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다가올 28층이 쉬어 가는 층이라고?”
제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저 씰룩거리는 입술만 봐도 그렇다.
저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뭔가가 있다는 의미니까.
“쉬어 가는 층 맞아. 네가 직접 28층의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거든.”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럼, 난이도에 따른 보상이 달라지는 건가?”
내가 직접 난이도를 선택하는 조건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보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높은 난도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뻔하고 흔한 레퍼토리.
제나가 지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터.
라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난이도에 따른 차등 보상. 그딴 거는 없어.”
그렇다면 뭔가 좀 이상한데.
“그럼 굳이 어려운 난이도를 고를 이유가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쉬어 가는 층이라고 표현한 건데, 그럼에도 넌 높은 난도를 고를 가능성이 꽤 있다고 봐.”
“왜지?”
“네 특유의 지랄병 때문에.”
“그건 무슨 소리야?”
“너, 가끔씩 주인공놀이 하는 지랄병이 도지곤 하잖아. 28층이 그런 거 하기에 딱 좋은 곳이거든.”
순간 손이 올라갈 뻔했지만 꾹 참았다.
“계속 설명해 봐.”
“네가 속한 구역에서 27층의 골드 보상 1위는 바로 너야. 그리고 그 순위대로 28층의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그럼, 내가 우리 로비에서 가장 먼저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는 건가?”
“어. 그런데 난이도 선택지를 보게 되면 꽤 당황스러울 거야. 거기에 헬 난이도가 하나 섞여 있거든. 그리고 네 구역의 누군가는 그 난이도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지.”
“그럼 네가 말한 그 지랄병이라는 게…….”
“어, 솔직히 말해서 그 헬 난이도를 네가 고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넌 주인공놀이에 심취해 있는 플레이어잖아. 인정?”
“노인정!”
“그럼, 제일 쉬운 난이도를 선택해서 쉬어 가든가. 콜?”
제나는 그렇게 다그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요망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솔직히 저 말에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최우선 선택권을 받은 상황에서 제나의 말대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내 사고 회로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거부할 것만 같았다.
이젠 정말로 내가 주인공 놀이에 심취해 있는 건가. 라는 의심마저 든다.
“일단 그 얘기는 됐고, 나한테 줄 게 있다면서?”
[저거저거저거, 말 돌리는 거 봐라.]
[또 지랄병이 제대로 도지셨네요.]
[ㅋㅋㅋ]
[그런데 설마 저번처럼 때리려는 건 아니지?]
[에이, 주인공께서 설마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두 번이나 하겠어?]
[ㅋㅋㅋ]
명백히 농락당하고 있는 상황.
어린 여자아이의 외양만 아니었다면, 정말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본론이나 말해 봐. 날 여기로 소환한 목적이 뭐야?”
“치, 그렇게 나오면 놀리는 보람이 없잖아. 네가 때릴까 봐 실드도 준비해 왔는데. 자! 이거나 받아라.”
그러면서, 제나가 내게 캡슐 모양의 물건을 하나 건넸다.
[퍼펙트 실드]
- 효과: 1회에 한해서 상대의 어떤 공격이라도 무마시킬 수 있다.
“이거 주려고 날 부른 거야?”
“말했잖아, 이건 너한테 맞을까 봐 준비해 온 거고, 진짜는 따로 있어.”
솔직히 이것만 해도 놀랍다.
상점창에는 존재도 하지 않는 아이템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여벌의 목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또 있다고?”
“테이아의 날개 좀 펴 봐.”
내가 고분고분 날개를 펼치자, 제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 등 뒤로 가서 무언가를 뿌리기 시작한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일종의 튜닝 같은 거야.”
제나가 뿌리고 있는 휘황찬란한 빛깔의 가루는 테이아의 날개에 닿으며 반응을 일으켰다.
외관상의 변화는 없지만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끝났어.”
“뭐가 달라진 거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확인해 보는 게 빠를 거 같은데. 한번 10미터 상공으로 올라가 볼래?”
“어.”
나는 바로 날개에 마력을 불어 넣어 몸을 공중으로 부양시켰다.
날 올려다보는 제나의 표정엔 흐뭇함이 묻어 있다.
“그럼 이제 거기서 검술을 펼쳐 봐. 무영추혼검이든 수라마혈검이든.”
“여기서?”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지면으로부터 발이 계속 떨어져 있는 상태에선 마력의 운용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연결 동작으로 공중으로 도약을 한 것이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검술을 펼쳐 내면 절반의 위력도 발휘하기가 어렵다.
그런 이유로 플라잉 오우거를 잡을 때에도 정밀한 마력 운용이 필요 없는 총을 사용한 것이고.
“의심하지 말고 해 봐.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허공을 밟고 있는 느낌이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마치 땅을 딛고 있는 것 같은 단단한 느낌이었다.
‘완연한 허공답보의 경지?’
사부와 혈마가 내게 보여 준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오른다.
그 둘은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듯,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지를 보여 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그걸 흉내 낼 수 있다고?
믿기지 않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으로 엘리시온을 휘둘렀다.
휘이익-
휘이이익-
공중에 뿌려지는 수십여 검획이 한 폭의 그림을 이루어 낸다.
지금까지 만들어 본 적 없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 * *
다시 돌아온 탑의 로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모두가 무사 생환이었다.
27층은 여성 플레이어들에겐 그리 가혹하지 않았으며, 우리 구역엔 수려한 외모의 남자 플레이어도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놀라운 생존율인 건 분명했다.
이쯤 되니 한 가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구역의 동료들은 탑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잘 성장해 왔다는 것.
상태창들을 쭉 스캔해 보니, 27층에서도 준수하게 활약을 한 모양이다.
우리들은 각자 27층에서의 여정을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었다.
“소문으로나마 이호영 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길드에 들어가 헌터로 활약하셨다면서요?”
“네. 어쩌다 보니.”
“하여간 유별나시네요. 27층의 생존 미션을 그런 식으로 정면 돌파 하다니.”
서준호는 나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다른 동료들에게 게이트의 위협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플레이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게이트가 돌발적으로 발생하곤 했으니까.
그저 나는 좀 더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했을 뿐이다.
“아니 왜 다들 호영이 형 얘기만 하는 거야! 나도 같은 길드에서 활동했는데! 그런데 마지막에 27층의 종말이 어떻게 끝났는지 다들 모르지?”
김세용은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영웅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헌터 시험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부터 시작해서 붉은 늑대들에서 내 팀원으로 활약한 이야기까지.
하지만 녀석의 의도와 다르게,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얻은 테이아의 날개에 쏠렸다.
“이호영 씨가 이제는 날아다니는 것도 할 수 있다고요?”
“한번 보여 주세요!”
“나중에요! 여긴 층고도 너무 낮잖아요.”
갑자기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느낌.
바로 화제를 돌려 준 것은 탑의 메시지였다.
[이제 곧 28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은 이미 제나로부터 들은 그대로였다.
27층에서 활약한 순위대로 난이도를 선택하는 것.
탑의 메시지는 우리들의 순위를 공개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확신하는 사실이 있었다.
27층의 종말을 끝낸 것이 나였으니, 누가 1위인지는 너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 아마도 이호영 씨가…….”
서준호의 말은 거기서 뚝 끊겼다.
탑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도, 계획을 세울 시간도 주지 않았다.
[지금부터 난이도 선택을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세상에 암전이 찾아오며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카드 모양으로 된 선택지들.
각각의 카드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저 숫자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14, 21, 18, 24, 17, 136(2), 23, 17 …….
단연 눈에 띄는 카드 하나가 있다.
무려 136.
가장 낮은 숫자와 비교한다면 무려 10배 가까이 높은 수치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가장 쉬운 14를 선택한다면?’
그렇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음 순위의 플레이어는 14라는 선택지 자체를 볼 수 없을 테니까.
‘주인공 놀이라…….’
제나가 나를 비꼬며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와서 생각을 해 보니 부인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가 언제부턴가 익숙해졌고, 나는 항상 그 기대에 부응해 왔으며, 그런 상황들에 큰 불만도 없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136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동료 중 누군가는 죽게 될 공산이 크다.
이 카드는 마지막 순번의 플레이어에게 돌아가기 쉬우며, 아무래도 그 플레이어는 우리 중 가장 약할 테니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내가 만약 선택을 끝난 이후였다면 어쩌려고.
[난이도 136의 미션은 2인 파티로 진행됩니다. 당신이 이 카드를 선택하게 된다면, 미션 도중 이 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마음을 굳힐 수 있다.
[136을 선택하였습니다.]
나의 선택이 끝나자 136(2)이 136으로 바뀌며, 모든 카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궁금해진다.
나와 함께 파트너를 이룰 플레이어가 과연 누구인지.
과연 136이라는 숫자를 보고도 자발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 * *
[28층을 시작합니다.]
[드래곤의 부화를 저지하십시오.]
[초기 자금으로 100SP를 지급받았습니다.]
난이도 136의 미션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내 옆에 나타난 한 명의 플레이어.
파트너로 예상했던 몇 명의 후보들이 있었는데, 모두 빗나가 버렸다.
“신주아?”
가녀린 체구에 양날 도끼를 든 플레이어.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 달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이라면 이런 선택을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로비에서 저는 136 난이도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이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신주아의 직업은 예언가. 그녀는 계시라는 이름으로 내가 받는 공략집과 동일한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걸 선택한 거야?
내 물음에도 신주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야 입을 연다.
“이곳 28층에 한해선 계시에 대한 제약이 풀린 거 같군요. 이제는 다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를?”
“이곳 136 난이도의 미션에는 탑에 대한 비밀 일부가 감추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목적.
파트너가 신주아라면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무력 수준도 뛰어나지만, 그녀의 최고 장점이라면 예언가 특유의 직감.
이곳 28층에서 신주아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의 부화를 저지하라……. 미션이 너무 막연한 거 같은데, 뭐부터 하면 좋을지 혹시 괜찮은 계획이라도 있어?”
다른 플레이어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한다는 건 나로선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주로 질문을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마을 주점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얘기해 보죠.”
“술? 이 대낮부터?”
“네.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이런 미녀가 먼저 제안하는 술자리. 종말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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