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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81화 (181/292)

181화

다음 날 아침.

아늑하고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좋아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게으름을 피우는 건 곤란한 일이다.

우리는 밀레티노의 저택에 놀러 온 것이 아니니까.

잠에서 깨어 방 안을 둘러보니, 신주아는 창문 앞 의자에 앉자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언제 일어난 거야?”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것 같습니다.”

“잘 잤다고?”

“네.”

이유 모를 거짓말이다.

새벽 내내 신주아가 뒤척이는 통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났는지 모른다.

나는 곧바로 다시 잠들긴 했지만. 신주아가 잠을 설쳤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식사는 어떻게 할 거야?”

“하인들이 별채로 식사를 준비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이야기해 놓을까요?”

“말투만 보면 네가 꼭 하녀 같아.”

“착각이십니다. 말투만 이럴 뿐이지 저는 자존감이 아주 높은 사람입니다.”

“어쨌든 넌 말투가 문제야. 심지어 우리는 한 침대에서 하룻밤도 보낸 사이인데, 말투가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굳이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간밤에 꼭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잖아.”

“비밀 지켜 주실 거라 믿습니다.”

“예언가의 촉으로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비밀을 지켜 줄 거 같아?”

“이렇게 유치하게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식사 부탁이나 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신주아는 바로 방을 나가 버렸다.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예언자 신주아의 직감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를.

* * *

요한의 거처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별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저택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생각하면, 요한은 매우 단출한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별채 정도 크기의 건물과 앞마당에 있는 조그마한 연무장. 그것이 요한이 밀레티노 가문에서 받은 전부였다.

물론 그조차도 이틀 후에 있을 승계자 자격 시험에서 탈락한다면 모두 잃어버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호영 씨, 저기.”

“어. 저 녀석이 아마도 요한이겠지.”

이제 곧 본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청년.

이른 아침이었지만, 요한은 연무장에 나와 있었으며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만약 요한이 모든 걸 포기한 채 빈둥대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를 돕는 일에 맥이 빠질 뻔했는데, 다행히 요한은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리고 연무장으로 어떤 한 소녀가 검을 들고 올라온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로 짐작해 보건대, 소녀는 요한의 시종인 듯했다.

‘어려 보이는데, 열여섯쯤 되려나?’

두 사람은 이제 막 대련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나와 신주아는 잠시 말없이 두 사람이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요한의 수준이 궁금했고,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몇 분 동안 감상해 본 소감은 놀라웠다.

‘생각보다 훌륭하네.’

밀레티노의 검술은 초식 하나하나가 춤사위를 연상시킬 만큼 세련된 맛이 있었다.

검술 시전자의 수준이 다소 아쉬웠지만, 검술 자체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더 놀라웠던 점은 요한과 대련을 펼친 소녀의 수준.

그녀가 펼친 것은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보다는 다소 근본이 없어 보였지만, 조금 더 완성도가 높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여종이 한 수 위!’

두 사람의 대련 양상은 맞수인 듯했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소녀가 요한의 검술에 맞춰 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요한도 그걸 알고 있는 듯했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상황이 좀 더 괜찮다.

최악의 상황에는 나와 신주아 둘이서 승계자 자격 시험을 하드 캐리 해야 하는 경우까지도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우군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도 꽤 괜찮은 수준으로.

“도련님, 저희의 대련 장면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저들은 기척을 숨길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것 역시 긍정적인 부분.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실망할 뻔했다.

나와 신주아는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엿볼 의도는 아니었으니 오해하진 마십시오.”

내 말에 강한 경계심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요한의 여종이었다.

“도련님, 수상한 자들입니다! 바로 잡아서 족쳐 보겠습니다.”

“니엘! 또 경거망동!”

요한의 질책에 그의 시종 니엘은 입을 살짝 삐죽였다.

일반적인 주종 관계의 느낌이 들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제가 아는 얼굴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신원을 밝혀 주시지요?”

요한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저희 부부는 로자스 지방에서 온 여행객입니다. 가주님의 은혜로 하룻밤 묵어 가게 되었는데, 아침부터 무례를 범한 것 같군요.”

“아버님의 손님들이셨군요! 인사드리겠습니다. 밀레티노가의 아홉째 요한이라고 합니다.”

천민의 피가 섞였다고는 하나, 명문가의 자제답게 요한에게선 예절과 기품이 느껴졌다.

“막내 공자님이셨군요. 본의 아니게 공자님의 수련 장면을 엿본 것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무례를 범한 것은 저희 쪽인 거 같군요. 뭐해 니엘! 두 분께 사과드리지 않고!”

“도련님! 이자들은 가주님의 정식 손님이라기보단 그냥 여행객일 뿐입니다.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실 필요가 없다고요!”

“니엘!”

“피!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르신 도련님 얼굴에 제가 제대로 똥칠을 한 것이로군요!”

니엘은 또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그 모습이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이마를 짚었다.

철딱서니 없는 막내 여동생을 보는 눈빛이다.

“그럼 이제 두 분은 가던 길마저 가시지요? 지금 저희 도련님껜 일분일초가 너무 소중해서 말입니다!”

니엘이란 여종은 나이도 어린 것이 말투가 아주 앙칼졌다.

“소문에, 곧 승계자 자격 시험을 치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네! 게다가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이렇게 여행객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너무 아깝단 말입니다!”

“니엘!”

요한의 호통에 다시 니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이제는 슬슬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도련님의 대련 상대가 잠시 되어 볼 수 있겠습니까? 비루한 솜씨지만 저 역시 검을 다루는 무인인지라, 도련님의 시간을 마냥 낭비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봐요.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도련님!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제가 막겠습니다! 아무리 호통치셔도 안 됩니다! 어디 감히 여행객 주제에 우리 막내 도련님과 검을 섞을 생각을!”

니엘은 내게 다가와 불쾌한 심기를 한껏 드러냈다.

성격이 좀 지랄 맞은 것이 거슬리긴 하지만, 요한의 호위무사로서는 제격.

게다가 이 어린 나이에 완성도 높은 검술을 구사한다는 것만 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검술 수업도 받지 못했을 텐데.’

예정에 없던 계획 하나가 생겨 버렸다.

나와 신주아는 이곳 세상에 계속 머무를 수 없는 처지이니, 우리가 떠난 이후의 뒷감당을 이 여종에게 맡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가르치기엔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대략적인 뼈대만 만들어 놓는다면 그 나머지는 알아서 잘 해낼지도 모른다.

“제가 막내 공자님께 대련을 제안한 것은, 공자님께서 낯선 검술을 경험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격 시험이 어떤 형식으로 치러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양한 검술을 경험해 보는 것은 무인에게 중요한 일이니 말입니다.”

“이봐요. 손님. 아무리 손님 말이 맞다 해도, 수준 이하의 검술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라고요. 괜히 저희 도련님 심란하게 하지 마시고…….”

“방금, 수준 이하라고 했습니까?”

꼬투리를 잡았으니, 명분은 만들어졌다.

“그거야 뭐,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이 워낙 훌륭한 것이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검사로서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주는 말이군요. 나와 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 신청이란 대목에서 신주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오그라드는 대사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 뜻을 단도직입적으로 전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는 생각이다.

“도련님! 지금 만약 이 결투 신청에서 물러선다면, 밀레티노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일이란 거 아시죠?”

니엘의 말에 요한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승낙을 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나를 배려한 결정이다.

대결이 결정되자 신주아는 내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꼬마, 버릇을 고쳐 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믿겠습니다.”

신주아 딴에는 니엘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와 니엘은 곧바로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도련님의 뜻에 따라 위험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당찬 니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낡은 장검 하나를 꺼내었다.

니엘이 들고 있는 검 또한 매우 비루한 것이었으니, 같은 장비로 응해 줄 생각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요한의 여종은 지금까지 내가 검을 겨루어 본 최연소 상대.

이렇게 어린 소녀에게 검을 들이미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몇 군데 다쳐도 책임 안 집니다.”

심지어 나를 혼내 주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지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파아아앗-

니엘의 검이 바로 날카롭게 쏘아져 왔다.

딱 보기에도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은 아니다.

초식 자체의 격만 놓고 본다면 요한이 펼친 검술보다는 등급이 많이 떨어진다.

챙!

챙!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투박한 느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완성도 높은 검술을 구사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설마 검술을 어깨너머로 배운 건가?’

만약 스승 없이 혼자서 검술을 익힌 것이라면, 이러한 위화감도 설명이 된다.

본래의 초식이 아닌 본인 스타일대로 초식을 수정하여 정립해 나간 것.

내 짐작대로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는 사실상 창조의 영역이라 봐도 무방한 일이다.

어쩌면, 니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아압!!”

니엘의 검은 갈수록 매섭게 쏘아져 왔다.

나는 일단 이 어린 소녀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볼 수 있도록 방어적으로 맞춰 주었다.

‘조금씩 다 부족하군.’

초식의 정교함도 아쉽고, 보법이나 마력 역시 요한과 비교한다면 떨어진다.

하지만, 두 가지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임기응변으로 내 방어적 보법에 대응하는 센스.

그리고 공격 일변도의 패도적인 스타일.

요한과 대련을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니엘의 진가는 지금 발휘되고 있었다.

‘수라마혈검을 가르쳐 보면 꽤 잘 어울리겠어.’

니엘에 대해선 볼 만큼 다 봤으니, 이제부터는 훈계의 시간.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신주아의 표정도 지금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인다.

설마 미적지근하게 싸우고 있는 내 모습 때문인가?

부부 행세를 하면서도, 서방님에 대해 이렇게 몰라서야 원.

- 18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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