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야, 이호영! 너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남소현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팔을 들어 올려 검게 물든 피부를 내게 보여 주었다.
‘너무한다라…….’
이 말의 행간에 무슨 뜻이 생략되어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같은 살성끼리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말일 터.
내가 본인보다 이문학, 이문성 형제를 더 챙기는 모습에 삐쳐 있는 것이다.
“내가 원래 좀 호구잖아.”
내가 씨익 웃어 보이자, 남소현은 투덜대며 말했다.
“알았어! 호구라고 안 한다고! 이 치사한 새끼야!”
“호구 호영. 라임도 맞는 것이 입에 잘 달라붙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하라고. 나쁜 놈아!”
남소현 성격에 이쯤 했으면 거의 비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
이제는 치료를 해 줘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엘릭서는 꽤 비싼 아이템이니까.
“6만 골드.”
“뭐?”
“치료제를 조달하는 게 공짜는 아니거든.”
엘릭서 200mL짜리 한 병의 가격은 7만 골드.
적어도 반 병 가까이는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남소현 같은 경우 꽤 넓은 범위에 걸쳐 피부가 오염되어 있었으니까.
대략 2만 5천 골드 정도를 남겨 먹는 셈인데, 더는 욕심내지는 않기로 했다.
머지않아 탑은 전체 메시지로 치료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이렇게 비싸! 너 쌍둥이들한테도 돈 받았어?”
“싫으면 말고.”
“누가 싫대?”
그러면서 남소현은 신속하게 내게 6만 골드를 송금했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남소현에겐 이 정도의 여력은 있다.
‘조금 더 털어먹을 걸 그랬나?’
치료는 아주 간단하다.
오염된 피부가 살아날 때까지 엘릭서를 투여하는 것.
별다른 기술은 필요 없다.
“눈 감아.”
“감았어.”
“입 벌리고.”
“아아.”
“끝날 때까지 눈 뜨지 마. 그럼 효과가 없어지니까.”
“아았떠.”
엘릭서는 무색무취이기에, 내가 이야기 하지 않는 한 본인의 입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벌컥벌컥-
남소현이 엘릭서를 들이키자 검붉었던 피부의 색이 감쪽같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신비한 물건이야.’
쌍둥이를 치료하는 동안에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결국 괜찮을 것이다.
신주아는 멀리서 날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지금 내가 하는 행위는 일종의 천기누설.
하지만 나는 어떤 페널티도 받고 있지 않으며, 아주 여유롭게 3명째를 치료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계시]와 내 [공략집]이 동일한 주체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걸 한 번 더 확인한 셈이다.
‘그나저나 신주아, 아직이냐?’
나는 그녀로부터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알아내길 원했다.
문제는 그 정보가 나에게 도달하기 위해선 한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
바로 정보의 가격이 매겨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럽게 번거로운 설정,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곧 24층.’
시간이 없다.
25층을 클리어하면 나는 원래의 구역으로 되돌아가야 하니까.
* * *
[24층의 미션은 2인 1조로 진행됩니다. 파티를 구성하십시오.]
[남은 시간: 1시간]
이 구역의 인원은 여섯.
그중 쌍둥이 둘은 사실상 한 몸이었으니, 남은 네 명이 조를 편성해야만 했다.
“신주아, 이번엔 따로 계시받은 거 없어?”
전체 메시지가 있은 후 남소현이 바로 신주아를 찾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계시를 의심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단지, 그 계시의 가성비가 문제일 뿐.
“……계시는 없습니다.”
“없다고? 매 층마다 있는 거 아니었어?”
“제가 그렇게까지 꿀을 빠는 건 아닙니다만.”
“하긴, 탑에서 매번 꿀 빤다는 것도 이상하지?”
남소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쓸데없이 저 혼자 신주아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나에게도 공략집은 전송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엔 높은 확률로 무난한 층이다.
그런데 사실 내게 중요한 것은 24층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주아와 한 조가 되는 것.’
이것이 포인트였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과묵하고 재미없는 타입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내가 알고자 하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이니까.
“어차피 쌍둥이 둘은 지들끼리 파티를 할 테고. 맞지?”
남소현의 질문에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팀은 어떻게 나눌까?”
그러면서 남소현은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빛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쌍둥이끼리 뭉치는 마당에, 살성끼리도 뭉쳐야 하지 않겠냐는.
……물론 사절이다.
“사랑의 작대기라도 타 보는 건 어때?”
조병국의 제안이었다.
“멘트가 너무 썩었어. 무슨 쌍팔년도식 예능도 아니고.”
“썩었다는 말엔 저도 동의합니다.”
남소현과 신주아가 동시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왜? 재밌겠는데. 조병국, 네가 먼저 시작해 보는 게 어때? 사랑의 작대기 말이야!”
이문학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조병국을 부추겼고, 거기에 이문성까지지지 선언을 하자 조병국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머지도 동의한 것으로 알고 내가 먼저……. 흐흐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딱히 반대도 없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조병국이 나를 포함하며 남은 세 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실, 신주아만 아니었다면 조병국과 파티를 해 보고 싶긴 했다.
가장 강한 플레이어이기도 하지만, 이 녀석이 가진 [절대 민첩]의 특성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건, 탑 전체에서도 거의 없을 아주 희귀한 특성이니까.
“내 사랑의 작대기는……. 흐흐흐.”
그런데 조병국 이 녀석이 갑자기 과몰입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정말로 리얼 연애 예능인 것처럼 말이다.
부끄러움을 상실한 듯한 조병국의 말투와 표정에 남소현과 신주아 두 사람은 시선을 외면했다.
장난을 가장하고 있지만 이놈.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기에 더욱 황당했다.
심지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선택을 하려 한다.
‘미친놈.’
나는 이미 마음의 목소리를 들었기에 결과를 알고 있었다.
결국 조병국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나라고?”
남소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싫어!”
아주 단호했다.
“나, 지금 차인 거야?”
조병국은 쿨한 웃음을 지었고, 나는 녀석의 씁쓸한 마음을 읽었다.
전형적인 모쏠의 모습이다.
“차이긴 뭘 차여 미친놈아! 우리가 사귄 것도 아닌데. 그리고 제발, 파티 구성하는 거에 이상한 플래그 좀 세우지 마.”
어찌 되었든 이제는 작대기를 받은 남소현의 차례.
그녀는 주저 없이 선택을 했다.
바로 나.
예상했던 바였다.
“싫어.”
“뭐?”
반응을 보아하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
“싫다고.”
동족의 복수를 위해 약간의 싸늘함을 담아 대답했다.
남소현의 표정이 굳어 간다.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
이게 뭐라고 은근히 긴장이 된다.
* * *
칠흑처럼 어두컴컴한 길.
시각으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곳은 명백한 미로였다.
우리 둘은 손끝으로 벽의 감촉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새롭게 얻은 화염 스킬로 잠시 동안 길을 밝힐 순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진 않았다.
내가 가진 미니맵은 이런 암흑 미로에서조차 완벽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고 있었으니까.
길의 폭은 대략 2미터 남짓.
어깨와 어깨가 밀착된 채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네가 받는다는 그 계시 말이야…….”
“네.”
“누가 주는 건지는 아직 대답할 수 없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운 질문이긴 했다.
궁금할 순 있어도, 두 번이나 집요하게 물어보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빙빙 돌려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을 지도 모른다.
“아직 말하기 곤란해요. 가격이 책정되지 않았거든요.”
“뒤늦게 가격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나?”
“보통은 그렇지 않아요. 가격이 없다는 건, 발설이 금지되어 있다는 의미니까.”
“그럼, 만약 네가 그런 제약을 깨뜨리고 발설하고자 한다면?”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언령의 제약 때문에 발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엘릭서로 사람들을 치료했어. 분명 계시를 통해 얻은 정보인데 편법적인 게 통한 거잖아?”
“……그건.”
과연 그녀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녀가 무언가 답하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면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탑은 편애가 만연한 곳이니까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편애라…….”
예언가인 그녀의 직감은 좋은 편이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이 탑으로부터 편애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시작부터가 달랐다.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종말이 올 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내가 묻는 그 질문에 대해선 발설할 수 없다는 의미로군?”
“아직까지는.”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당신이 제 생각대로 편애받는 플레이어라면요.”
신주아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록 이 구역에 머물 시간이 많지 않지만, 예언가인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가능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렇군.”
그 순간, 우리의 대화를 끊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악마종 몬스터.
시커먼 암흑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며 나타난 녀석은 매캐한 기운으로 우리를 위협해 왔다.
미니맵 상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가득 채운 수많은 불빛들.
신주아가 입을 열었다.
“강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상당히 많은 거 같군요.”
“정확하네.”
역시 예언가답게 감이 좋다.
‘날 정말 편애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질투심은 필승 카드일 것이다.
그리고 내겐 이럴 때 사용할 적절한 카드가 하나 있다.
타아앙-
총성이 울리며 악마종의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역시, 하나로는 부족한가?’
나는 미니맵을 보며, 총구의 방향을 틀었다.
비록 어두운 공간이지만, 저격 스킬은 이런 상황에야말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타아앙-
타아앙-
내 손 위의 총이 불을 뿜으며, 미니맵에서 불빛이 하나씩 꺼져 간다.
“혼자서 다 할 필요는 없어요. 저도 웬만큼은 하니까.”
신주아는 본인보다 무거워 보이는 양날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총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타아앙-
타아앙-
물론 혼자서 다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러내고 싶은 존재가 하나 있었다.
‘이제 나타날 때가 된 거 같은데.’
죽은 영혼을 촉매로 나타나는 그 존재.
일반 몬스터도 아닌 악마종들을 쓸어 버리고 있으니, 촉매제로는 최적. 아주 높은 확률로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 오랜만이야 이호영!
마왕 라덴.
역시, 그녀가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해 주었다.
- 항상 하는 제안이지만 영혼 좀 팔래? 어차피 네놈이 도도하다는 건 잘 알고 있고, 소박맞을 각오도 하고는 있…….
“팔게요.”
나는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 뭐 판다고?
“네. 판다고요.”
마왕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 15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