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22층을 클리어한 후 다시 돌아온 탑의 로비.
나에게는 다시 선택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곳에 머무르시겠습니까?]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떠나기엔 이르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신주아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해.’
어쩌면 그녀는 본인에게 계시를 내리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공략집을 전송하는 주체와 동일한 존재.
도대체 그게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 존재는 이 탑에 대해 어떻게 그리도 잘 알고 있는지.
그 해답을 찾고 싶었다.
물론 중요한 전제 조건은 신주아가 22층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것.
다행히 어려워 보이진 않는다.
[신주아 플레이어가 깃발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로비에는 나 혼자만 있는 상태였고, 22층의 상황은 네 개의 홀로그램을 통해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녀는 22층을 클리어하게 될 것이다.
신주아는 깃발 네 개를 획득하며, 로비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신주아가 가장 먼저 와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조병국. 녀석도 벌써 깃발 네 개째였다.
그가 보유한 절대 민첩 특성이 실로 놀랍다.
순간적으로 내는 질풍 같은 속도도 대단하지만, 회피력 자체가 사기적이었다.
그는 본인을 에워싼 좀비들의 동시 다발적인 공격들을 모두 피해 냈다.
궁수 타입의 플레이어임에도 과감하게 몬스터의 코앞까지 접근할 수 있는 이유.
그는 순수한 회피력 하나만으로 좀비 떼의 벽을 돌파해 버렸다.
피융-
피융-
쫓아오는 좀비들을 향해 화살을 쏘며 견제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역시 탑에는 별의별 놈들이 다 있군.’
나도 약하진 않지만, 이 탑엔 아직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더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절대 민첩이 있다면 절대 체력과 절대 근력도 있을 것이고, 손서연이 언급한 대살성 역시 평범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직업들까지.
언젠간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른다.
죽지 않고 계속해서 탑을 오르다 보면 말이다.
[신주아 플레이어가 깃발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녀는 나의 바람대로 22층을 두 번째로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로비로 다시 복귀한 신주아는 말끔한 모습.
군데군데 피부가 오염된 남소현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먼저 도착해 있는 나를 보고도 전혀 반응이 없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번 보고는, 마치 이곳에 혼자 있는 것처럼 조용히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켜도 그녀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알고 있어?”
“저도 눈은 있으니까요.”
“말도 할 줄 아네?”
“……네.”
확실히 독특한 캐릭터였다.
신비감을 풀풀 풍기는 분위기로 바가지를 씌울 때부터 알아봤지만 말이다.
“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
“말씀하세요.”
의외로 묻는 말에는 곧장 반응을 한다.
“네가 받는다는 그 계시, 누가 주는 거지?”
“…….”
하지만 이번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되돌아온 대답은,
“그게 왜 궁금하죠?”
라는 것.
그녀는 도리어 내게 반문을 하였다.
“궁금한 게 당연한 거잖아. 네 계시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고, 그 덕에 지금 내 몸이 멀쩡하니까.”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엘릭서를 흔들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로비로 복귀했어도 오염된 피부는 치유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예지력은 남들의 다른 능력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난생처음 활을 잡아 보는 사람이 스킬 하나로 명사수가 되는 것처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신주아는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이건 분명 성질이 다른 문제다.
예지력이란 것은 플레이어 일신상의 능력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내가 가진 현자의 능력처럼 말이다.
“그래서 너에게 계시를 내리는 존재에 대해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알아요.”
“뭐? 안다고?”
내가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이런 답변이 나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누군데!”
흥분이 몰려왔다.
어쩌면 그 미지의 존재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당신, 그냥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군요.”
“내가 묻는 것이 무슨 의도인지가 중요해?”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엔 대가가 따라야 해요.”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22층이 시작되기 전 내게 바가지를 씌웠을 때만큼이나.
“그래서 이번엔 얼마를 원하는 거지?”
얼마라도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골드는 언제든지 모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 가치는 제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당신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 가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뭐?”
바가지를 씌울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답답한 설정이었다.
‘마음의 소리라도 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황당하게도 그녀는 마음마저 과묵하다는 것.
나는 지금껏 그녀로부터 그 어떤 마음의 목소리도 들어 보지 못했다.
“정말 말 안 할 거야?”
“미안해요.”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의 단호함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이런 캐릭터를 상대로는 협박을 해도, 고문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 당신에게 운이 따른다면, 곧 가격이 매겨질지도 모를 일이죠.”
“운이라…….”
순간 니케의 반지가 빛을 발했다.
내게 언제나 행운을 가져다준 신화급 아이템.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르겠다.
내가 다가가야 할 그 존재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 * *
예상대로 세 번째로 22층을 클리어한 것은 조병국.
그 뒤를 이은 것은 남소현이었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꽤 많은 시간차가 있었지만 말이다.
“야! 이호영! 이 치사한 새끼!”
남소현은 로비에 먼저 와 있는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예상한 일이다.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길래.”
“뭐? 기다려? 기다렸다는 놈이 내가 나가고 5분 만에 미션을 클리어해?”
“그 이상 기다릴 정도로 우리가 친한 건 아니니까.”
“와! 진짜 이 쓰레기 같은!”
“그나저나 그 몬스터는 결국 잡은 거냐?”
“잡긴 개뿔!”
“하긴, 그 몬스터가 깃발을 흘리고 간 거 같더라니.”
“뭐?”
“병원 입구에 떨어져 있더라고.”
씨익.
남소현을 보며 웃어 주었다.
“그걸 니가 주워서 꿀꺽했다고?”
“이젠 호구 이미지에서 탈피 좀 해 볼까 해서 말이지.”
남소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래도 날 공격하지 않는 건 같은 살성이라는 동질감 때문일 터.
쓸데없이 과한 소속감이다.
“남소현, 그런데 네 피부 말이야.”
조병국이 시커멓게 변색된 남소현의 팔을 가리켰다.
“와 씨! 이거 뭐야! 로비로 돌아왔는데 왜 이래!”
그녀는 이제야 제 몸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나와 신주아는 완벽했고, 조병국은 살짝 오염된 수준. 남소현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2인 파티를 진행하며 고기방패 역할을 너무 열심히 했으니까.
“야, 이호구! 이거를 봐.”
“어. 시커머네.”
“전방에서 널 엄호하느라 이렇게 된 거잖아! 뭐 느끼는 거 없어?”
호구 소리만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치료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물론 치료비는 두둑하게.
“다행이네. 얼굴은 멀쩡하니까.”
“개자식!”
“어차피 탑에서 시집갈 일도 없는데 뭘 그렇게 신경 써? 그냥 타투라고 쳐. 강해 보이고 좋네.”
“이런 거지 같은 타투가 어딨다고!”
“그리고 미션을 통과했다는 거 자체에 만족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저길 보라고.”
내가 가리킨 것은 이문학, 이문성 형제를 전담하고 있는 홀로그램.
두 형제는 잔인한 선택의 문제에 직면했다.
깃발이 하나 부족한 상황에서 둘 중 한 명 이상은 반드시 미션에 실패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두 사람 모두 깃발 4개씩을 획득한 상황.
그리고 마지막 깃발 앞에 선 형제는 진퇴양난이었다.
- 형이 가져가. 나보다는 형이 조금 더 강하니까.
- 몇 초라도 세상을 더 산 내가 양보하는 게 옳지 않겠냐?
- 됐어! 시간 없으니까 빨리 깃발이나 집으라고!
종말의 탑에서 보기 드문 광경.
로비에 있는 우리 모두는 숨을 죽이며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 24초]
이대로라면 두 사람 모두 미션 클리어에 실패하게 된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계속 흘러갔다.
[남은 시간: 18초]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퍼어어억!
형 이문학은 동생의 뒷목을 내리찍었고, 이문성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뭐지?”
“갑자기 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조병국과 남소현이 소리를 지른다.
조병국은 그렇다 쳐도 남소현의 이런 모습에는 실소가 절로 나왔다.
‘너 살성이잖아.’
피의 날에 살기로 가득했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이문학은 쓰러진 동생을 질질 끌고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비장하기만 하다.
그리고 멈춰 선 곳은 깃발 앞.
[남은 시간: 9초]
다음에 벌어질 일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이문학은 동생의 손을 포개어 잡고는 깃발을 쥐여주었다.
결국 어렵게 선택이 이루어진 셈.
[이문성 플레이어가 깃발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와, 씨! 진짜 잔인하다. 잔인해.”
남소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생을 위해 본인을 희생한 이문학.
잠시 후 로비로 나타난 것은 이문성뿐이었다.
* * *
그 이후 탑은 우리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않았다.
이문성이 복귀하며 홀로그램창은 사라졌고, 22층의 무대에 홀로 남은 이문학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문성은 계속 넋 나간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운 내. 네 형의 생사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
사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각자가 살기 위해 경쟁을 했고, 그 결과 맨 뒤에 뒤처진 한 명이 낙오를 한 것이니까.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한 셈이다.
그 누구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지만 말이다.
“신주아! 너 계시 받은 거 없어?”
“없어요.”
조병국의 물음에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계시를 받을 예정은?”
“알 수 없어요. 그런 건 제 의지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까.”
“이 망할 놈의 탑은 왜 아직도 이문학의 생사를 안 알려 주는 건데!”
지금 조병국의 모습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는 대목.
다행이었다.
그가 만약 악인이었고 내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왔더라면, 쉽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하나만 더 묻자. 22층이 시작되기 전 받은 계시에는 깃발의 위치에 대한 정보도 있었던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이호영과 네가 나란히 미션 클리어를 1, 2등으로 한 것이지?”
사실 그건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나야 미니맵 스킬이 있지만, 그녀에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없으니까.
능력만 놓고 보면 조병국이 나 다음으로 미션을 클리어했어야 옳다.
“저에 대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차라리 1등을 한 저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신주아가 절묘하게 나에게 공을 넘겼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스킬이 있어.”
여기까진 말해 줄 수 있다.
더는 곤란하지만.
“스킬이었다고? 도대체 뭔데!”
남소현이 흥분하며 물었지만 난 답하지 않았다.
“이 치사한 새끼!”
그때였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주아도 입을 열었다.
“방금, 계시를 받았습니다.”
역시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주체는 동일 존재라는 것이 한 번 더 확인되었다.
나는 서둘러 공략집의 메시지를 훑었다.
‘그런데 이건 좀…….’
난감했다.
여기선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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