미안하지만, 그것 역시 아직은 오리무중일세. 적어도 세상에 알려진 어비스 구슬 중에서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까.”

뭔가 이상하다.

지금 듀퐁이 내게 준 단서. 대단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끝이라면, 3주가량 남은 제한 시간으로는 절대 28층을 클리어할 수 없다.

차라리 연계 퀘스트 형식으로 새로운 미션을 주었으면 모를까, 아무 것도 없는 지금 이 상황은 너무 막막해진 것이다.

‘차라리 밀레티노 가문이 보유한 어비스 구슬을 꼼꼼하게 공략해 보는 것이 나을지도.’

정말로 더 이상의 단서가 없다면 이것이 가장 확률 높은 방법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붉은 마녀의 성도 샅샅이 뒤져 볼 걸 그랬다.

“가주님께서는 총 열한 개의 어비스 구슬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두 한 번 이상씩은 공략이 진행된 것입니까?”

“물론일세.”

“그럼,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어비스는…….”

“자네의 실망한 표정을 보니 미안해지지만, 내가 알기론 없다네.”

“그렇군요.”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듀퐁에게 간청해서, 내일부터 열한 개의 어비스를 차례로 들어가 보는 것.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 내야만 한다.

“의심이 가는 건 아니지만, 아주 이상한 어비스가 하나 있긴 하다네.”

“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는 아니지. 하나이면서 일곱 개이기도 하니까.”

“자세히 들어 보고 싶습니다.”

“어비스 구슬은 하나가 아닌, 동시에 여러 개를 던지더라도 포털을 생성해 낸다네. 복수의 구슬이 합쳐져 기묘한 어비스의 세상을 만들어 내곤 하지.”

“그렇다면…….”

“일곱 개를 동시에 던졌을 때 생성되는 어비스가 가장 이상했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일곱 개의 구슬.

드래곤볼을 연상한 내가 이상한 걸까?

- 18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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