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25층을 클리어한 후 내가 도착한 곳은 로비가 아니었다.
차원의 틈새.
그곳에서 흘러나온 푸른 광명은 날 빨아들이듯 잡아당겼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은 날 어디론가 인도해 주었다.
이 모든 광경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었으며, 종교적 느낌마저 주었다.
‘하긴, 계시라는 단어의 어감부터가…….’
그런 이유로 무언가 장엄하고 엄숙한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곧 대면하게 될 것은 어쩌면 초월적 존재일지도 모르니까.
번쩍-
찰나의 순간만큼 암전이 일어난 뒤, 어떤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요정들이 살 것만 같은 이색적인 느낌의 숲이었으며, 그곳에 한 소녀가 있었다.
“안녕!”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모든 이미지들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어. 안녕.”
나도 얼떨결에 인사를 해 주었다.
열세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
사실 소녀라고 단정 짓기에도 애매했다.
어딘가 모르게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어쩌면 소년일지도 모르니까.
외양 자체도 국적 불명의 느낌.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인종, 굳이 분류하자면 백인 계통이겠지만 이 역시 애매했다.
“축하해. 무려 25층까지 죽지 않고 생존한 거.”
“……어.”
사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 소녀 혹은 소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뭘 기대하고 여기 왔는지는 잘 알겠는데, 일단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아니야.”
그건 사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내게 그 어떤 경외심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일말의 위압감조차 주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너 좀 독특하네? 내가 누군지부터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일단 넌, 내가 기대했던 존재는 아니니까.”
“네 기대가 너무 과했던 거야. 그러고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어. 격(格)이 다른 존재를 직접 대면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니.”
“……무슨 의미지?”
“난 네가 기대하는 그분의 대리인이야. 격이 다른 두 주체를 이어 주는 일종의 연결 고리라고나 할까?”
“결국 내가 기대했던 건 여기에 없다는 뜻인가?”
눈앞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휴먼! 당연한 일에 너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지 말라고!”
김이 샜다.
“내가 여기 오는 데 얼마를 썼는지는 알고 있어?”
“어. 용케 그걸 구해 오더라?”
“알고 있으면 지금부터 네가 뭘 해야 할지도 알고 있겠네.”
지불한 액수만큼은 무언가 얻어 갈 생각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환불이라도 받든가.
그 순간, 내게 메시지 하나가 전송되었다.
[호구 왔는가?]
[ㅋㅋㅋ]
순간 사고가 정지한다.
“뭐지?”
“크크크. 농담이야.”
“……설마 방금 이 메시지…….”
“어. 내가 보낸 거야.”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어?”
[이런 식으로 말이지. ㅋㅋ]
“그럼 지금까지 나에게 공략집을 보낸 게…….”
[그래. 그동안 메시지를 보낸 건 나야. 물론 모든 승인은 그분이 하시는 거지만, 메시지 전송 같은 허드렛일까지 직접 하실 수는 없는 거잖아?]
[ㅋㅋㅋㅋㅋ]
소녀는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깔깔댔다.
사실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메시지를 작성한 것이 이런 꼬맹이였을 줄이야.
[재밌지 않아?]
[리액션이 좀 별론데.]
[ㅋㅋㅋ]
“그만 좀 보내. 사람을 앞에 두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기연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비록 이 녀석은 대리인일 뿐이지만, 그 존재와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네가 지불한 금액이 31만 4천 골드였지? 여기서 그만큼은 얻고 가게 될 거야. 그분은 절대 휴먼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분이 아니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해 갈 필요가 있겠다.
지금 이 상황은 결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너는 누구지? 날 휴먼이라 부르는 걸 보면 사람은 아닌 거 같고.”
일단은 가벼운 질문부터.
“어, 잘 봤어. 난 너희 휴먼들과는 좀 다르거든.”
[이를테면 이런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것만 봐도 다르다는 걸 알겠지? 유사 인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이해하기 편할 거야.]
[ㅋㅋㅋ]
[그리고 만약 날 꼬마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너희 식으로 계산하면 네 할머니의 할머니뻘은 될 테니까.]
“어쨌든 여자라는 거네. 이름은?”
[제나.]
“제나, 날 앞에 두고 굳이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어?”
[일종의 중독 같은 거야. 너희 휴먼들도 비슷하지 않나? ㅋㅋ 그분이랑 있을 때는 이거 참느라고 얼마나 힘든 줄 모르지?]
그놈의 ㅋㅋ 은 어디서 배운 건지.
“도대체 네가 말하는 그분은 누구지?”
“하긴, 넌 그걸 알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니까. 참고로 이 대답의 가치로 31만 4천 골드는 진짜 싼 거야.”
“알았으니까 말해 봐. 그게 누군지.”
[두구두구두구두구!]
[ㅋㅋ]
[ㅋㅋ]
제나는 뭐가 재밌다는 건지 혼자 ㅋㅋ을 남발하며 즐거워했다.
순간 이 꼬맹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공략집에 대한 환상도 깨지려고 한다.
[네가 궁금해하는 그분은 탑을 떠받치고 있는 열두 기둥 중 한 분이야.]
그리고 그다음의 멘트를 기다렸다.
“……설마 그게 끝이야?”
[끝.]
“그게 31만 4천 골드의 가치라고?”
“응. 싸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참고로 그분의 이름까지는 알려 줄 수 없어.”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리고 그분은 널 아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셔.]
“왜지?”
[넌, 종말이 시작되기 전부터 선택받았으니까.]
사실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였다.
내가 이 종말의 탑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왜 하필 나?
“종말 전에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실버 고블린이라는 괴물을 구해 준 것밖에 없는데.”
[쉿!]
“그 이야긴 다시 발설하지 마. 앞으로도 절대. 그 누구에게도.”
제나의 분위기가 돌연 바뀌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그녀의 표정이 워낙 정색을 하고 있었기에 그 생각을 거두었다.
도대체 그놈의 실버 고블린이 무엇이기에.
“대신 다른 질문을 받아 줄게. 그 분께서 허용한 범위의 것이라면 말이야.”
“그럼 추가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가 말하는 그분이 날 관심 있게 지켜본다는 것은, 내가 결국 이 탑의 마지막을 보길 원한다는 것인가?”
“날카롭네.”
“위기의 상황 때마다 항상 도움을 받아왔으니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네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리고 네가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면 더 정확한 걸 알게 되겠지. ㅋㅋ]
조금은 애매한 답변이다.
아직은 모든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럼, 혹시 나뿐인가? 그분이 선택한 플레이어 말이야.”
“조금 곤란한 질문이긴 한데, 한 가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게 있어.”
[그분이 가장 편애하는 건 바로 너야. ㅋㅋ 그럼 질문 타임은 여기까지만. 이제부터는 그분이 주는 선물을 받을 시간. 기대해도 좋을 거야.]
“선물?”
“자, 여기.”
제나가 내 머리 위에 은빛 가루를 뿌린다.
그리고는 메시지 창이 팝업처럼 튀어 오른다.
[저격의 성능이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연사 시 마력의 소모가 50% 감소합니다.]
[저격 기능에 곡사를 추가하였습니다.]
물론 제나가 장난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다.
내 상태창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진짜 선물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어. 조건 없이. 그리고 하나 더.”
“또?”
“앞으로 넌 신주아의 계시 없이도 이곳에 올 수 있게 될 거야. 한번 연결 고리가 만들어졌으니까.”
“아무 때나?”
“아니. 일정한 조건을 만족할 때만. 물론 골드도 많이 필요할 거야. 그리고 넌 이곳에서 골드의 가치만큼의 것을 얻어가게 되겠지.”
제나의 말은 틀렸다.
31만 4천 골드, 이번에는 그 이상의 것을 얻어 가는 느낌이다.
항상 선물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골드를 모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그리고 일단은 엘릭서를 구입하는 것부터 추천할게. 그렇게 오염된 몸으로 차원의 틈새로 들어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가.]
“벌써?”
[오염된 네 몸에선 악취가 나거든.]
“난,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제나는 작별을 서둘렀다.
[그럼, 또 보자.]
[ㅋㅋ]
제나의 인사와 함께 돌연 눈앞의 배경이 바뀌기 시작한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어쨌든 파견 기간이 모두 끝났으니 지난 동료들을 만나러 갈 시간.
부디, 모두 생존해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 * *
“이호영 씨!”
“호영이 형!!”
익숙한 목소리들이 나를 반겼다.
나는 로비의 상황을 빠르게 스캔 했다.
놀랍게도 모두가 그대로다.
“모두 무사했네요.”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 다섯 층 중에는 상당한 난관도 있었기에 어쩌면 못 볼 동료들도 있을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영이 형 없더라도 나름 잘 돌아가더라고! 다들 내 활약상 좀 읊어 좀 봐 봐.”
김세용이 침을 튀며 으스댔다.
“세용이 형 덕에 죽다 살았어요.”
고용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명의 낙오자.
아마도 어린 용우가 낙오했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는 가장 능력치가 떨어지니까.
하지만 김세용이 용우를 구출하러 간 것은 의외였다.
“세용이 네가 직접 자원해서 구하러 갔다고?”
“당연하지. 내가 의리 빼면 시체잖아. 안 그래 용우야?”
“충성충성!”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모두의 상태가 좋아 보였고, 준수하게 성장했다.
사실 이번 파견은 이들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의존하느라 홀로서기 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텐데, 나 없이도 다들 잘 해낸 모양이다.
“그런데 형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던 거야? 별일은 없었고?”
“나? 얘기하자면 좀 긴데.”
포식자의 특성과 함께 저격 스킬을 얻은 스토리.
얘기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혼자 너무 다 해 먹는 것 같아서.
심지어 차원의 틈새에 간 이야기는 할 수도 없다.
그때였다.
탑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26층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바로?”
[26층은 2구역 연합 미션입니다.]
[일시적으로 두 개의 구역을 통합합니다.]
메시지 창과 함께 로비의 한쪽 벽이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연합 미션?”
“그럼 상대편 구역이랑 싸울 필요는 없는 건가?”
모두가 숨을 죽이며 허물어지고 있는 로비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경계 너머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다섯의 실루엣.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전송된 공략집.
이것을 받는 느낌이 예전과 다르다.
메시지를 보내는 존재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까.
공략집의 내용은 아주 정제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ㅋㅋ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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