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생일 축하한다. 요한.”
“성년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막내 공자님.”
아침부터 요한의 옆을 지키며 숱한 축하 인사를 들었다.
오늘은 그의 열여덟 번째 생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년식을 위해 밀레티노의 저택을 방문하였으며, 요한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맞이하고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오는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 일대에 밀레티노 가문이 떨치고 있는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오늘에서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단장님, 벌써부터 피곤해 보이십니다.”
“계속 억지웃음을 짓느라 안면 근육이 마비될 지경이군요, 이호영 부단장.”
그럴 만도 했다.
모든 이들이 요한에게 건네는 축하한다는 그 말. 사실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선을 요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로선 오늘만큼 불편한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성년식이 아닌, 그 이후에 있을 후계자 자격 시험.
이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참으로 잔인한 생일이 될 뻔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말이다.
“어이, 요한! 생일 축하한다.”
기분 나쁜 음성이 내 귀를 찔러 왔다.
이번에 들린 축하 인사는 단순한 겉치레 정도가 아니다.
노골적인 비웃음과 적대감이 느껴졌다.
음성의 주인공은 듀퐁의 셋째 아들, 자멜이었다.
‘이놈이었군.’
내게 자객을 보냈던 삼공자.
녀석은 듣던 대로 야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한, 뒤룩뒤룩 살이 잔뜩 오른 것이 무예를 익힌 몸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형님?”
자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형님은 형님이지. 아직까진 너도 아버지의 자식이니까 말이야. 크크크.”
자멜은 계속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하나는 자멜에게서 형편없는 기감이 느껴진다는 것.
단순히 몸뚱이만 비루한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마나의 양이 너무 미약해 보였다.
듀퐁에게 이런 아들이 있다는 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쓰레기 같은 몸을 가지고도, 여전히 후계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미 자격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인데, 그의 외척이 얼마나 많은 재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이 한 가지 대목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외조부가 대륙 최고의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더니만, 돈지랄을 제대로 한 것이로군.’
자멜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명의 호위에게선 확실히 범상치 않은 기도가 느껴졌다.
“아참, 옆에 있는 이 녀석이 그놈인가?”
“네, 제가 그놈 맞습니다. 삼공자님.”
나는 자멜을 보며 슬며시 썩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보낸 자객들이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워낙 많은 사병들을 보유하고 있다 보니, 이 정도의 전력 이탈은 별 대수롭지도 않은 모양.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의아하긴 하겠지만, 녀석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 같은 놈이야, 자격 시험이 끝난 이후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날 밤, 자객으로 온 녀석으로부터 아주 재밌는 정보를 하나 얻었다.
삼공자 이 녀석을 골탕 먹일 수 있는 고급 정보.
“여행객이라고 들었는데, 성년식을 얼마 안 남긴 요한의 밑으로 들어간다? 아주 재밌는 놈이야. 크크크.”
“제가 진짜 재밌는 얘길 하나 알고 있는데, 삼공자님께 들려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양할게. 격 떨어지는 것들과 말 섞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렇습니까?”
자멜은 나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요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건투를 빈다. 요한. 쉽지는 않겠지만. 크크크크.”
녀석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요한은 이런 비아냥거림에 익숙한 것인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인데, 나는 그런 요한의 모습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기분 나쁘지 않으십니까? 단장님?”
“제가 기분 나쁘다면 달려가 한 대 때리기라도 하시게요?”
“오늘의 모든 행사가 끝나기 전에 묵직하게 한 대 때릴 생각이긴 합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농담이시죠?”
“진짭니다.”
“에이, 설마요.”
단순히 요한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녀석은 나에게 두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으니, 대가는 치르게 할 생각이다.
물론 주먹으로 때릴 생각은 없다.
나에게는 주먹보다 훨씬 더 아픈 팩트라는 무기가 있으니까.
* * *
성년식 내내 듀퐁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성년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표하는 자리이지만, 오늘의 일정은 그에게도 잔인한 자리였다.
아무리 그가 일가 전체를 이끄는 가주라 해도,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법도와 전통 앞에서 듀퐁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가주는 본인의 아들이 성년에 이를 때까지 직접적으로 세력 형성에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제약. 그 결과 지금 요한의 뒤에 자리한 것은 나를 포함한 열 명의 사병들뿐이었다.
참 웃기는 전통이다.
가주에게 공평성을 강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라고는 하나, 이 때문에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외척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요한과 우리를 얼마나 초라하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이 초라한 숫자로 요한이 시험을 통과하리라 믿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의 과제를 결정하는 순간이 되었다.
“요한 밀레티노는 하나의 구슬을 뽑도록 하여라.”
상자 안에 들어있는 총 열한 개의 구슬.
이 구슬 하나하나가 가진 신비에 대해서는 요한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다.
통칭 [어비스]라 불리는 물건.
데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백 개가 되지 않으며, 그중 열한 개가 밀레티노 가문의 소유라고 한다.
그리고 밀레티노家에서 [어비스]의 봉인을 해제하는 유일한 시기는 바로 공자들의 성년식이다.
“뽑았습니다.”
요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장내에는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구슬은 영롱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 마녀의 성이로군.”
듀퐁은 요한에게서 구슬을 받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하하! 우리 막내가 저의 뒤를 따르려는 모양인데요?”
경망한 웃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선 것은 삼공자 자멜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자멜 녀석도 붉은 마녀의 성을 뽑았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하여 후계자의 지위를 계속하여 유지하고 있는 것.
“자멜아, 경험이 있는 네가 직접 막내를 위해 조언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버님, 조언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가문의 자격 시험만큼 공평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막내가 지난 18년을 헛살지 않았다면 충분히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니 막내야?”
자멜 녀석은 이런 말을 아주 뻔뻔하게도 하고 있었다.
요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하하. 우리 막내가 아주 자신이 있나 봅니다! 형으로서 저도 큰 기대가 됩니다!”
자멜의 경박스러움에 듀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눈치 없는 자멜은 여전히 실실대고 있었기에, 결국 내가 나섰다.
“저희 막내 공자께서는 반드시 성공하실 겁니다. 두 가지 목표 모두 말입니다.”
“두 가지 목표?”
자멜이 내 말에 의문을 표했다.
“네. 하나는 어비스에 들어가 시험을 통과하는 것.”
“그리고 또 뭐가 있다는 거지?”
“삼공자님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일 말입니다. 4년 전에 잠깐 돌았던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관한.”
“너 이 새끼!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또 끄집어내?”
“네. 저 역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밀레티노 가문의 삼공자께서 붉은 마녀를 보자마자 바지에 오줌을 지릴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헛소문이죠.”
내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자, 자멜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며칠 전, 자객 녀석으로부터 얻은 정보.
그 녀석은 자멜이 지리는 모습을 코앞에서 생생히 보았다고 내게 전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것이었다.
내게 그 사실을 털어놓으며, 녀석은 안식을 얻은 표정을 짓기도 했으니까.
“그것은 당연히 헛소문이다! 한 번만 더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내 본 공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놈이 있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삼공자님. 저는 그럴 의도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지만,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멜의 목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요한이 ‘붉은 마녀의 성’을 뽑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지, 니케야?’
나는 손가락에 끼워진 니케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 내겐 두 가지의 목표가 있다.
하나는 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요한이 시험에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붉은 마녀를 직접 만나 진실을 재확인해 보는 것이다.
4년 전, 헛소문으로 일단락되었던 그 사건의 진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도록.
자멜에게는 아주 잔인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나를 왜 괜히 건드려서.
* * *
듀퐁이 손에 든 구슬을 힘껏 던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앞에 만들어진 거대한 포털.
이 안에 펼쳐진 세상이 바로 ‘붉은 마녀의 성’이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포털을 생성할 수 있는 건…….’
최소, 사부나 혈마 정도의 경지에 오른 존재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이 구슬이란 매개체에 그 힘을 담았다는 것은 더욱 고난도의 경지.
이 어비스란 신비의 물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겐 개연성 있는 가설이 하나가 떠올랐다.
‘드래곤!’
28층의 최종 목표는 드래곤의 서식지를 찾아내, 드래곤의 부화를 저지하는 것.
어쩌면 이 어비스의 신비가 드래곤과 맞닿아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일단은 들어가서 시험부터 통과하는 것이 우선.
“잘 다녀오너라. 요한아.”
“네. 아버님.”
“그리고 잘 부탁하네, 이호영 부단장.”
듀퐁은 요한에 이어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거친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온기가 남아 있다.
고아인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랑,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막연히 알 수 있었기에 문득 요한이 부러워졌다.
요한을 선두로 우리 열 명은 포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지며, 전혀 다른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붉은 마녀의 성에 입장하였습니다.]
[붉은 마녀가 도전자들에게 시험 과제 하나를 내립니다.]
[붉은 숲의 정수를 획득하십시오.]
[남은 시간: 8시간]
‘이상한데?’
어비스의 미션 내용은 계속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미션.
자멜의 자객이 내게 말해 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번 어비스에 한해선, 굳이 공략집이 필요 없을 것도 같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이변이 없다면, 붉은 마녀도 만날 수 있겠지.’
일단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마녀에게 내 존재감부터 각인시켜 줘야겠다.
“단장님, 이곳의 지형 전체를 파악해 볼까 합니다.”
“어떻게 말이오? 이호영 부단장?”
내가 테이아의 날개를 펴자,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여기서 굳이 내 능력을 숨길 이유는 없다.
아직 보여 주지 못한 진면목을 발휘할 시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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