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개꿈이었는지, 그것이 아니면 이 탑이 나의 정신 세계에 간섭을 한 것인지.
다만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 탑에서 보자. 이호영.
나도 만나 보고 싶다.
그 고블린, 분명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닐 것이다.
꿈 말고도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것 하나.
바로 뜬금없이 전송된 공략집이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공략집치곤 상당히 불친절한 메시지였다.
‘누군가가’가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정보일 텐데.
하지만 더 아리송한 것은 다음 문장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계속해서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그 누군가의 시기심을 크게 유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가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략집의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뜬금없을 뿐 아니라 싱겁기까지 하다.
‘시기심이라.’
마왕의 권능을 인지하고 있으며, 시기심까지 느낄 수 있는 존재라면…….
일단 플레이어나 NPC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탑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를 미지의 초월자.
그런데 사실 이 개념도 분명하진 않다.
일단 초월자라는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다.
인간처럼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인지, 그게 아니면 마왕처럼 영적인 존재인지 아직 밝혀진 것은 전혀 없다.
또한 유일한지 다수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나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공략집은 나에게 그 어떤 행동 양식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정보만 주었을 뿐이다.
미지의 누군가가 시기심을 느낄 거라는 뜬금없는 정보.
평소와는 방식이 많이 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단 한 번, 공략집이 이상하다 느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라덴의 신전을 파괴하도록 방조하고, 라덴과의 연결 고리를 유도했었던 칼리아에서의 그때.
그렇다면 그때와 지금의 공통분모가 하나 존재한다.
마왕 라덴.
‘왜지?’
행간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야만 했다.
사실 공략집은 진즉 나와 마왕과의 연결 고리를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공략집이 현재의 이 상황을 원했다는 것.
심지어 공략집은 마왕의 힘을 사용할 것을 한 번 제안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공략집은 마왕의 힘에 우호적인 거 같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마왕의 힘을 사용하면 누군가의 시기심을 유발할 것이라고 한다.
‘공략집아, 너 혹시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고 있는 거냐?’
‘옆에서 널 협박하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알 수 있도록 신호라도 좀 보내 주든가.’
……두뇌를 풀가동하다 보니 뇌내망상만 심해진다.
그래도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중요 포인트.
바로 시기심이다.
이걸 잘 이용하면 놀라운 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어쩌면 초월자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 그놈에게 한발 다가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탑의 가장 은밀한 비밀일 것이다.
* * *
오랜만에 변화 한 가지가 생겼다.
살성 제안이 파격적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살성 제안을 수락하면 당신은 다음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400만 골드
2. 전설급 스킬
3. 전설급 무구
4. 마력 고속 성장
[마지막 제안입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갑자기 400만 골드라니.
20층이 끝나고 예전에 비해 많은 골드가 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눈에 띌 정도의 인플레이션은 아니다.
이로써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마왕에게 질투를 느끼는 놈과 내게 살성 제안을 하는 놈이 동일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제안?’
제안 금액이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 답을 미뤄 두었는데, 결국 그 끝을 보게 되었다.
400만이면, 아주 아름다운 금액이었다.
“거절.”
막상 거절하고 나니 아쉬운 기분이 든다.
살성 제안 메시지는 즉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새로운 변화.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또?
[당신이 속한 로비는 비정상적으로 생존율이 높습니다. 따라서 탑은 잠시 당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파견 기간: 21층 ~ 25층]
살성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전해진 메시지.
아무래도 나에게 오퍼를 넣은 녀석이 삐친 것이 분명하다.
* * *
[21층 시작까지는 48시간 남았습니다.]
탑은 며칠째 계속 평화로웠다.
내가 기절해 있던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무려 일주일 가까이 자유 시간이 보장되는 셈이다.
“호영이 형. 같이 수련이나 좀 하자. 오랜만에 스파링 어때?”
“캥수 말고 나랑 직접?”
“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한번 해 보자.”
김세용은 예전보다도 더 의욕적이었다.
듣기로는 20층이 끝난 후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수련만 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뭔가 좀 급해 보인다, 세용아?”
“어, 급해. 나중에 만나면 패 죽여야 하는 놈을 하나 알게 됐거든.”
“그게 누군데?”
“있어. 어떤 재수 없는 놈.”
“누군진 몰라도 20층에서 많이 맞았나 보다?”
“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그놈 먼지 나게 패다가 20층이 갑자기 끝나 버린 거라고!”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이는 이야기.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네가 지금 급하게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그놈을 다시 만나면 패 죽여야 하는 건데, 이미 먼지 나게 팬 적이 있다 이거지?”
“어.”
너무 당당하니까 어이가 없을 지경.
그래도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웬만큼 강해져서는 남소현을 이길 수 없겠지만, 수련 자체는 탑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는 일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난 잠시 이곳을 떠나야 하는 입장이니 원 없이 스파링이나 해 줘야겠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런데 스파링 전에 중대 발표할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불안하게 뭔데.”
세용이 놈이 그래도 가끔씩은 촉이 좋다.
나는 바로 모든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할 생각이다.
듣는 이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탑으로부터 개인 메시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이제 곧 저는 다른 로비로 파견을 갈 거 같아요.”
“……파견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이신지…….”
“말 그대롭니다. 일시적으로 제가 여러분들 곁을 떠나게 됐습니다. 길게는 아니고 25층까지만.”
일시적이라고 표현했지만, 무려 다섯 층이다.
이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돌아왔을 때, 이 멤버 구성이 그대로일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몇몇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김세용은 자기도 데려가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고.
“그동안 잘해 왔듯이, 저 없이도 여러분들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동료들은 처음으로 내가 없는 상황이라는 시험대에 서게 되었다.
물론 다가올 다섯 층은 나에게도 커다란 도전이 될 것이다.
아포칼립스의 공간에서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으니까.
* * *
다행히 신파극은 없었다.
동료들은 담담히 나와의 작별을 받아들이며 저마다 홀로서기를 다짐했다.
김세용과 원 없이 스파링을 하는 도중 포털이 열렸고, 나는 미지의 힘에 이끌려 이동되었다.
그래서 도착한 이곳.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스물넷이었다.
남자 아홉에 여자 셋.
이 정도면 구성원이 꽤 많은 편이다.
“……플레이어?”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머리 위에 표시된 이름과 레벨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왜 온 거지?”
“아무리 플레이어라 해도 수상한 놈이잖아!”
이들이 나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우리 모두는 피의 날을 겪었으니까.
“가장 수상한 것은 저 녀석의 레벨이군!”
현재 나의 액면 레벨은 24.
세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타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수치이긴 하다.
“고민할 거 없이 그냥 죽이는 게 어때? 일단 죽여 보면 정말로 수상한 놈이었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한재구.
풍기는 분위기나 떡대만 놓고 보면 김세용의 복사판이다.
상태창으로 녀석의 정보를 보니, 절묘하게 직업도 권법가로 똑같았다.
이거 잘하면 21층이 시작하기도 전에 12대 1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한재구는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내가 이놈을 죽이는 데 이의 있는 사람?”
한재구는 이곳에서 가장 과감한 행동력을 가진 놈인 듯.
그럼에도 다른 플레이어의 의견을 구한다는 건, 이곳의 리더는 아니라는 뜻이다.
어쨌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참 살벌한 구역으로 파견을 왔나 보다.
“그럼 다들 동의한 것으로 알고…….”
휘이이이잉-
한재구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김세용과 똑같은 돌주먹 스킬.
하지만 파워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김세용보다는 확연히 아래다.
따아악!
나는 녀석의 주먹을 피한 뒤 칼집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물론 힘 조절은 했다.
신고식에서 사람을 죽일 순 없으니까.
“와아아악!”
한재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별 몇 개 정도는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수상하게 보이는 건 인정.”
나는 나머지 열한 명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 구역에선 수상하면 사람을 죽이는 게 규칙인가?”
지금 이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날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 반, 흥미롭게 쳐다보는 눈빛이 또 반.
내 등 뒤에서는 한재구의 기척이 다시 느껴진다.
“이 새끼가!!”
움직임이 너무 단순해서 굳이 뒤를 돌아볼 것도 없다.
그저 등 뒤로 칼집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따아아악!
달려오던 한재구는 바로 정수리를 맞고 쓰러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을 수도 있지만, 충격이 작진 않을 것이다.
때린 곳을 또 때리기도 했고, 이번엔 좀 더 마나를 실었으니까.
초면에 호구처럼 보이는 것은 곤란한 일.
그렇다고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순 없으니 적당히 균형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쓰러진 한재구에게 물었다.
“……혹시 더 할 거야?”
말투는 친절하게.
이미 눈빛이 죽어 있으니 거칠게 다룰 필요는 없다.
한재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이 친구는 그만할 거라는군.”
다시 모두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정보를 스캔했다.
요주의 인물이 있나 찾아볼 생각이다.
어쩌면 이 중에는 살성이 있을지도 모르고.
……눈에 띄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체구의 남자.
레벨도 분위기도 아주 평범하지만, 전혀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놈이었다.
‘포식자?’
메인 스킬이 포식인 녀석이다.
그리고 포식 스킬 뒤에는 여러 스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검술, 창술, 궁술, 권법…….
나보다 스킬창이 다채로운 플레이어를 보는 건 처음이다.
안채윤.
포식자인 그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재구는 내 친구야.”
“……그래서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고. 네 능력이 좀 흥미로워서. 레벨이랑 실제 능력이 완전히 딴판이잖아.”
뭐 눈엔 뭐만 보이는 법.
이놈도 나를 본인과 비슷한 과로 인식한 것이다.
“뭐, 사정이 있다 보니.”
“그 사정까지는 안 궁금하고, 우리 구역에 왔으면 세금을 내야 하는데 말이야.”
바로 안채윤의 등 뒤로 플레이어 넷이 몰려든다.
똘마니들.
역시 이놈이 이곳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나한테서 골드라도 뜯어내겠다는 건가?”
“아니, 골드는 필요 없어.”
안채윤이 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것 같다.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이놈이 다른 사람의 스킬을 어떤 방식으로 포식하는지. 그걸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다.
‘포식이라.’
탐나는 스킬이다.
가져오고 싶다.
혹시 방법이 없을까?
- 14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