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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53화 (153/292)

153화

점점 투명해지던 로비의 한쪽 벽은 결국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구역 통합은 그들에게도 갑작스러웠을 테니까.

그리고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나였다.

“어?”

“이호영!”

구역의 경계 너머에서 온 다섯 명.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남소현, 조병국, 이문학, 이문성, 신주아.

이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혹은 적어도 이렇게 빨리 재회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호영! 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돌아오지 않아서 뒈져 버린 줄 알았다고!”

남소현은 내게 다가와 주먹으로 명치를 때렸다.

갑작스러운 친한 척에 살짝 당혹스럽다.

“거기서 내가 죽을 리가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막상 안 오니까 별 생각이 다 들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남소현에 이어 이문학, 이문성 형제는 나에게 가볍게 포옹을 해 왔다.

나에 대한 두 형제의 마음이 애틋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문학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이호영.”

우리 구역의 동료들은 이 광경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호영 씨, 여기 이 사람들은 누구죠?”

“아, 그게 말입니다.”

양쪽 모두에게 설명이 필요한 시간. 나는 짧게 요약했다.

한쪽은 탑의 초창기 때부터, 그리고 다른 한쪽은 떠나 있는 동안 함께했던 임시의 동료였다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부르르 주먹을 떨고 있는 김세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세용아? 뭐 문제 있어?”

“형, 저기 저 여자…….”

김세용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남소현을 가리킨다.

“그런데 너 뭔가 손동작이 조신하다?”

내 말에 김세용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야 나는 20층 피의 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랬었지.’

남소현에게 한 방에 썰렸던 그때 김세용의 모습이 그려진다.

녀석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정작 남소현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형, 이건 혹시 운명 같은 기회가 아닐까?”

“뭘 하려고 인마.”

“뭐겠어, 저년 찢어 죽여 버려야지.”

녀석의 주먹이 여전히 부들부들 떨린다.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 멀었다.

아무리 피의 날 보정이 없더라도, 남소현은 김세용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너, 지금 떨고 있어.”

“떨긴 개뿔! 흥분돼서 그러는 거야! 형 없는 동안 나도 꽤 강해졌다고.”

“그래서 더 위험한 거야. 예전 같으면 고통 없이 한 방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젠 저항을 해 버리게 되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김세용의 몸에 직선 열 개를 그렸다.

“이렇게 네 몸이 도화지가 되어 버릴 수 있다고.”

“무…… 무슨 말을 그렇게!”

25층에서 보름 넘게 남소현에게 검술을 가르친 게 바로 나다.

두 사람 간의 전력 차 정도는 바로 가늠할 수 있다.

“나중에 세용아.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김세용을 한창 달래고 있을 무렵, 탑은 우리에게 전체 메시지를 보내왔다.

[26층으로 이동합니다.]

* * *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깊은 숲 속.

그리고 그곳에는 위화감 넘치는 성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오크의 성을 함락하십시오.]

[함락 조건: 성의 맨 상층부에 있는 오크 문양의 깃발을 획득하기]

[제한 시간: 2시간]

[실패 시: 재앙의 출현]

“오크의 성?”

“26층에서 고작 오크라고?”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성의 규모가 꽤 크긴 하다.

층수로는 4층으로 평범하지만, 넓게 쭉 뻗은 형상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이 성 전체를 오크로 가득 메운다 해도 26층까지 살아남은 열두 플레이어의 전력은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크로드 같은 최상위 변종 오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놈의 탑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고민할 거 뭐 있어! 그냥 쉬어 가는 층인가 보지!”

김세용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전면에 나섰다.

그러면서 녀석은 남소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혼자서만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것.

정작 남소현은 김세용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이다.

“사실 제게 26층과 관련된 계시가 있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정보를 골드로 구입하시면 됩니다. 제 계시의 신빙성은 이호영 씨가 보증해 주실 수 있을 테고요.”

“계시를 돈 주고 산다고요? 도대체 얼맙니까?”

신주아의 제안에 서준호가 흥미를 보였다.

“6만 4천 골드입니다.”

“뭐라고요? 이호영 씨, 이거 사기 아닙니까?”

서준호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기는 아니지만 가격이 과하긴 하다.

그래서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

나는 공략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성을 지키는 오크들은 실제로는 다른 구역의 플레이어들입니다. 양측은 서로를 몬스터로 인식하게 되며 서로 말과 문자가 통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격과 수비를 맡게 되는 양측은 서로 대등한 전력으로 매칭됩니다.]

오랜만에 벌이는 플레이어 간의 공성전.

보통은 이런 종류의 미션을 최악으로 여기고는 한다.

플레이어는 몬스터보다 훨씬 까다롭기도 하고, 게임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의 PK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둘뿐.’

나는 사람들이 신주아에게서 계시를 구입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PK 없이는 이번 미션을 뚫어 내는 것이 불가능.

그럴 바엔 오크를 오크로 인식하는 것이 편할 거란 생각이었다.

오크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만 내가 미리 경고하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한번 사 볼까?”

남소현이 고민하는 눈치.

살성인 이 녀석은 진실을 알게 되면 더 날뛸지도 모른다.

“내가 살 때는 호구라면서?”

“혹시 또 모르잖아! 26층이 극악의 난이도일지.”

“왜? 자신 없어? 하긴 검술 수준을 보면…….”

“이 개자식이!”

“나 끝까지 말 안 했는데?”

“딱 봐도 의도가 불순하잖아!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안 사! 안 산다고!”

결국 남소현을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신주아의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호영 씨, 영업 방해는 좀 아니라고 봅니다.”

“아, 미안.”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항상 초연한 표정만 짓고 있길래, 신주아가 이걸 돈벌이로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곳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그렇군요.”

그러고는 바로 침묵.

역시 신주아다웠다.

“자자! 이제 다들 시작하자고! 우리가 머뭇거리는 지금도 제한 시간은 흐르고 있잖아?”

“성문이 양쪽으로 두 개야. 구역별로 나눠서 진입하는 게 어때?”

지금 막 통합된 구역에서 어느 한쪽이 단일 지휘권을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

그래서 양쪽 성문으로 각각 진입하자는 제안에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유일한 문제는 바로 나였다.

“이호영, 그런데 넌 어느 쪽이야?”

“호영이 형, 당연히 우리랑 함께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방금 25층까지 우리랑 같이 있었는데, 당연히 이쪽이지.”

남소현이 앙칼진 목소리로 김세용을 바라보며 내 팔을 살짝 당겼다.

세용이 녀석도 지지 않고 바로 내 반대쪽 팔을 잡았다.

양쪽 팔에서 느껴지는 손아귀의 힘이 조금씩 거세어져 간다.

지금 이 상황, 날 서로 데려가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신경전의 의미도 강했다.

생전 처음 보는 두 세력이 만난 것이니까.

‘근력만 놓고 보면 세용이가 뒤처지진 않는데.’

양쪽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힘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의도치 않게 세력다툼의 전초전이 되어 버린 꼴.

물론 이 유치한 싸움의 승패대로 내가 끌려가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세용이 쪽으로 붙어야 밸런스가 맞겠지.’

본래 그럴 의도이기도 했고, 밸런스 상으로도 이쪽이 합당하다.

성을 지키고 있는 상대편 전력은 우리와 대등하다고 했으니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터. 더더욱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하아아압!”

김세용의 기합 소리와 함께 내 몸은 한쪽으로 확 이끌렸다.

물론 김세용 쪽이다.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거만해진다.

“호영이 형은 우리와 함께 간다.”

득의양양하게 목소리에도 힘이 빡 들어가 있다.

이것도 복수의 일부로 생각하는 듯하니, 네가 기뻤다면 그것으로 됐다.

남소현은 황당한 표정.

설마 본인이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엔 근력 싸움으로 시작해도 결국에는 마력 싸움으로 귀결되며, 마력이 우위인 쪽은 역시 남소현이다.

‘넘치는 마력은 살성의 특징이니까.’

교묘하게 승부를 조작하느라 나도 고생이 많았다.

“어쩔 수 없네. 이쪽으로 가는 수밖에.”

팀이 나눠졌으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였다.

* * *

공략집의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공수 양쪽은 서로 대등한 전력.

출혈 없이 이번 층을 돌파해 내긴 어려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성문으로 진입합니다. 다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오늘은 이호영 씨가 더 조심스러운 거 같네요. 그냥 오크 사냥한다고 편하게 생각하면 오산일까요?”

“네. 아마도.”

“뭐, 이호영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내가 몇 번이나 주의를 환기시켰기에, 이제 이들은 바짝 긴장하는 모습.

나는 한 손엔 총을, 한 손엔 엘리시온을 들고 성문으로 다가갔다.

“형이 총을 들고 있으니까 뭔가 이상해. 총은 뭔가 악당 전용의 느낌이었는데.”

“손서연 때문에?”

“뭐, 그렇지. 그러고 보니 손서연한테도 갚아야 할 빚이 있었는데.”

세용이 녀석.

비주얼과 다르게 여자들한테 참 많이 맞고 다닌다.

“이제 문 연다.”

총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오크의 성.

파아악!

나는 문을 걷어찬 후, 가장 먼저 1층으로 진입했다.

취이익!

취이이익!

오크 특유의 괴성이 들려온다.

우리를 향해 접근하는 세 마리의 오크.

물론 실제로는 플레이어다.

‘과연 저들의 눈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보일까?’

똑같이 오크? 아니면 트롤?

무엇으로 보이든 지금 이 순간엔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세 발의 연사.

차원의 틈새에서 받은 선물을 처음으로 시험해 보았다.

역시, 연사임에도 마력 소모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세 마리의 오크는 마력의 탄환에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손속에 정은 두었다.

어차피 섬멸전이 아니니까.

4층에 존재할 오크 문양의 깃발. 우리는 그것만 찾으면 된다.

“형! 총 성능 죽이는데? 어쨌든 내가 가서 마무리할게.”

“됐어, 세용아. 2층으로 가는 계단부터 찾아.”

“왜? 저 냄새 나는 오크 놈들을 죽이면 경험치도 얻을 텐데.”

“그냥 놔둬. 괜히 1층에서 지체하지 말고.”

“체! 알았어!”

미니맵을 보면 2층부터가 본격적인 무대다.

상당히 많은 붉은색 점들.

어쩌면 수비하는 상대편은 꽤 많은 구역의 연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직력도 상당히 엉성하겠지.’

그런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대편이 플레이어였음을 몰랐으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알고 있음에도 모두 죽이며 돌파해 나가는 것은 영 찝찝한 부분이다.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2층에 아주 위험한 오크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공략집을 보내올 정도면 정말 위험하긴 한가 보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총소리를 들었다.

- 15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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