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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87화 (187/292)

187화

“네놈들, 한패 맞지?”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붉은 마녀는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작은 체구에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은 실로 대단해서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공손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한패.”

“네놈에게 물은 것이 아니다.”

붉은 마녀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요한을 가리켰다.

“네놈에게서 비슷한 냄새가 난다. 넌 그 오줌싸개의 핏줄인 것이냐?”

마녀의 권능은 실로 놀라웠다.

전혀 닮지도 않은 두 사람이 서로 형제임을 바로 알아보다니.

“오줌싸개인지는 모르겠지만, 4년 전 이곳을 방문한 것은 저희 형님이 맞습니다.”

요한은 붉은 마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형보다는 훨씬 어엿한 아우로군. 그 녀석은 날 보자마자, 오줌을 잔뜩 지렸는데 말이야.”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소문? 나 이거 진짜 어이가 없어서.”

붉은 마녀는 짜증 한가득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아귀에는 웬 물건 하나가 나타났다.

투명한 비닐봉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너무 황당해서 4년 동안 버리지도 않고, 보관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뭡니까?”

“신성한 나의 땅에 네 얼간이 형제가 벗어 놓고 간……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도 없는 것.”

팬티였다.

“저희 가문의 문양이 박혀 있는 것 같군요.”

“가져가라.”

“이걸 말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네 녀석의 형에게 내 말을 똑똑히 전하도록 하여라. 사흘 안에 내게 와서 무릎을 꿇고 빌지 않는다면, 향후 나의 땅에 들어오는 모든 인간을 내 손으로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말이다.”

그 순간, 마녀의 주변에는 붉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그녀는 진심으로 경고를 하고 있었다.

“전하겠습니다.”

요한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의연하게 답했다.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다음은 너!”

마녀가 다음으로 가리킨 것은 바로 나였다.

내게 어떤 식으로든 접근할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라고, 이 어비스에 들어오자마자 나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니까.

마녀는 나를 아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의 모습이 흥미롭다.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아담한 체구의 마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 순간만큼은 마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저 정수리를 쓰다듬기라도 한다면 큰일 나겠지만.

“말씀하시죠.”

“네놈에게선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네 뒤에 있는 여자랑 함께 말이야.”

또 한 번 놀랐다.

마녀는 나와 신주아가 데라 대륙의 원주민이 아닌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따라서 괜히 발뺌하는 것은 곤란한 일.

“잘 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미난 물건들을 지니고 있더군. 인간 주제에 하늘을 날다니.”

“꽤 재밌게 보실 만한 능력도 있습니다.”

“너무 자신만만한 건 재수 없다.”

“지린 팬티를 버리고 튀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마녀는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저 마음을 읽을 순 없지만, 적어도 불호보단 호에 가깝다.

“네가 말한 재밌는 능력으로 미션을 해결한다면 선물 하나를 주지.”

역시. 호가 맞다.

“감사합니다.”

“아직 주지도 않았는데?”

“곧 주실 거니까요. 좋은 걸로.”

사실, 선물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고 내가 원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기습적으로 질문이나 해 보자.

“드래곤은 어디 있습니까?”

“감춰진 어떤 어비스에.”

“그게 어디죠?”

“미친놈. 빌드업도 없이 이렇게 뜬금없이 물어보는 건 뭐냐?”

그래도 대답해 줬으면서.

휘이이이잉-

마녀의 주변에는 돌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래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아쉽지만 마녀와는 여기까지인 듯하다.

* * *

“다리가 후들거리는 줄 알았습니다. 부단장은 괜찮았습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요한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의연했다.

상대의 멘탈을 흔들어 놓는 마녀의 권능, 그녀는 분명 요한을 거세게 위협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녀는 요한이 자멜의 핏줄인 것을 알고는 또다시 장난을 쳐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저도 뭐 조금 겁나기는 했습니다. 누구처럼 지리지는 않았지만요.”

“이걸 형님에게 전해 줘야 한다니, 참으로 난감하군요.”

요한은 손에 든 투명 봉지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곤란하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부단장.”

살다 살다 인벤토리에 이런 걸 다 넣게 된다.

마녀가 사라진 뒤, 우리는 붉은 숲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전과 전략은 동일했다.

최전방은 신주아와 니엘,

중앙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일곱 명의 병사가 맡았고,

최후방엔 내가 서서 모두를 엄호했다.

미리 손발을 맞춰 본 것은 아니지만, 실전에서 다듬어지는 조직력이 상당히 쓸 만했다.

휘이이잉!

끼에에엑!

신주아의 도끼질에 붉은 털 성성이의 몸체는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사모님! 대단하십니다!”

“사모님도 부단장님 못지않으시군요!”

병사들은 나보다 신주아에게 더 감명을 받는 모양이다.

하긴, 저런 외모로 도끼질을 해 대는 건 내가 봐도 신기하니까.

그녀는 탑에서도 돋보이는 플레이어이니 이 정도 활약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고, 요한을 비롯한 모두가 150퍼센트 이상의 힘을 내주었다.

덕분에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원기옥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터뜨릴 생각이다.

‘붉은 마녀가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은 그리 늦지 않게 찾아왔다.

붉은 숲의 보스 몬스터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온몸에 붉은 털이 무성한 성성이 타입의 몬스터로 다른 몬스터들과 특징은 비슷하지만, 그 크기만큼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냥 킹콩 그 자체네.’

오우거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몸체.

하지만 상위종 몬스터인 오우거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이 녀석은 엄청난 포스로 우리를 위협해 왔다.

크아아아아!

쾅!

녀석이 발을 구를 때마다 지면이 흔들린다.

“흩어져!”

요한의 외침에 우리는 처음으로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규격 외의 괴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이제야 제대로 긴장들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건 비단 보스뿐만이 아니다.

등장이 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조무래기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며 우리들을 공격해 댔고, 줄곧 안정적이었던 양상에는 균열이 생겨났다.

‘쉬울 리가 없지.’

지금까지의 무난함이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던 일.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 준 요한의 병사들이었지만, 보스를 만나고 나선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보스의 한 마리의 등장이 큰 변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덩치가 덩치인 만큼 날쌔지는 않아도 스치면 최소 중상일 테니까.

‘확실히 열 명 남짓으로 공략할 몬스터는 아니긴 하네.’

4년 전, 자멜은 백 육십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의 희생자는 전사한 숫자만 백이십.

최정예를 모두 잃고 나서야 자멜은 붉은 마녀의 미션을 겨우 클리어했다고 전해진다.

“단장님, 지금부터 보스 녀석은 저 혼자 상대하겠습니다.”

“부단장! 그건 너무…….”

어차피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저 무지막지한 괴물에 타격을 거의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후방에서 힘을 많이 비축해 두었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테이아의 날개를 펼쳐 냈다.

저 보스 녀석과 키 높이를 맞추기 위함.

이 붉은 숲은 여전히 수많은 몬스터로 들끓는 곳이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한다.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에선 다른 병사들이 위험할 테니까.

드디어 차원의 틈새에 받은 선물을 제대로 써 볼 만한 상대를 만났다.

완연한 경지의 허공답보.

이제는 공중에서도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검술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며 내 검술은 더욱더 자유로워졌다.

타아아앙!

그래도 선방은 총으로 갈겨야 제맛.

미간에 탄환 한 발을 얻어맞은 녀석은 발광을 하며 내게 뛰어들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으으윽!

엘리시온이 춤을 추며, 수라마혈검의 한층 높아진 경지를 뽐내기 시작한다.

괴물의 몸에는 빨간 선들이 빠르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괴로운 신음성이 붉은 숲 전체에 진동한다.

녀석은 분노의 주먹질을 허공에 뿌려 댔다.

가공할 마나가 둘러진 저 주먹을 보고 있으니, 김세용의 스킬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나 역시 엘리시온에 마나를 한가득 실었다.

저런 큰 공격 속엔 언제나 빈틈이 생기기 마련.

‘붉은 마녀, 보고 있나?’

휘잉!

엘리시온이 수직으로 거대한 선분을 긋자,

쩌어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보스의 몸이 수직이등분 되어 버렸다.

‘아름답다.’

내 검술에 스스로 도취되어 보는 건 오랜만의 일.

분명 붉은 마녀도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붉은 정수를 획득하였습니다.]

* * *

“부단장님, 마지막에 그 검술은 무엇이었습니까?”

“수라마혈검이다.”

“수라마혈검!”

“왜? 배우고 싶으냐?”

“배우고 싶습니다. 부단장님!”

“그럼, 조건이 있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단장님과 종신 계약을 맺어라. 그럼 수라마혈검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따르겠습니다.”

그동안 요한의 밑에서 뺀질대긴 했지만, 이들 모두 검을 추종하는 무사들.

수라마혈검의 정수를 보고도 감명을 받지 않았다면 검사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들로서는 종신 계약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요한은 자격 시험을 통과했으며, 밀레티노 가문은 언제나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는 곳.

거기에 부단장을 맡고 있는 나라는 존재와 수라마혈검에 대한 약속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이곳을 곧 떠날 예정이지만 말이다.

“사기꾼!”

“뭐?”

니엘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내게 따지고 들었다.

“수라마혈검은 특별한 체질을 지녀야 익힐 수 있는 검술이라면서요!”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그런데 나 말고도 여기 다른 병사들에게도 가르쳐 주겠다고요?”

“샘이 나서 그러는 거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건 신뢰의 문제라고요.”

그건 내가 자연스럽게 요한의 종자가 되기 위해 했던 거짓말.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니엘아, 분명 넌 수라마혈검의 아주 높은 경지까지 오르게 될 거야. 어쩌면 나보다도 더.”

“정말요?”

참 단순한 녀석.

그래서 구슬리기도 쉽다.

“그래. 넌 특별한 체질을 타고났으니까.”

체질이 아닌 천재적 재능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먼 훗날, 니엘은 요한의 세력을 대륙 최강으로 이끌어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시나리오는 여기 있는 일곱 병사들이 요한의 초기 공신(功臣)이 되는 것.

각본은 나왔으니 스토리가 제대로 굴러가길 바랄 뿐이다.

“자,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갈 포털을 만들 때입니다.”

나는 요한에게 붉은 정수를 건넸다.

“이호영 부단장…….”

하지만, 요한은 나를 불러 놓고도 말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지금 그가 어떤 마음인지.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나를 보며 끄덕였다.

휘이익!

요한이 허공을 향하여 붉은 정수를 던지자, 시공간이 뒤틀리며 붉은빛 영롱한 포털이 생겨났다.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고맙습니다. 모두들.”

궁금하다.

바깥의 사람들은 이 포털을 통해 등장하는 우리들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 18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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