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모두 세 명이군.’
무슨 의도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수상한 기운 셋이 느껴졌다.
높은 확률로 요한의 형제들이 보낸 자들일 것이다.
내가 종자로 가세하자마자 이렇게 반응이 바로 오다니, 그동안 요한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고 살았을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택 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기에, 일단 이곳을 벗어나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발길을 돌린 곳은 처음 듀퐁을 만났던 야산.
‘역시!’
예상대로 그 세 명은 은밀하게 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히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추격을 허용해 주었다.
물론 그들보다 더욱 은밀하게.
녀석들이 더 많은 꼬리를 달고 오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허술함을 드러내 주었다.
결국 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야산의 정상.
이곳에서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잠시 후 살기를 띤 세 명의 인영이 나를 포위해 오며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좋은 밤이지?”
세 명의 복면인은 칼을 뽑으며 대답했다.
“그래. 죽기에 딱 좋은 밤이야.”
딱 좋은 밤.
줄여서 딱밤.
뭔가 개드립이 떠오를 것도 같은데 분위기상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런데 네놈, 설마 우리를 여기로 유인한 거야?”
“어. 맞아.”
내가 사실을 밝히자 녀석들은 코웃음을 쳤다.
“명을 재촉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야? 그냥 조용히 별채에 처박혀 있었으면 며칠 동안은 감시나 받으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뭐, 덕분에 우리는 빨리 일을 끝낼 수 있게 된 거지만. 크크크.”
“나한테 고마우면 한 가지만 알려 줘. 누가 너희들을 보냈는지.”
“어차피 죽을 놈이 그게 왜 궁금해!”
역시 알려 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어차피 알아낼 방법은 많이 있으니 상관은 없다.
족쳐서 고문을 하든가, 아니면 협박을 하든가, 운이 좋다면 마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와의 간격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저승 가는 길이 허전하진 않을 거야. 기회가 되는 대로 네놈 마누라도 함께 보내 줄 테니깐. 외모가 반반하다고 들었는데 아주 기대가 돼. 크크크크.”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었다.
“뭐라고?”
“지금 내 마누라가 여기에 없어서 말이야.”
신주아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호러물을 또 한 번 찍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음탕함을 절대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도적 떼들의 두개골을 쪼개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그나저나, 네 놈들에게 하나만 물어보자.”
“이제 곧 죽을 놈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산을 오르는 내내 궁금했어. 요한의 형제가 보낸 자객 나부랭이인 건 알겠는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나 때문에 요한이 시험에 통과할 거라 염려하는 것도 아니잖아?”
“네놈이 죽는 이유, 그게 궁금해?”
복면인 중 한 녀석은 칼을 휘두르기 직전에, 야비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건, 네놈이 그 분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야.”
스으으으윽-
녀석이 휘두른 검이 허공에 사선을 긋는다.
이걸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장면을 떠올렸겠지만, 나는 녀석에게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 주었다.
나의 엘리시온은 달밤에 가느다란 빛을 뿌리며, 방금 날 공격한 녀석의 팔과 몸통을 분리해 버렸다.
“허업!”
“그렇게 비명을 지르면 곤란하지 않겠어? 여긴 가주님도 자주 오시는 곳인데.”
캥!
그리고 녀석들의 눈앞엔 갑자기 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캥수야. 3대 1인데 가능하지?”
캥!
캥수는 두 주먹을 빙빙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 괴물은 뭐야!”
녀석들은 이미 멘붕 상태.
캥수에게 두들겨 맞다 보면, 한 놈 정도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지도 모른다.
퍼어어억-
이 정도 나부랭이를 상대로 3대 1의 제약은 캥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퍼어어억-
퍼어어억-
“누가 너희들을 보냈는지 말하면, 선착순으로 딱 한 놈만 살려 준다.”
물론 곱게 살려 주진 않을 것이다.
평생 밀레티노家 쪽으로는 얼씬도 못 하도록 트라우마를 남겨 줄 생각.
“사…… 삼공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정말입니다!”
결국 한 놈이 불고야 말았다.
이 말이 진실인지는 검증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좀 더 캐 봐야겠다.
배후가 누구인지도 불었는데, 다른 얘기들을 못 불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 * *
“늦으셨네요. 아저씨.”
내가 요한의 종자가 되기로 한 이후, 니엘은 바로 나를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도 열 살이 넘게 나고, 어쩌다 유부남 행세까지 하고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호칭이었다.
“어, 파리 좀 잡느라고.”
“참나! 지각한 핑계를 댄다는 게 파리요? 이 한겨울에요?”
“됐고, 수련이나 하자. 검이나 들어 봐.”
“흐음!”
니엘은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왜?”
“뭔가 수상해서요.”
“뭐가? 내가 검을 가르쳐 준다는 게?”
“아무리 봐도 우리 둘은 닮은 구석이 없는 거 같은걸요?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내가 아저씨와 닮은 체질을 지녀서 검을 가르쳐 주는 거라고.”
참, 쓸데없이 의심이 많은 소녀다.
쓸데없이 예리해서 더 문제고.
“내가 닮았다면 닮은 거야. 왜? 배우기 싫어?”
“아니요. 배우긴 할 거예요. 내가 강해져야 우리 도련님을 옆에서 지킬 수 있으니까.”
“배우고 싶은 이유가 단지 그거라고? 너 자신이 아닌 막내 공자님을 위해서?”
“그분은 저의 주인이시니까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열두 살 때부터 검을 잡았어요.”
“그럼, 검은 누구에게 배웠니?”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은 익힐 수 없으니, 사병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어깨너머로 훔치곤 했죠. 뭐, 여러 사람들 것을 훔치다 보니 다양한 검술을 구사할 수는 있게 됐네요.”
놀랍다.
세상에는 정말 이런 천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고금제일의 천재라고 자부하던 사부가 이 정도쯤 되었던 것 같다.
그도 어린 시절 천마신교에서 이런 식으로 무공을 훔쳐 배웠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 것이란 걸 니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소녀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아저씨, 저희 도련님. 정말로 이번 자격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불안하니?”
“네. 아저씨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사실 도련님이 보유하고 있는 전력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이미 강하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지금 아저씨 말은 너무 허풍 아닌가요?”
“그냥 믿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날 믿고 배우는 것밖에 없으니까.”
“네.”
“그럼, 이제 수련을 시작하자.”
내게는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오늘 밤 정말 밀도 있는 수업을 진행했다.
니엘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내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쭉쭉 흡수해 나갔다.
믿기지 않지만, 오늘 나는 천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을 혈마가 보고 있다면, 본인이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통탄할 것이다.
내가 니엘에게 수라마혈검을 가르치기로 한 것.
어쩌면 28층의 세상에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그걸 다 보지 못한 채 떠나게 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아저씨!”
“왜?”
“어쩌면, 아저씨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이 검술은 아저씨처럼 특이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만 익힐 수 있는 거라고 했잖아요. 저도 정말 아저씨와 같은 체질인가 봐요! 뭐랄까 손끝에 촤악 하고 감기는 느낌?”
“……어.”
첫날이라 기초 부분만 가르치긴 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난해한 수라마혈검이 손에 감긴다니, 이 녀석의 재능은 뭔가 비현실적일 정도다.
사부가 말한 고금제일의 재능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니엘아. 너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아저씨.”
“먼 훗날 네가 누군가에게 이 검술을 전해 주는 날이 오거든, 너의 제자가 한 번에 깨우치지 못하는 걸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그런 제자를 두고 쓰레기니 뭐니 하는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쓰레기요?”
“그래.”
“그거, 제가 답답하면 자주 쓰는 말인데.”
“……그러니?”
이건 뭐 천재들만의 종특도 아니고.
아무래도 니엘에게는 언어 예절 교육도 병행해야 할 것 같다.
* * *
문을 열고 들어오니 방 안은 컴컴했다.
먼저 잔다더니, 신주아는 정말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신주아가 침대의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
‘얜 뭐지?’
첫날밤엔 날 그렇게 경계하더니만.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우려 하는데 자리가 살짝 좁다.
신주아를 살짝 옆으로 밀어내려 발을 뻗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설마 깨 있는 거야?’
호흡이 살짝 불안정한 것이 자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
역시 대답은 없었다.
분명 깨어 있는 거 같긴 한데.
이런 건 바로 확인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지라, 바로 내 머리카락 하나를 뽑았다.
어두운 밤이지만, 내 절대 감각은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만 있어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코를 살짝 간지럽혀 보았다.
“읍!”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오는 사운드.
자고 있다고 하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무언가를 간신히 참고 있을 때 나오는 그런 느낌.
머리카락을 좀 더 간질간질 흔들어 보니,
“크흡!”
좀 더 큰 사운드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은 이불을 꼬옥 움켜쥐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기에 충분했다.
다시 머리카락을 가져 대려고 하니, 그녀는 자세를 휙 돌리고 말았다.
아무리 민첩 스탯이 높다고 해도 자고 있는 도중에 이런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말이 안 된다.
“뭐야, 안 자네.”
“음냐,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음냐 라니.
신주아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는데.
“안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자고 있었습니다.”
“자고 있던 사람치곤 갑자기 말투가 너무 말짱한데?”
“원래 이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러게.”
“자고 있던 거 맞습니다.”
그러면서 신주아는 슬글슬금 몸을 침대 끝으로 움직였다.
“수업은 잘하고 오셨습니까?”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는 것까지 완벽하다.
“어.”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자 볼까 합니다.”
“어.”
황당한 녀석이다.
말투만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의 흐름도 종잡을 수가 없다.
“내일 이불 하나만 더 넣어 달라고 할까? 침대야 그렇다 쳐도 한 이불 덮고 자는 건 너무 불편하잖아.”
“부부 행세를 하고 있으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부부라고 속인 것은 당신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러면서 신주아는 이불을 본인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오늘 밤도 왠지 영역 다툼이 치열할 것만 같은 느낌.
어쨌든 그녀는 정말로 잠을 청하는 모습이었다.
‘자객 얘기는 내일 일어나면 해 주는 게 낫겠지?’
잠자리에 괜히 생각 복잡하게 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신주아. 밤에는 절대 혼자 화장실에 가지 마라.”
“네. 깨우겠습니다.”
내일은 요한의 자격 시험을 대비할 수 있는 마지막 하루.
요한이 보유하고 있다는 몇 안 되는 사병들을 좀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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