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27층에 세계관엔 독특한 점이 있다.
몬스터가 존재하긴 하지만, 제한적 공간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존재한다.
게이트가 발생하면 그 주변에는 결계가 만들어지며, 그 결계 내의 공간만이 몬스터의 무대가 되는 것.
“그러니까, 그 결계 내의 사람이 모두 죽어 버린 후에야 게이트와 몬스터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그래. 그리고 그 공간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리지. 딸꾹!”
술고래처럼 생겨 말술을 마실 줄 알았는데, 야렌은 생각보다 술이 훨씬 약했다.
얼굴은 진즉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끔씩 발음이 꼬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건 그가 처음처럼 날 편하게 대한다는 것.
술이 가진 힘은 참으로 놀랍다.
“여기 독한 걸로 한 병 더요!”
나도 오늘은 좀 취해 볼 생각이었다.
이런 기회는 흔히 있는 게 아니니까.
“신참, 그런데 혹시 날 시험하는 거 아니야?”
“네?”
“어린애도 아닌데, 몰라도 너무 모르잖아. 꼭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그럴 만도 하다.
궁금한 점들은 돌리지 않고 바로 물어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커밍아웃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럼 저도 팀장님께 비밀 하나 털어놓을게요. 뭐, 고자 급까지는 아니지만.”
“얀마! 입조심 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여기 아무도 팀장님에게 관심 없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하시네요.”
“인마, 그래도 그렇지! 암튼 네 녀석 비밀은 뭔데?”
“팀장님 말이 맞아요.”
“뭐가?”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
“……미친놈, 취했구나.”
“우리 이 비밀은 평생 가져가는 거 맞죠?”
“오냐. 이 미친놈아. 크크크.”
야렌이 내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난 좀 더 편하게 질문들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마시자 마셔!”
우리는 서로 술잔을 채우며 좀 더 얼큰하게 취해 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헌터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일종의 용병 같은 개념이다.
게이트가 생기면 결계 안으로 진입해서, 몬스터를 처리하는 전사들.
그런 용병들이 집단을 이루어 황실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은 것이 바로 [길드]다.
“가장 유명한 5대 길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퀘스트의 달성 조건은 그 5곳 중 하나에 가입하는 것.
그리고 난 순순히 응해 줄 생각이었다.
“그믐달, 웅크린 하늘, 붉은 늑대들, 바람, 달빛의 유령.”
“그게 길드명인가요?”
“왜? 네가 살던 세상과 비교하면 촌스러운가 보지?”
“네.”
“미친놈. 크크크.”
“팀장님 생각엔 제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이곳 세계관의 무위 수준이 어떤지는 아직 모른다.
결계 안에 있던 자들은 전부 광산에서 일하던 인부였을 뿐이니까.
“미친놈,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얘기해.”
“뭐를요?”
“너 헌터잖아. 오늘 광산에는 무슨 목적으로 온 거냐?”
“다른 세상에서 왔다니까요.”
“너, 붉은 늑대들 출신만은 아니라고 말해 줘.”
붉은 늑대들.
야렌이 언급한 5대 길드 중 하나다.
“왜죠?”
“천하에 죽일 놈들이니까!”
그 말을 남기고는 야렌의 고개가 내려가기 시작한다.
‘어?’
쿠우웅!
야렌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소리.
놀라웠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긴 했어도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얘기하던 그가 바로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곯아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자더니.’
그나저나 붉은 늑대들이라…….
5곳 중 어디를 선택할까 고민이었는데, 야렌이 대신 선택을 해 준 것 같다.
그들이 왜 천하에 죽일 놈들인지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그건 천천히 알아 가면 될 터.
잠깐 눈만 붙이고 떠나야겠다.
* * *
내 행선지는 붉은 늑대들 길드 본단이지만 그 전에 잠시 들를 곳이 있었다.
광산에서 얻은 티그나노그의 룬, 이걸 가지고 무기 강화를 할 생각이다.
이 룬의 사기적인 장점은 강화 확률이 100퍼센트라는 것.
어떤 식으로 강화를 해도 터질 일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옵션이 뜨게 하려면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이그노의 대장간이었다.
“강화를 하신다고? 맡기려는 물건이 뭐요?”
“이겁니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총이었다.
“이게 뭐요?”
“총이라고 부르는 무기입니다만.”
대장장이 이그노는 내가 건넨 총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인 데다가 희한한 생김새.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걸 강화를 하겠다고?”
“네.”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시온과 총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두 무기 모두 보물급의 무구.
고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전설급 무구가 될 행복한 상황이지만, 총이 좀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총이 검보다 상위 등급의 무구여서가 아니다.
검은 사용자의 검술 수준에 따라 성능이 달라질 여지가 크기 때문.
반면에 총은 무구 자체의 성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요? 혹시 강화가 안 되는 무기도 있습니까?”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생긴 게 하도 요상해서 말이오. 단단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이걸로 타격을 하기엔 길이가 너무 짧고…….”
이그노는 총구를 잡고는 휙휙 휘둘러 본다.
“그건 주인장께서 고민할 문제는 아닌 거 같고, 강화나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제가 돈이 없는 관계로 현물로 대금 지불을 하려고 하는데.”
“뭐요?”
“안 되겠습니까?”
“꺼지시오. 이거 원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 가지고는!”
이그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다.
이러다가 소금 테러를 당할지도 모르겠다.
“물건이나 한번 보시죠. 여기 이거…….”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테이아의 장검이었다.
득템만 해 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레어 등급의 아이템.
이곳 세계관에선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흔하진 않을 것이다.
“아, 글쎄 냉큼 꺼지…… 라…… 고 말했던 건 좀…… 심하긴 했지. 흐음! 사과드리오.”
생각보다 빠른 태세 전환.
역시, 레어급이 괜히 레어급이 아니다.
“받으세요.”
이그노는 내가 건넨 테이아의 장검을 매만지며 내 표정을 살핀다.
마치 날 호구 보듯 하는 눈빛인데,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인 데다가, 강화 옵션만 잘 뜨면 훨씬 남는 장사니까.
이그노는 못 이기는 척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화만 잘해 주세요.”
“강화석은 가져오셨수? 없으면 여기서 취급하는 강화성도 구입이 가능하…….”
“여기요.”
나는 이그노에게 티그나노그의 룬을 내밀었다.
참 신기한 광물이다.
이 룬의 영롱한 은빛은 아무런 광원 없이 그 자체로 빛나고 있으니까.
“이거! 서…… 설마!”
이그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이 귀한 걸 이 괴상한 무기를 강화하는 데 쓰겠다는 거요?”
“잘 좀 부탁드릴게요.”
- 미친놈!!
마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그노는 나를 향해 수도 없이 미친놈이라 외치고 있었다.
“참고로, 저 안 미쳤어요.”
“누…… 누가 뭐라고 했소?”
“아, 혹시 절 미친놈 취급하는 게 아닌가 해서.”
강화 비용으로 지급한 게 꽤 고가의 아이템. 게다가 난생처음 보는 무구에 SSS등급의 강화석을 바르겠다니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그노는 총과 룬을 한참 동안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 이건 뭐, 똥 닦는 데 금휴지를 쓰는 것보다 더 하잖아!
“강화하고 나면 강화석은 바로 소멸되니 나중에 딴말하기 없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그노는 강화 테이블 위에 총과 티그나노그의 룬을 겹쳐서 올려놓았다. 그리고.
“후우!”
심호흡을 한 번 내쉬고는 마나 화로에 달군 망치로 총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따앙!
따앙!
망치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룬이 조금씩 총으로 흡수되며 마나가 균일하게 퍼져 나간다.
능숙한 손놀림에 안정적으로 퍼지는 마나의 흐름만 보더라도 보통 솜씨는 아닌 듯 싶다.
‘거기에 니케의 행운까지 겹쳐진다면.’
상당히 좋은 옵션이 뜨게 될 것이다.
따앙!
따앙!
망치질은 삼십 분가량 계속되었다.
이그노는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아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발!”
“왜 그러십니까?”
“이놈 이름이 총이라고 했소? 무슨 놈의 마나를 이렇게 끝도 없이 잡아먹는 건지. 내 대장장이 인생에 강화 한 번 하는 데 이렇게 오래 망치질을 해 본 건 처음이오.”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요?”
“뚝딱뚝딱해서 대충 열 번 남짓? 한번 들어 보시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총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전설급으로의 업그레이드는 확정적. 중요한 것은 옵션이다.
<홍염의 불도깨비>
- 등급: 전설
- 효과: 유효 사거리 1.5Km, 타깃 명중률 100%, 헤드샷 비율 30% 증가, 크리티컬 발동 비율 20% 증가, 연사 시 마력 소모 50% 감소
역시. 내 기대대로였다.
등급이 전설급이다 보니 파괴력은 두말할 것 없이 좋아졌을 것이며, 가장 마음에 드는 옵션은 역시 유효 사거리.
나에겐 절대 감각이 있기에 1.5Km 정도의 거리는 과장 좀 보태서 손바닥 보듯 할 수 있으며,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어떤 적이라도 곧바로 타격이 가능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홍염의 불도깨비라니, 조금 깨는 이름이다.
등급이 전설로 바뀌며 저절로 생성된 것.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미리 이름을 붙여 놓을 걸 그랬다.
[높은 등급의 무구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호감도: 7]
고작?
무려 전설 등급인데, 호감도가 이 정도만 상승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김세용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시작부터 호감도가 70이 넘는데.
어쨌든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다.
총을 강화했고, 만족할 만한 옵션도 얻었으니 이제 퀘스트를 하러 갈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잠깐!!”
“무슨 일입니까?”
“한 번만 보여 주시오. 그 총이라는 무기.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직접 강화를 해 보고 나니 이게 심상치 않은 물건이란 걸 직감한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마나를 먹어 치우는 놈은 처음이라 했을 정도니.
“뭐, 까짓것 보여 드리죠.”
나는 뒷산이 훤히 보이는 창문 하나를 열어 제꼈다.
숲세권의 대장간.
마침 산 중턱에 눈에 띄는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보인다.
“저 바위 보이십니까?”
“이 일대에선 유명하오. 원래 동굴이 있던 자리였는데, 어느 순간 저 바위가 나타나 굴을 가로막고 있어 다들 신기해하고 있지.”
“그럼 다시 뚫어 드리겠습니다. 그 동굴 말입니다.”
“뭐요?”
타아아앙!
홍염의 불도깨비가 불을 뿜으며 마력의 탄환이 타깃인 바위를 향해 쏘아져 나아갔다.
거리가 멀어 예전 같았으면 파괴력을 확신할 수 없었겠지만, 전설급이 괜히 전설급이 아닐 터.
날 망신시킬 일은 없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귀를 쫑긋 세우니 만족할 만한 폭발음이 들려온다.
“이…… 이게 뭐요!”
“총이라는 겁니다.”
씨익.
나는 이그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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