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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77화 (177/292)

177화

“이 새끼 봐라? 이걸 버틴다고?”

털보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제 딴에는 내 어깨를 아작 낼 의도로 힘을 주었을 텐데, 미안하지만 이 정도 완력으로는 코볼트 한 마리도 못 잡는다.

“힘 좀 더 내 봐.”

“개자식이! 뒈지고 싶어서!”

슬슬 자극을 하니 바로 반응이 왔다.

털보는 내 어깨를 더욱 강하게 움켜쥔다.

녀석의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힘. 오롯이 피지컬만으로 내는 게 아니다.

‘마나랑 비슷하면서도 미세하게 다르다.’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탑에 온 뒤로 많은 차원의 세상을 경험했지만, 마나 이외의 기운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니까.

무림에서 내공이라 부르는 힘만 하더라도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탑에서 사용하는 마나와 다르지 않았다.

소설 속의 세상도 그랬고, 마법의 대륙 칼리아, 군주가 지배했던 27층 등 모든 차원을 관통했던 공통적인 힘은 바로 ‘마나’였다.

그런데 곳에는 뭔가 다른 힘이 존재하는 것 같다.

“힘 좀 더 쥐어 짜내 봐. 이래 가지고 떼인 돈 받을 수 있겠어?”

“너어어! 죽여 버린다!”

털보의 손끝에서는 미지의 에너지가 쏟아진다.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마나가 아니다.’

마나의 하위 호환 느낌.

나는 털보의 손등에 내 손을 살포시 포개어, 마나를 불어 넣었다.

솥뚜껑만 한 털보의 손은 너무 쉽게 내 어깨에서 떨어졌다.

- 이…… 이게 뭐야!!

털보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당혹의 외침.

이게 뭐냐면, 마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지한 털보 녀석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너 이 새끼! 힘 좀 쓰는 모양인데, 용병단에 팔아 치우면 돈 좀 되겠어!”

“나를 팔겠다고?”

“그래! 네놈이 듀퐁 노인네의 빚을 대신 갚아 준다면서!”

뭐 이딴 어거지 논리가.

하지만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대,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털보 녀석은 나를 듀퐁과 어떻게든 엮어 팔아 치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대낮에 그것도 마을의 번화가에서 이런 놈들이 활개를 치다니, 그야말로 무법 지대가 따로 없다.

“여기 세계관은 진짜 개판 오 분 전이네.”

“그건 뭔 개소리야!”

28층의 세상. 데라 대륙이라 불리는 이곳이 어떤 스타일인지는 느낌이 대충 온다.

듀퐁이 갚아야 한다는 14만 SP의 빚도 정당한 채무일 리가 없다.

“듀퐁 영감이 빌려간 원금은 얼마였지?”

“50SP.”

털보 녀석은 뻔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작 50SP가 14만SP로 변하는 황당한 계산법. 내 이럴 줄 알았다.

“50은 개뿔! 딸꾹! 내가 한 달 전에 도박장에서 빌린 건 40SP였다고! 딸꾹!”

테이블 아래 숨어 있던 듀퐁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알코올 중독에 도박까지.

이 인간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이봐 영감! 50이나 40이나 돈 떼먹은 건 똑같은 거라고. 남의 돈을 처먹었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하는 거야. 내 말 틀렸어?”

털보의 위협에 듀퐁은 테이블 밑에서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바로 털보의 솥뚜껑만 한 주먹이 날아든다.

주먹이 궤적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내가 서 있는 곳.

기습 공격이었다.

녀석도 방금 전의 힘겨루기로 내가 보통이 아닌 걸 알았을 테니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나 보다.

‘흠…….’

녀석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데, 지난 27층의 헌터들과 비교하면 많이 느렸다.

슬로 모션으로 보일 정도로.

느껴지는 힘 역시 형편없었다.

내 몸은 녀석의 주먹을 그대로 통과했고, 바로 휘두른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빙글-

털보의 거대한 몸집에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콰아아앙-

그렇게 털보는 맥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제론!”

제론은 털보의 이름인 듯했다.

털보와 함께 온 두 명의 덩치는 바로 칼을 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빙글-

털보의 동료 한 명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다.

회전축은 신주아의 가녀린 손.

콰아아앙-

“한번 따라 해 봤습니다.”

“……어.”

순식간에 바닥에 두 명이 누워 버리며, 주점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갑자기 몰려들어 이 좋은 구경거리에 환호성을 보냈다.

저질스러운 웃음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뒤섞여 주점 안을 가득 메운다.

마치 투기장의 느낌이다.

“이런 개 같은 놈년들이!!”

분위기에 취했는지 마지막 한 녀석의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그 녀석은 기다란 칼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질렀고, 내 머리통을 두 동강 낼 기세로 내려찍었다.

휘이익-

역시 느리다.

나는 가볍게 녀석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빙글-

주점에 놀이공원이 개장했다.

* * *

듀퐁 구하기 퀘스트는 가볍게 완료.

그 결과, 나와 신주아는 듀퐁의 집에 와 있었다.

문제는 듀퐁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는 것.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빚쟁이들에게 위협받는 처지였는데, 참으로 맘 편한 노인네였다.

믿음직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퀘스트가 생성되었으니 무언가 진행될 여지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신주아. 뭐 해?”

부엌에서는 보글보글 냄비가 끓어오르며 얼큰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해장국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해장국? 설마 저 노인네 때문에?”

분명 지구의 것과는 다른 식재료일 텐데, 풍기는 냄새만은 그럴듯했다.

그리운 맛이 날 것 같다.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저렇게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니 말입니다.”

“아버지?”

고아로 자란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이름.

내겐 이 빌어먹을 아포칼립스에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할 가족이 없다.

과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듀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저를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장국을 끓이는 동안은 예전에 함께 지내던 느낌을 낼 수 있으니까요.”

“갑자기 네가 사람처럼 느껴지는군.”

“무슨 뜻입니까?”

“말투만 보면 딱 인공지능 봇 같잖아.”

“뭐라는 겁니까?”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아까 털보 일행이 사용했던 힘 말인데, 이상한 점 없었어?”

“마나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역시 너도 느꼈군.”

신주아의 느낌은 믿을 만하다.

정말 이 세상에는 마나라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여러 힘이 공존하는 곳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어. 미안. 내가 눈치가 없었네.”

한마디로 꺼지라는 뜻이었다.

요리를 하는 동안 홀로 과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자리를 옮긴 곳은 듀퐁의 서재였다.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온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나는 듀퐁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의 실례는 해도 될 것이다.

퀘퀘 하게 풍겨 오는 책 냄새.

한쪽 벽면은 온갖 서적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알코올 중독에 도박쟁이 주제에 책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니, 이것만 해도 위화감이 넘치는데 더 놀라운 것은 모든 서적들이 꽤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듀퐁은 카테고리별로 책을 분류해 둔 모양.

각종 신화들에, 수많은 역사서들, 심지어 고대 문자를 연구한 책들도 꽂혀 있었다.

‘이런 책들을 저 주정뱅이가 읽는다고?’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책장에서 듀퐁의 일기장을 찾으십시오.]

‘찾아서 읽어 보라는 것인가?’

공략집이 별걸 다 시킨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그 순간 신주아가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방금,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내가 받은 공략집과 동일한 내용일 터.

우리 둘은 서둘러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책장은 워낙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으니까.

“여기!”

나는 책장에 꽂혀 있던 노트 하나를 빼 들었다.

“역시 먼저 찾으셨군요.”

“나는 운이 좋으니까.”

우리는 일기장을 넘겨 가기 시작했다.

공략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았기에, 우리가 꼼꼼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야 우리는 무언가 의미 있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 나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평생 풀리지 않던 데라 대륙을 둘러싼 수많은 의문들.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술주정뱅이에 미치광이 취급을 할지 모르겠지만, 이 결론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세상은 가짜다!”

드넓은 데라 대륙, 대륙을 둘러싼 황량한 바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유구한 역사, 그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나조차도 모두 가짜일지 모른다.」

이것이 듀퐁이 작성한 최근의 일기였다.

공략집만 아니었다면, 개소리로 넘겼을 만한 내용이었다.

이 세상이 가짜라니.

일기장의 앞부분을 다시 샅샅이 훑어봤지만, 듀퐁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신주아, 넌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계시를 통해 찾은 일기장입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

결국, 듀퐁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신주아, 그런데 말이야.”

“네.”

“해장국 끓어 넘친다.”

“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엌에서 들리는 치익-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주아는 헐레벌떡 달려갔다.

몬스터를 앞에 두고도 항상 태연한 그녀였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 * *

“세상에!”

이것은 생전 처음으로 해장국을 맛본 듀퐁의 반응이었다.

“혹시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안 맞긴! 완전 잘 맞아!”

듀퐁은 허겁지겁 숟가락으로 국을 뜨기 시작했다.

요리를 한 것은 신주아지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나였다.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다른 차원의 사람이 지구의 음식에 매료된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게 괜찮았다.

나와 신주아는 게걸스럽게 해장국을 해치우는 듀퐁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숙취에 찌든 속이 바로 풀리는 것 같아! 바로 한잔 더 해도 되겠어!”

농담일까 싶었지만 진짜였다.

“그 전에 여쭤볼 게 있습니다.”

나는 술병을 짚으려 하는 듀퐁을 바로 제지시켰다.

꼭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이 노인네의 집까지 오게 된 것이니까.

“그냥 술 한잔하면서 얘기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나는 눈에 힘을 빡 주며 말을 이어 갔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죠. 드래곤이 있다는 주장을 하시던데,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습니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자네도 드래곤의 존재를 믿는 것인가?”

“믿으니까 그걸 물어보려고 영감님을 구해 준 것 아니겠습니까?”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로군. 그런데 내 대답을 들으면 나더러 미쳤다고 할 거 같은데. 크크크.”

“판단은 제가 할 테니, 일단 얘기나 들려주시죠.”

“드래곤은 말이야, 데라 대륙에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여기가 데라 대륙 아닙니까?”

“내가 말하는 건 [진짜] 데라 대륙을 말하는 것일세. 자네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도 못하겠지만. 크크크크.”

이 말은 듀퐁이 일기장에 썼던 그 내용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럼,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가짜 데라 대륙이라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참고로 지금 나는 아주 멀쩡해. 저 처자가 끓여 준 걸 먹고 나니 머리도 개운해졌거든.”

“이곳이 가짜 세계라는 말. 일단 믿어 보죠.”

“암. 믿어야지. 뭐라고? 방금 믿는다고 한 거 같은데 자네 미쳤나?”

“기왕 미친 거 더 미친 얘기를 해 보죠. 솔직히 저는 저 자신도 가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듀퐁의 눈이 커진다.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 17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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