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5대 헌터 길드에 가입하십시오.]
[남은 시간: 1일 14시간 13분 2초]
남은 시간이 촉박해 보이지만, 알고 보니 탑은 다 계획이 있었다.
때마침 지금은 반년에 한 번 있는 헌터 인증 시험을 앞둔 시기.
헌터 지망생들은 불카노의 원형 경기장에 모여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이곳에는 많은 길드 스카우터들이 운집하게 된다.
‘분명 5대 길드에서도 스카우터를 보낼 테지.’
그리고 바로 오늘이 헌터 인증 시험 디데이.
이곳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5대 길드 가입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경기장에는 지망생들과 스카우터들, 그리고 시험을 구경하러 온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슨 콜로세움을 보는 것 같네.’
관중석의 맨 상단까지 꽉 들어찬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눈에 띄는 얼굴 하나.
사실 얼굴보다는 유난히 큰 목소리 하나가 내 절대 청각을 자극했다.
그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용아.”
“어? 호영이 형! 형도 시험을 보러 온 거야?”
“어, 너도?”
“어, 나도!”
27층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김세용에게는 벌써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 그가 김세용에게 느끼는 호감도는 어느덧 87이 되었다.
초기 수치도 압도적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어나더 레벨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결국 권능을 받았군.’
그의 상태창을 보니 못 보던 스킬이 하나가 생겨났다.
바로 불주먹.
기존의 돌주먹보다 스피드나 파괴력이 훨씬 높은 상위 호환의 스킬이다.
그리고 김세용은 앞으로도 더 많은 특혜를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놈의 탑은 한번 밀어주기로 하면 정말 끝까지 밀어주는 특성이 있다.
나한테도 그랬으니까.
“형, 나 아무래도 27층 체질인 듯.”
“왜 또 설레발이냐?”
“우주의 기운이 나한테 막 쏠리는 느낌? 그냥 뭐든지 다 술술 풀려. 오늘 헌터 인증 시험도 있으니 곧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이놈 어깨에는 뽕이 잔뜩 차 있었다.
못생긴 게 유리한 이런 세상이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물론 녀석에겐 비밀이지만 말이다.
“세용아, 혹시 너도 퀘스트 때문에 온 거냐?”
“어, 헌터 길드에 가입하기. 이것만 달성하면 호감도가 거의 100점에 가까워질걸?”
“그게 다야?”
“어, 퀘스트가 심플하지? 형은?”
나와는 조금 다르다.
내 퀘스트는 5대 길드 가입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내 조건이 훨씬 더 까다로운 셈이다.
어쩌면 이것도 호감도의 차이가 불러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도 뭐 비슷해.”
“그럴 거 같더라니. 그나저나 형은 호감도 몇이야?”
“7.”
“겨우?”
김세용은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게 더 못생겨 보이기만 한다.
김세용은 본인의 수치를 밝히며 지난 며칠간의 영웅담을 털어놓았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27층 군주의 총애를 받고 있기에 확실히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형. 저기! 저놈 보여?”
김세용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붉은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에 띄는 미공자다.
190은 넘어 보이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저게 누군데?”
“이번 기수 최고 유망주라던데, 잘나가는 길드에서 야심차게 키운다는 얘기가 있어.”
“잘나가는 길드?”
“어, 붉은 늑대들이었던가?”
“붉은 늑대들?”
내가 타깃으로 삼은 곳이다.
야렌의 표현으로는 ‘천하에 죽일 놈들.’
정말로 죽일 놈들인지는 길드에 가입해서 확인해 볼 생각이다.
“그런데 넌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듣고 다니는 거냐?”
“어디긴 어디겠어. 술집밖에 더 있어? 암튼 저 놈이 이번 기수 예비 1등이라던데, 내가 한번 조져 볼까도 생각 중이야.”
저 붉은 머리 녀석. 인파 속에서 섞여 있어 제대로 기감이 느껴지진 않지만, 괜찮은 수준으로는 보인다.
느낌적 느낌으로는 남소현 정도의 수준?
그나저나 세용이 놈, 27층에 오더니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른다.
* * *
이번 기수 헌터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대략 800여 명.
매 기수마다 배출되는 헌터가 7~80명 정도로 일정하다고 하니 이 중 10퍼센트도 안 되는 인원만이 공인 헌터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참여자분들은 전부 결계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원형 경기장 안에는 대형 결계가 설치되었다.
비록 이곳의 과학 수준은 현대의 지구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마나의 힘은 그 어떤 현대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현상을 너무나도 쉽게 연출해 낸다.
무려 800여 명의 지원자 전원이 일시에 돔 형태의 결계로 들어가게 되니, 드넓어 보이기만 했던 경기장이 비좁게 느껴졌다.
시험 참여자인 우리들은 모두 맨손에 보호복만 착용하고 있는 상태.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이 결계 안에는 독특한 힘이 작용합니다. 몸에 한계를 느끼게 되면 자동으로 밖으로 튀어 나가게 되죠. 물론 이 경우엔 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배틀 로얄을 벌이게 된다.
뭔가 야만의 시대로 온 듯한 느낌.
합격자를 뽑는 방식도 그리 합리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심사 위원 픽.
한마디로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탈락이란 의미다.
경기 초반에 결계 밖으로 튀어 나가도 탈락일 테고.
결론은…… 좀 튈 필요가 있다.
“호영이 형, 오늘은 무기도 못 쓰는데 괜찮겠어?”
“왜? 내가 무기 없으면 X밥일까 봐?”
“뭐, 그런 건 아니지만 형은 웬만해선 맨손 싸움 잘 안 하잖아.”
“총도 있고 칼도 있는데, 굳이 맨손으로 할 이유가 없으니까.”
“뭐 암튼 오늘 형이 총칼 내려놓고 싸우는 건 오랜만에 보겠네.”
“너 은근히 내가 빌빌 대길 바라는 말투인 거 같다?”
“에이 설마, 착각이겠지.”
이놈 말하는 뉘앙스가 어딘가 모르게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형,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별로 안 좋은 생각일 거 같은데.”
“아니야! 들어 봐.”
“알았어, 뭔데?”
“어차피 우승자는 형 아니면 나야. 저 빨간 머리 놈이 좀 신경 쓰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나랑 우승을 다투겠다니, 이놈이 진짜 내가 무기 없으면 X밥으로 보이긴 한가 보다.
그게 아니면, 27층에서 받은 권능이 어마어마하던가.
“그래서?”
“경기 시작하면 우리 둘은 멀리 좀 떨어져 있자. 마지막에 우리가 서로 우승을 다툴 수 있게.”
“……좋은 생각이라더니, 이거였어?”
“어.”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지.
안 그래도 김세용 말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나는 경기가 시작되면 바로 붉은 머리 녀석에게로 가 볼 작정.
처음 보는 녀석이고 당연히 아무런 원한도 없다.
단지, 붉은 늑대들이 야심 차게 키우는 놈이라니까 흥미가 생길 뿐이다.
야렌이 술 취해 이야기했던 ‘천하의 죽일 놈들’이란 말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으니까.
* * *
경기가 시작되자, 결계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800여명의 헌터 지원자가 동시에 펼치는 배틀 로얄은 실제 게이트의 포스를 가볍게 넘어섰다.
슈웅-
슈웅-
비명 소리와 함께 벌써부터 결계 밖으로 튕겨 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참가했는지 이해 못 할 수준이 존재하는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인 모양.
나는 붉은 머리를 향해 직진했다.
녀석도 그 의도를 눈치챘는지 그런 나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나?”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며 설마 자기에게 오고 있느냐는 표정.
그래서 대답해 주었다.
“어. 너.”
입 모양으로 말했지만 알아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놈 주변은 상당히 널럴하다.
시작하자마자 녀석이 주변의 여럿을 탈락시키기도 했고, 이 녀석의 유명세에 다들 쉽게 달려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
덕분에 그 수혜를 내가 본다.
놈은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나랑 얽혀서 주목을 받아 보려는 모양인데, 일단 의도는 좋네.”
“어.”
“결과는 많이 슬프겠지만.”
휘익-
붉은 머리의 신형이 순간 사라진다.
빠르다.
남소현 수준이라 예상했는데,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야.”
빨간 머리가 나타난 곳은 등 뒤.
녀석은 내 팔과 목을 제압하며 압박해 들어왔다.
놈은 나와 격렬하게 힘 싸움을 하면서도 말을 이어 갔다.
“신체의 한계를 느끼면 이 결계가 몸을 튕겨 낸다던데, 이렇게 계속 내가 잡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넌 궁금하지 않아?”
“……글쎄.”
“반항하지 못하도록 일단 뼈부터 좀 으깨 줄게.”
놈의 손아귀와 팔 전체에서 마나의 기운이 쏟아져 나온다.
엄청난 힘으로 내 뼈를 분쇄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놈, 남소현보다는 확실히 위다.
“오호. 꽤 버티는데? 여길 주목하고 있는 심사 위원들이 이미 합격 점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어.”
빨간머리 놈. 싸우면서도 말이 참 많다.
놀라운 건 나를 옥죄어 오는 힘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는 것.
화가 많이 난 게 분명하다.
녀석의 말대로 지금 이쪽을 주목하는 심사 위원들이 상당할 것이며, 듣보잡인 나랑 이런 형세를 보이는 것 자체가 망신일 테니까.
- 죽여 버려야겠어!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결계의 방탄 효과가 있다고 해도 죽이는 게 마냥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거대한 충격을 가한다면, 방탄 효과가 발동하기 전에 이미 죽은 목숨이 되어 있을 터.
그리고 이 야만의 시험은 지원자가 죽는 것 따위는 불의의 사고로 취급하게 되어 있다.
“뒈져!”
결국 빨간 머리는 힘을 폭발시키며 나를 향한 강한 살의를 드러냈다.
퍼어어억!
녀석은 그리고는 곧바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지금은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
“어업!”
그리고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따로 있을 것이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을 터.
바닥에 이 정도의 힘으로 처박혔으니 몸이 온전할 리가 없다.
정작 본인은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넌 일단 말이 너무 많아.”
나는 녀석에게 모범 답안을 보여 주었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말없이 무릎으로 안면을 찍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네 번…….
군데군데 마사지를 해 주었다.
횟수가 늘어나며 녀석의 얼굴은 피칠갑이 되어 간다.
물론 아무런 원한도 없다.
오늘 처음 봤으니까.
‘붉은 늑대들…….’
이놈을 야심 차게 키웠다고 하니 지금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란 듯이 더 패기 시작했다.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호감도: 8]
‘어?’
겨우 1 상승이지만 예상 밖의 타이밍에 거둔 수확.
갑자기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뭔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붉은 머리의 미공자.
‘진짜 또라이군.’
27층의 군주인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 생각만 하면 어이가 없다.
이곳은 다른 의미의 외모 지상주의가 판치는 공간이었다.
- 16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