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밀레티노 가문의 영지에 위치한 어느 야산.
언덕을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드넓게 펼쳐진 황금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축복받은 땅이라 불리는 이 곡창 지대는 서부 지역의 젖줄이라 불릴 만큼 엄청난 곡식 수확량을 자랑하는데, 이토록 넓은 들판 전체가 밀레티노 가문의 소유라고 하니 인근 지역에서 이 가문의 위세가 어느 정도일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호영 씨, 저기 저 사람이 우리가 찾고 있는…….”
“어, 아마도 맞을 거야.”
밀레티노 가문의 가주이자, 서부 지역 전체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인물.
야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영지를 굽어보고 있는 하나의 실루엣이 보인다.
태양빛을 받아 대머리가 빛나는 걸 보니, 노인이라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듀퐁!’
우리는 공략집의 안내를 따라 듀퐁 밀레티노를 찾으러 이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멀찌감치 뒤통수만 보일 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
그는 틀림없는 듀퐁이었다.
우리 둘은 계속해서 그가 있는 정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뗄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엄습해 온다.
듀퐁이 풍기고 있는 기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던 것.
‘……고수?’
긴가민가했는데, 거리가 좁혀지고 나니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마나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다.
의도적으로 그 기운을 증폭시키는 것도, 감추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풍기는 마나의 흐름.
놀랍게도 그는 고수였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
우리가 접근하자, 그는 뒤돌아서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의심할 여지 없는 듀퐁.
바다 건너의 듀퐁과 쏙 빼닮은 이목구비도 놀라웠지만, 더 대단했던 것은 그가 한참 전부터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희는 외지에서 온 여행객입니다. 좋은 경치로군요, 어르신.”
“여행객이라…….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만, 어쨌든 그대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걸로 믿겠네.”
비록 점잖게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우리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우리의 마나를 느끼고 있는 것이로군.’
그는 우리를 평범한 여행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듀퐁이 우리를 제압하려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나와 신주아가 합공을 하더라도 저 듀퐁 하나를 이길 수가 없다.
‘이 정도의 강자라는 언급은 없었잖아.’
공략집이 미리 언질을 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공략집이 우리를 사지로 보낼 리 없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분명 우리는 듀퐁과의 만남에서 28층 미션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 두 사람은 서로 부부인가?”
“그렇습니다. 어르신.”
나는 지체 없이 바로 대답을 했다.
신주아와 서로 말이 엇갈리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것 같았기에 내가 미리 선수를 쳤다.
다행히, 나의 돌발적인 대답에도 신주아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꽤 먼 곳에서 여행을 온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 외진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가?”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듀퐁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마냥 여행객인 척만 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적당한 선에서는 우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방법일 터.
“사실, 저희 부부는 무사(武士)입니다. 여행도 할 겸, 무(武)에 대한 견문도 익힐 겸 이 일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짐작이 맞다면 어르신께서는…….”
“듀퐁 밀레티노라고 하네.”
“분위기를 보아, 그럴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와 신주아는 듀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타지의 젊은 무사들을 보게 되어, 나도 반갑다네.”
듀퐁의 경계가 누그러지는 걸 보아, 내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어찌 이 늦은 시간까지 이곳에…….”
“깊게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말이야. 여기 이렇게 드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네.”
“고민거리가 있으신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대답을 하는 듀퐁의 표정에는 번뇌가 가득해 보였다.
무슨 고민인지는 잘 알고 있다.
공략집을 통해 미리 정보를 전달받았으니까.
[가주인 듀퐁 밀레티노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는 그중에서 느지막하게 얻은 막내아들 요한 밀레티노에 대한 문제로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사흘 후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며, 그 날 가문의 중요한 자격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그의 손위 형제들은 그동안 천민의 피가 섞인 요한을 극심하게 견제하였기에…….]
한마디로 복잡한 집안 문제였다.
제아무리 가주인 듀퐁이라 해도, 가문의 승계 문제를 제 뜻대로 할 수는 없었던 것.
외척들의 위세와 가법의 전통이 듀퐁의 발목을 잡았다.
이제 곧 그의 막내아들 요한은 자격 시험을 치른 후 승계자 후보에서 제외될 것이며, 그것은 이제 요한이 본가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는 현실에 듀퐁은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현재로썬 뾰족한 방법도 없을 테고.
‘공략집은 듀퐁의 환심을 얻어 두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이번 일에 우리가 개입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빌드업 과정은 필요하다.
무턱대고 밀레티노 가문의 집안 문제에 외부인이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르신의 고뇌가 깊어 보입니다.”
“그래 보이나? 내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는 하는 중이네만.”
“저희 부부는 이곳에 술상을 차리려 하고 있습니다만,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산행을 하며 술이라, 자네들 제법 운치를 아는 여행객들이로군. 거절하지 않고 받겠네.”
역시, 듀퐁이 술을 거절할 리가 없다.
이야기가 재밌어진다면 결코 한 잔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느낌이 온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고고한 격식이 익숙한 사람이라 해도 그 본질만은 바다 건너 세상의 듀퐁과 다르지 않으리란 예감.
그 생각은 조금의 빗나감도 없었다.
“술맛이 아주 좋아. 한 잔 더 주게나.”
“네. 제가 감히 밀레티노의 어르신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검술(劍術)에 관한 것이 되도록 유도했다.
검술은 내가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주제, 데라에 대해 무지한 나로선 다른 종류의 이야기는 곤란했다.
다행히 듀퐁은 나와 검에 대해 논하는 일을 매우 즐거워했기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어 댔다.
‘확실히 높은 수준이야.’
이야기만으로도 그의 경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검에 대한 철학과 이해의 수준은 나보다 확실히 높아 보인다.
“이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 술잔을 나눌 수 있었던 자리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네. 게다가 자네의 검술은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
“저 역시, 밀레티노 가문의 검술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데라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와하하! 자네, 말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재주가 있어.”
바다 건너편에서도 들어 본 듀퐁의 이 웃음소리. 술에 취하니 이렇게 격식마저 내려놓고, 듀퐁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자네, 혹시 오늘밤 묵고 갈 거처는 마련해 두었는가?”
빙고! 이 얘기가 언제 나오나 했다.
“이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밤이 깊어 버렸군요!”
오래 기다렸던 순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어색한 발연기가 나와 버렸다.
순간, 신주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자네들만 불편하지 않다면, 나의 저택으로 데려가 하룻밤 재우고 싶은데. 괜찮겠나?”
불편할 리가.
하룻밤이 아니라 실은 조금 더 눌러앉을 계획이었다.
* * *
나와 신주아를 부부 사이로 설정한 것.
그 결과 이런 불편한 일이 생기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부에게 각 방을 내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제가 침대 밑으로 내려가 자겠습니다.”
“온돌방도 아닌데 내려가긴 어딜 내려가. 침대도 넓으니 그냥 양쪽 끝에서 등 돌리고 자면 되잖아.”
일단 나 먼저 침대 한쪽 끝에 몸을 눕혔다.
침대의 폭신한 감촉이 꽤 좋다. 내 몸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매트리스의 탄력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최고급의 소재였다.
“넌 안 누울 거야?”
“저희 술 많이 마셨습니다만.”
“나는 마나로 취기는 다 몰아냈어. 그래서 지금 아주 멀쩡한데 너는 아닌가 보지?”
“저를 어떻게 보시고! 물론 저도 취기는 전부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여자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신가 봅니다. 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야, 나도 처음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자랑은 아니니 그만두기로 했다.
“몰라. 난 잔다.”
그러면서 이불을 뒤집어쓰려는데, 생각해 보니 이불도 한 개뿐이었다.
“내일 아침부터의 계획은 있으십니까?”
그러면서 결국 신주아도 침대 위로 살짝 올라와 이불 끝동으로 몸을 덮으며 앉았다.
“글쎄다. 딱히 계획이라고 부를 것도 없지. 그냥 무작정 요한에게 접근할 생각이니까.”
이번 문제의 본질은 요한의 출신에 있었다.
그는 듀퐁의 모든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민의 피가 섞인 몸.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자신만의 세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형제들과 외척들의 거센 견제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요한의 휘하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였던 것.
사병을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은 밀레티노 가의 아들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가문의 법도에 따라 밀레티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남자는 열여덟 살이 되는 생일에 승계자의 자격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아무런 세력 없이 혼자서는 절대 통과가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격 시험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본가에서 떠나야 한다는 의미.
디데이까지는 사흘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오늘 듀퐁의 모습을 보니, 이곳 대륙의 수준이 낮아 보이지는 않아 걱정입니다.”
“어. 관건은 요한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에 달려 있겠지.”
우리 둘은 요한의 종자로 들어가 그의 자격 시험을 도울 생각이었다.
물론 데라에 평생 남을 것은 아니기에 뒷감당은 요한의 몫.
일단은 공략집대로 가 볼 계획이다.
요한을 승계자 후보로 올려 듀퐁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저희 둘이 요한을 도와 자격 시험을 통과시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신주아는 이불 안에 몸을 쏘옥 집어넣고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안 잘 것처럼 말하더니,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걸 보니 바로 생각을 바꾼 모양이다.
“실패하면 빨리 여길 손절하고 떠야겠지. 다른 퀘스트가 생성될 만한 곳으로.”
그래도 베스트는 이번 요한 건을 성공시키는 일이다.
양쪽의 대륙에서 이토록 빠르게 두 명의 듀퐁을 만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 무언가 놀라운 일이 안배되어 있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예언가이니 보통 그런 느낌은 맞는 편이지?”
“항상 그렇진 않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 것인데…….”
“그럼 얼른 자. 좋은 꿈꾸고.”
“그럼 편한 자세로 잠 좀 자 보겠습니다.”
“……어.”
원래는 이불의 끝동만 살짝 걸치고 있었던 신주아.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영역을 점거해 가기 시작했다.
- 18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