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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57화 (157/292)

157화

“열두 개의 기둥이라……. 제나, 너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내가 살던 세상의 종말을 이끈 것은 그 열두 존재들인가?”

나에겐 질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차원의 틈새에 들어오기 위해 지불한 금액만 72,400골드.

비록 다시 돌려받긴 했지만, 그건 돌려준 쪽 사정이니 나는 이 금액만큼 무언가를 얻어 갈 생각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본질적인 질문에는 답해 줄 수 없어.”

제나는 그런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딱 잘라 대답했다.

“이놈의 탑은 뭐 이렇게 알려 줄 수 없는 게 많은 건지 모르겠어! 사부도 그렇고 혈마도 그렇고. 그냥 속 시원히 다 까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잊고 있나 본데, 너희 플레이어들은 어디까지나 을(乙)의 위치야. 이 탑이 너에게 지속적으로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그걸 너의 권리로 착각해선 곤란하다고! 실험실의 쥐가 실험의 목적을 궁금해하는 거 봤어?”

실험실의 쥐.

문득 제나의 표현이 절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션과 보상이 존재하는 이 탑은 결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며 이 탑의 어딘가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지금 제나의 이런 표현은 나의 의문이 틀린 생각이 아님을 확인해 준 셈이다.

이 탑 속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

생각할수록 소름 돋는 일이다.

“쥐라고 비유해 주니 참 더럽게 고맙네. 어쨌든 27층부터는 그 열두 기둥의 영역을 차례로 경험한다는 거지? 네가 모신다는 그 존재도 포함해서 말이야.”

“어, 이제부터 탑 등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지.”

“이미 본격적이었던 거 아니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버렸을 텐데.”

“지금까지는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는 체(體)였던 셈이지. 그렇다고 본 게임이란 표현에 너무 겁먹을 건 없어. 플레이어들의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떨어질 거란 의미는 아니니까. 그리고 그분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당부하신 게 있어.”

“뭘?”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것.”

“유혹의 주체는?”

“뻔한 거 아니야? 이 탑의 다른 열두 기둥들이지.”

“그들이 날 유혹한다고? 왜?”

“넌 나름 돋보이는 플레이어니까. 물론 그분의 총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야.”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어떤 격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나가 말하고 있는 그 존재들은 사부를 뛰어넘는 초월자들.

그런 그들이 무엇이 아쉽다고 이러는 것인지, 제나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플레이어들은 한낱 실험 쥐들일 뿐인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배신하지 말라는 거로군.”

“일단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네. 그분의 심오한 뜻까지는 아직 네가 알 필요가 없으니까.”

“아직…… 이라.”

“어, 아직은. 참고로 이 차원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대화는 절대 비밀이야. 내가 모시는 그분 외에는 아무도 엿볼 수가 없거든.”

“그 열두 기둥이라는 존재들도?”

“물론이지.”

이건 의외의 일이다.

어찌 되었든 이곳도 탑의 내부일 텐데 이런 은밀한 공간이 존재한다니.

“그런데 제나, 네가 제안한 건 나에게 너무 불리한 조건이야. 27층부터 플레이어들은 열두 기둥의 영역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고 했는데, 네가 모시는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존재에게 찍히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거잖아. 전부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다른 분들에게 밉보이라고 한 적 없어.”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그 누구에게도 호감도 51 이상은 얻지 말 것. 그것이 조건이야.”

“호감도?”

“그건 27층을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알게 될 개념이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누구에게라도 호감도가 -51 이하로 내려가는 것 역시 곤란해. 생존이 상당히 빡세지거든.”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곧 알게 될 거니 걱정할 거 없어. 어쨌든 중요한 건 그분이 널 총애했던 것과 네가 그동안 누려 온 혜택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 너에게 72,400골드를 돌려준 의미도.”

“그게 끝이야?”

“어.”

“네가 모시는 그 존재가 누군지도 여전히 안 알려 주는 거야? 이 경우엔 내가 굳이 호감도를 조절할 이유가 없잖아!”

“알려고 하지 마.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야, 제나! 그럼 이것만 대답해 봐. 신주아는 어째서 계시를 받는 거지?”

[ㅋㅋ]

[그럼, 건투를!]

[그리고 오늘 나를 때린 건 두 배로 되갚을 날이 있을 거야.]

[ㅋㅋ]

[안뇨오옹!]

“이렇게 끝이라고?”

돌연, 희미해지는 주변 배경.

정말로 이것이 끝이었다.

첫 번째 방문처럼 선물이 있는 것도, 대단한 조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로선 별 영양가 없는 방문.

‘그냥, 배신하지 말라는 거잖아.’

신주아에 대한 얘기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나는 다시 로비로 복귀했다.

* *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26층이 이렇게 갑자기 끝나 버렸다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단독으로 돌진해서 오크 문양의 깃발을 얻어 미션을 클리어해 버렸으니,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는 것.

이렇게 무사히 로비로 복귀했으니,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호영! 네가 한 거야? 갑자기 혼자 냅다 뛰어갔잖아!”

남소현은 바로 나부터 찾았다.

“어, 맞아. 내가 끝냈어.”

“치사하게 또 혼자!”

“그게 중요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여간 남소현 이 녀석은 나를 과하게 의식한다.

나를 같은 살성으로 믿고 있으니 동료 의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견제도 한다.

“우린 이런 거 익숙한데 말입니다. 이호영 씨 버스 타는 거요.”

서준호는 나를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여간 배알도 없는 놈들!”

“뭐? 이놈의 기지배가!”

이번엔 김세용이 나섰다.

이놈은 틈만 나면 남소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혹시라도 내가 없는 상황이 생긴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야, 돼지. 너 죽을래?”

이 장면. 아주 익숙했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세용이가 손서연에게 먼지 나도록 맞은 적이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은 뜻밖의 메시지.

[26층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빠른 배속으로 보겠습니다.]

“어?”

“왜?”

갑자기 로비에 나타난 홀로그램 화면.

오늘처럼 지난 층의 리플레이를 보여 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몰래카메라의 대미 같은 거로군.’

우리가 상대했던 괴물이 사실은 괴물이 아니라 플레이어였음을 밝혀 주는 것.

그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의 빌어먹을 놈들은 당황해하는 우리들의 표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주 유치하게도 말이다.

“서…… 설마!”

“플레이어끼리 싸운 거였다고?”

“와! 씨!”

그리고 사람들은 찐 리액션을 보이며, 탑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중.

우리들이 더 놀랄 만한 이유도 있었다.

“손서연이 왜 저기서 나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총 쏘는 오크. 녀석의 정체는 손서연이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나 역시 매한가지지만, 그 마음을 속으로만 삭였다.

어쩌면 중증 관음증 환자일지도 모를 탑 놈들을 만족시켜 줄 순 없었으니까.

‘손서연.’

녀석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마음이 먹먹해진다.

마지막 순간, 나의 엘리시온에 가슴이 뚫려 버렸던 그 잔상이 뇌리에 박혀 온다.

항상 무표정하게 우리 주변을 겉돌았던 그녀의 어색한 모습과 무뚝뚝한 말투가 오버랩 되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왜 하필…….’

리플레이가 모두 종료된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각자 저마다의 충격 속에서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진 또 하나의 메시지.

[패한 구역에는 재앙이 내려집니다.]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려진 재앙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탑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미 끝난 결과에 대고 그저 바랄 뿐이었다.

부디 살아 있어 달라고.

* * *

혹시나 구역이 다시 분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26층의 미션을 위해 두 구역이 통합되었으니, 목적이 달성된 지금은 원상 복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 사실 내가 바라는 그림이기도 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세용과 남소현은 언제라도 사고를 칠 것만 같았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계속 가는 거야?”

“저놈 하나만 빼면 멤버 구성이 뭐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역시 부딪히는 두 사람.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합류한 다섯의 전력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A급들이다.

게다가 직업 구성도 다양하니, 원만하게 조화만 이루어진다면 상당한 시너지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지난 26층에서처럼 말이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방금 전 저에게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신주아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야, 신주아! 그런데 너는 26층에서 그 괴물들이 플레이어였던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이미 지난 일이지만, 그렇다고 대가 없이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와! 이미 지나 버린 과거에 대한 계시도 돈 받고 팔겠다고?”

남소현이 모두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렴해지긴 했지만 대가는 필요합니다. 혹시 가격이 궁금하십니까?”

“됐어! 27층의 계시나 얼마인지 말해 봐.”

“21만 8천 골드입니다.”

“뭐?”

예전과 비교한다면 턱없이 높아진 가격.

이쯤 되면 사지 말라는 의미다.

“미친! 이게 진짜 우리를 호구로 아나!”

“강요는 하지 않아요. 계시의 대가를 지불하는 건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자유니까.”

신주아는 항상 고고하면서도 초연하다.

혹시 호구 한 놈만 걸려 봐라. 이런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계시를 구입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게 그렇게까지 비싼 정보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전송 받은 공략집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27층을 다스리는 군주는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입니다. 플레이어들은 27층의 시간이 모두 도과할 때까지 생존해야 합니다.]

[군주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제각각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 호감도에 따라 권능을 받을 수도, 페널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호감도는 -100부터 100까지의 숫자로 측정됩니다.]

[중요! 27층에서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높은 등급의 무기를 제작 혹은 강화하는 것입니다.]

[27층의 초기 호감도는 못생길수록 높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좀 황당하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못생길수록 유리하다니.

어쨌든 내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가 과연 나에게 공략집을 보내는 존재인지의 여부.

사실 아닐 확률이 높을 거란 짐작은 하고 있다.

그자가 첫 번째에 바로 등장할 것이라면, 차원의 틈새로 나를 소환하여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신속하게 했을 리가 없으니까.

‘일단 아니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공략하는 것으로.’

[27층으로 이동합니다.]

26층을 마친 뒤, 조금의 자유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공략집에서 미리 안내받은 대로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과제는 ‘생존’.

그리고 상태창의 상단에는 나의 초기 호감도가 표시되었다.

[호감도: -11]

‘투철한 불꽃의 절름발이’가 나를 대하는 초기 감정은 ‘호’보다는 ‘불호’라는 의미.

일단은 안도할 수 있었다.

이게 높으면 높을수록 상처를 받는 일이니까.

“와하하하! 시작부터 운이 좋아! 내가 조금만 분발하면 권능을 주겠다는데?”

김세용이 방금 탑으로부터 개인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다.

녀석의 상태창에 표시되어 있는 호감도는 무려 73으로 우리 중에서 압도적으로 1위.

세용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 15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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