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테이아의 날개.
나는 이 아이템을 얻은 것에 대해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었다.
27층의 세계관에서 최초로 하늘을 난 인간으로 기억될 사람은 바로 나 ‘이호영’.
사실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이기에, 27층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를 강탈해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떠나기 전에 빚을 갚을 수 있어서 말이다.
나는 공략집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27층의 마지막 미션을 클리어하는 방법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6시간 동안 살아남기.
이것은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공개된 미션이었다.
그래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시시때때로 공간을 찢고 나오는 몬스터를 상대하며 6시간을 버티면 우리는 다시 탑의 로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이후의 27층은?
6시간 뒤 플레이어들 모두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만, 이 세계는 그 후에도 여전히 실존할 것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들과 함께.
어쩌면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우리 지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세계의 사람들을 위해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2. ‘멸절의 눈’ 파괴하기.
멸절의 눈이 무엇인지는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27층의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눈.
이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세상 곳곳의 공간이 동시다발적으로 찢어지며 몬스터가 등장한다.
공략집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마치 숙명처럼 느껴졌다.
27층의 세상에서 저 멸절의 눈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절묘한 타이밍에 테이아의 날개를 얻은 것도 그렇고, 모든 상황들의 아귀가 딱 맞게 떨어지니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느껴졌다.
케에에엑!
케에에에엑!
일단 우리의 저택에 나타난 몬스터들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
[좀비 오우거]
27층에선 별의별 오우거들이 다 나온다.
“호영이 형!”
“어, 나도 보고 있어!”
이놈들은 오우거라고 하기에 사이즈가 상당히 작았다.
2미터도 채 되지 않는 녀석들이니 오우거 중에선 아주 귀염둥이들이다.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문제는 개체 수가 많다는 것.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예상되는 한 가지 특성. 그 예상은 절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타앙-
타앙-
타앙-
가슴에 탄환을 맞은 좀비 오우거들은 죽을 것처럼 괴로운 신음을 뱉어 내더니, 잠시 후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왔다.
‘역시 재생 능력이 있군.’
일반적인 공격으론 이 녀석들의 화를 돋울 뿐이다.
27층의 헌터들이 좀비의 재생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이런 특성의 몬스터는 처음일 테니까.
타앙-
타앙-
타앙-
이번 타깃은 좀비들의 대가리.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분수가 천장으로 솟구쳤다.
대가리가 없어진 좀비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역시 약점은 있다.
27층의 사람들이 이 점을 빨리 캐치해 낼 수 있을지가 관건.
“세용아, 가자.”
“가다니 어디를 가!”
“세상을 구하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이놈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를 생각이다.
테이아의 날개가 한 명의 무게쯤은 충분히 버텨 줄 것이다.
이 녀석의 사이즈가 평범한 1인분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김세용의 어깨를 잡고 테이아의 날개를 폈다.
내 몸 속에 잠들어 있던 날개가 튀어나오며, 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었다.
“혀…… 형!”
“꽉 잡아! 죽기 싫으면.”
날개에 마력을 불어 넣자, 몸이 부유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목적지는 멸절의 눈.
소름 돋게 생긴 하늘 위의 눈동자는 지금 또 한 번 깜빡였다.
지이이이잉-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온갖 곳에서 좀비 오우거들이 튀어나온다.
종말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헌터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태로 인해 희생될 것이다.
타아앙-
타아앙-
홍염의 불도깨비는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온 세상이 좀비로 뒤덮일 기세였기에,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미약한 아우성이지만 이 사태를 보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타앙-
좀비들의 대가리가 터져 나갈 때마다 개체 수는 하나씩 줄어든다.
이 근처에 있을 헌터들이 힌트를 얻길 바랄 뿐이다.
“형! 세상을 구한다면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저기.”
비행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우리는 점점 멸절의 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멸절의 눈에 진입하시겠습니까?]
거대한 눈동자는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잠시 깜빡거림을 멈추었다.
마치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고 도발하는 것만 같다.
“형! 6시간만 버티면 되는 거잖아! 우리가 굳이 이럴 필요가 있어?”
“세용아, 그동안 여기서 누릴 거 많이 누렸잖아? 조금은 갚고 가야 하지 않겠어?”
“젠장!”
“들어가기 싫으면 이 앞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든가.”
“미친! 뒈지라는 얘기잖아! 그런데 여기 들어가면, 이 사태를 끝낼 수 있는 거 정말 확실해?”
“아마도.”
“무슨 근거로 장담을 하는 건데?”
“그냥, 딱 봐도 그래 보이잖아.”
“젠장! 확실한 근거네. 그럼 들어가!”
[멸절의 눈 속으로 진입합니다.]
사실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공략집이 내게 정보를 주었다는 것.
공략집의 발신인은 내가 단순히 6시간을 버티는 상황을 원치 않았으며, 나 역시 27층의 인류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기에 이 선택을 내린 것뿐이다.
“형! 여기 도대체 뭐야!”
눈 속의 세상.
이곳엔 몽환적인 안개가 가득했으며, 유쾌하지 않은 파장이 우리의 귀와 정신을 어지럽혔다.
시간의 감각도, 공간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곳이다.
- 정말로 오고야 말았군.
그리고 우리를 향한 메스꺼운 음성까지.
어디서 들려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귓가에 다이렉트로 음성이 꽂히는 느낌이니까.
“당신이 27층의 군주인가?”
막연히 그럴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27층에서 초월적인 권능을 발휘하며 세상을 주무르는 유일한 존재.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이상한 대답이군.”
- 아마도 아닌 쪽에 가까울 거야. 내가 만약 군주 그 자체였다면, 네가 나에게 감히 이렇게 대할 수 없을 테니까.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27층의 군주,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 그는 공략집 발신인과 대등한 격을 가진 존재일 터. 음성만으로도 내가 위압감을 느꼈어야 정상이다.
게다가 이 탑의 열두 기둥은 격 자체가 너무 높아 인간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없는 존재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공략집의 발신인은 제나를 나와 소통하기 위한 대리인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그렇다면, 군주의 수많은 분신 중 하나인가?”
- 날카롭군. 정답은 아니지만 상당히 근접했어.
“역시 애매한 대답이야.”
- 굳이 대답해 줄 이유는 없으니까. 어쨌든 네 녀석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놀라워. 테이아의 날개가 주인을 잘 만난 모양이야.
“다 알고 있다니, 역시 군주와 전혀 무관한 존재는 아니로군.”
- 사실 난 네 옆의 녀석이 테이아의 날개를 얻지 않을까 생각했어. 이곳에서 편애를 잔뜩 받은 놈이니까.
“나?”
- 그래 너. 온갖 총애를 독차지해 놓고선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걸 놓쳤더군.
“기왕 퍼 줄 거면 힌트를 좀 더 팍팍 줬어야지! 나는 그 노인네가…….”
- 투덜거리는 건 거기까지. 어차피 이미 지나 버린 일이다.
이쯤 되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사실 멸절의 눈에 들어오게 되면 한바탕 전투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좀비 오우거들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도 예상해 봤고.
하지만 이 안은 너무나 고요했다.
음성의 주인도 우리에게는 그리 적대적이지 않고 말이다.
“물어볼 게 있다. 27층의 세계에선 혹시 종말이 시작된 것인가?”
- 종말이 될 수도 있겠지. 이 사태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그걸 막을 방법은 혹시 이 안에 있는 것인가?”
공략집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멸절의 눈의 파괴.
그것은 6시간이라는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 맞아. 이 안에 있지. 그걸 기대하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그럼, 바로 시작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좀비 오우거들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을 테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바로 싸울 수 있도록 온몸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 그런데 너, 도대체 뭘 시작하자는 것이지?
“뻔하잖아. 내가 지금 원하는 게 무엇인지.”
- 혹시 종말을 말하는 것인가? 그거라면 이미 끝난 일이다.
“끝났다고?”
- 너희가 멸절의 눈으로 진입한 순간, 모든 것은 소멸되었다. 세상도 곧 평온을 찾아가겠지.
그것을 확인시켜 준 것은 잠시 후 우리에게 들려온 메시지였다.
[27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이제 곧 로비로 복귀하겠습니다.]
“이렇게 끝이라고?”
- 이 세상이 너에게 빚을 진 셈이군.
[보상으로 82,600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특별 보상으로 마력을 획득하였습니다.]
또 한 번의 여정이 이렇게 끝나 간다.
몇몇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광산에서 만난 작업반장 야렌, 붉은 늑대들의 마스터 유나, 붉은 머리의 귀공자 로이드.
그런데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야렌은 붉은 늑대들을 증오하였을까?
그냥 술 먹고 한 헛소리였는지, 그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결국 진실을 이곳에 묻어 둔 채 떠나게 되었다.
눈앞이 점점 희미해진다.
[차원의 틈새가 열렸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입장료 : 82,600 골드]
입장료를 보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27층에서 얻은 골드 보상을 전부 탈탈 털어 가겠다니.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 * *
“안녕, 이호영?”
제나는 특유의 새침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입장료를 꼭 이런 식으로 받아야 하는 거야? 땅 파서 골드 얻는 것도 아닌데.”
“들어오라고 강요한 적 없어.”
그건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한 번이라도 거부했다가는 영영 이 연결 고리가 끊길 것 같은 느낌이니까.
“칭찬해 주려고 부른 건가?”
“칭찬? 무슨 칭찬?”
“네가 말한 걸 완벽하게 지켰잖아. 호감도 말이야.”
27층이 시작되기 전, 제나는 내게 경고했었다.
절대 다른 군주들의 호감을 51이상 얻지 말라고.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약간의 성가심도 감수했던 게 사실이다
[참 잘했어요!]
[우쭈쭈쭈!]
[ㅋㅋㅋ]
“설마, 이런 걸 원하는 거야?”
[ㅋㅋㅋ]
[멍청아.]
[그럼 다음번엔 호감도 51을 한 번 넘겨보든가.]
제나의 현란한 메시지 전송이 시작되었다.
“사람 앞에 두고 메시지 보내지 말라고 했잖아.”
[싫은데?]
[ㅋㅋㅋ]
살짝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결국엔 참았다.
예전에 지은 죄가 있기도 했고.
“어쨌든, 날 여기로 부른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항상 그랬듯이, 그분께선 너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하셔. 그 전에 28층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하는데.”
“탑의 열두 기둥, 또 다른 군주가 다스리는 세계로 가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아. 이번 28층은 쉬어 가는 층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깔깔대며 웃는다.
뭐가 웃기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느낌 하나는 확실히 왔다.
28층은 절대 쉬어가는 층이 아니다.
- 17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