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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38화 (138/292)

138화

라덴은 한결같이 내게 영혼을 요구했다.

- 쉬운 길로 좀 가자. 응? 많이도 필요 없어. 그냥 조금만 넘기면 돼.

마왕은 마땅히 공포의 대상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런 편견을 깨뜨려 주었다.

심지어 이젠 라덴의 목소리만 들어도 질린다.

“좀 질리는 스타일이시네요.”

- 내가? 너 미친 거 아니야?

이젠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귀찮다.

- 완전 어이없네! 이런 얘기는 생전 처음 들어 본다고, 이 미친놈아!

그런데, 오늘 내가 라덴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단순히 영혼 오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사형인데, 마왕의 힘을 빌리는 건 좀…….’

따지고 보면 남소현은 나의 사제였다.

비록 그녀가 사부의 정식 제자, 다시 말해 천마의 후계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부에게 검술을 배운 것은 사실이니 그녀는 나의 사제, 나는 그녀의 사형이라 할 수 있었다.

사형이 사제를 제압하기 위해 기습도 모자라 사술을 이용한다?

사부가 들으면 쓰레기로 취급할 일이다.

그냥 기습이면 족하다.

- 톡 까놓고 솔직하게 말해 줄게. 너 쟤랑 싸우면 확률은 반반이야. 네가 죽든가, 아니면 쟤가 죽든가.

“……아무리 그래도 반반까지는.”

- 야, 니 눈이 정확하겠냐? 내 눈이 정확하겠냐? 솔직히 네가 쟤보다 더 강한 건 인정. 20층 말고 다른 곳에서 싸웠으면 열 번이면 열 번 다 네가 이겼을 거야. 그런데 지금 쟤 주변을 둘러싼 버프 보여? 넌 안 보이지? 장난이 아니라고!

“그래도 안 팝니다.”

난 단순히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은 기습.

내가 먼저 유리한 위치를 점해 놓고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따라서 라덴의 예상처럼 반반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 에라이, 단호박 같은 새끼!

확실히 남소현은 내 예상보다 강하긴 했다.

라덴이 말한 버프 때문이겠지만, 그녀의 자운심검은 내 무영추혼검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PK의 페이스도 너무 빨랐다.

그녀의 검에 목숨을 잃은 플레이어만 벌써 여섯이니까.

“한강혁, 너 계속 나 따라다닐 거야?”

“방해 안 하고 있잖아.”

“야,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고!”

“갈 거야. 구경 좀 만 더 하고. 그나저나 사냥 잘하네.”

천연덕스러운 나의 반응에 그녀는 더 이상 따지고 들진 않았다.

다만 뜬금포 선언을 했을 뿐이다.

“쳇! 어쨌든 나는 이제 슬슬 이 구역을 뜰 거야.”

“……왜지?”

“여긴 쓸데없이 몬스터만 너무 많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이미 많은 플레이어들을 학살했으니까.

그녀가 향한 곳은 그녀의 기지이기도 한 1번 세이프 존이었다.

떠나기 전 마나 충전을 하려는 것이다.

주변을 벗어나는 건 나로선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기습 타이밍을 좀 앞당겨야겠어.’

그녀가 사냥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은 다른 살성과의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일.

제삼자가 끼어든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성가시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거사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나는 남소현과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한 채 뒤를 밟았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는 한 가지 더 발생하고 말았다.

웬 떡대 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

“와! 이거 완전 옷이 피범벅이잖아? 진짜 무서운 아가씨네!”

김세용이었다.

정말 눈치 없는 등장.

멘트도 싸구려인 것이 전형적인 삼류 건달의 느낌이다.

녀석도 약하진 않지만 남소현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은 피의 날이면 더더욱.

뒷모습만 봐도 보이는 것 같다.

남소현의 희열에 찬 미소가.

“뭐야, 웃어? 내 얼굴이 웃겨?”

김세용의 상태창을 보니 100퍼센트의 HP. 스탯도 높아져 있다.

아마도 방금 전 PK를 치른 모양.

김세용의 캐릭터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다.

PK는 나도 한 것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여기서 나오냐.

‘위험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

김세용이 등장한 순간 남소현은 모든 계획과 판단을 내린 상태.

그녀의 검은 질풍처럼 쏘아져 나갔다.

파바밧!

날카로운 검기가 뿜어지며 김세용을 베어 낸다.

“허어어업!”

김세용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단 일격 만에 승부는 끝이 났다.

복부에 난 깊은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와! 이거 완전 옷이 피범벅이잖아?”

남소현은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김세용을 향해 걸어갔다.

김세용은 괴로운 신음을 뱉어 낼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남소현은 바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검을 치켜들었다.

이제는 나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확신은 없으나, 주저 없이 엘리시온을 휘둘렀다.

파바바밧-

검기들이 한 점을 향해 쏘아진다.

다소 거리가 있기에 검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1 원칙.

‘……거리가 아쉽군.’

나의 검술이 6성에 올랐다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베어 낸 것은 남소현의 어깨.

노린 것은 목덜미였으나, 그녀의 기감을 완전히 뚫어 낼 순 없었다.

“한강혁! 너…… 이…… 미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살성 남소현이 이호영을 표적으로 지정합니다.]

[살성 남소현이 표적 이호영을 향해 영점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런 개자식! 내 뒤를 계속 밟은 게 이것 때문이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조심해야 한다.

살성이 잡은 영점의 위력은 손서연 때 한번 확인을 했으니까.

- 지금이 영혼을 팔 마지막 찬스야! 좀 팔아라. 좀!

라덴은 애가 닳아 있었다.

내가 남소현과 싸워 죽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너…… 죽었어!”

남소현은 가공할 만한 스피드로 내게 접근했다.

보법도 보법이지만, 민첩 스탯 자체가 증폭되어 있는 느낌.

채애애앵!

맞붙은 검과 검에서도 밀리는 것은 내 쪽이다.

역시 근력 스탯에도 버프가 상당히 붙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질 거란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기본기 자체에서 내가 우위에 있으니까.’

게다가 내가 익힌 무공은 천마신교 최고의 절학인 무영추혼검과 무명보.

해 볼 만했다.

비록 스탯은 확연히 밀리지만, 아슬아슬하게 승부를 이어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소현이 입은 어깨의 상처.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은 내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 진짜 얄미운 놈! 야, 내가 진짜 마지막으로 제안한다.

채앵!

채애앵!

불꽃이 튀는 와중에도 라덴은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 오늘 니 영혼은 포기했고, 맛보기로 내 힘이나 좀 써 봐.

채앵!

라덴의 속셈은 뻔했다.

시식용 음식처럼 그럴듯한 힘을 던져 준 뒤 나로 하여금 맛들이게 하는 것.

그녀로선 많이 양보를 한 셈이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채앵!

채애앵!

검을 섞어 볼수록 확신이 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유리해지는 싸움이란 걸.

- 야, 지금 니 동료 죽어 가는 거 안 보여? 시간 더 끌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김세용은 계산에 없었던 변수.

지금쯤 엘릭서를 들이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녀석은 여전히 바닥에 뻗어 있었다.

숨은 붙어 있지만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꺼낼 여력조차 없어 보였다.

- 콜?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힘을 준다니까?

마왕의 권능.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데 자꾸 쓸 조건이 만들어진다.

나중에 김세용에게 목숨값은 어떻게든 받아 내야겠다.

“콜!”

더 이상 라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 안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을 뿐이다.

‘라덴의 에테르!’

마나와는 다른 속성이지만 다루는 방법은 같다.

라덴이 아주 넉넉하게도 퍼 줬다.

시식용으로 마음껏 써 보고 나중에 비싸게 사라는 의미일 터.

나는 즉시 모든 에테르를 엘리시온에 담았다.

이제 다음 일검에 승부가 날지도 모른다.

‘이 손맛. 빨리 잊자.’

* * *

은빛 피부.

등에 박혀 있는 아홉 발의 총알.

괴물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나는 나뭇가지를 들고 조심스럽게 총알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케륵!”

괴물은 몸에서 총알이 빠져나갈 때마다 신음을 했고, 나는 정신줄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나는 계속해서 총알을 제거했다.

“케륵!”

마지막 아홉 개의 총알이 등에서 빠져나온 순간, 고블린은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괴물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은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블린은 나에게 무언가를 하나 건넸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호의의 감정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 괴물이 나에게 준 것은 손톱만 한 씨앗 하나.

‘이걸 심으라는 건가?’

그 순간 자각할 수 있었다.

지금 이건 꿈이란 것을.

탑 이전에 있었던 기묘하고도 놀라웠던 일. 그리고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계기.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실제 겪었던 일을 생생하게 재생해 주는 신비한 꿈이었다.

‘이 고블린이 은혜를 갚은 셈이었지.’

평범하게 살아온 내가 탑에서는 누구보다 특별해진 것도, 치열하기만 했던 아포칼립스의 탑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고블린 때문이었다.

고블린을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호영, 탑에서 보자.”

뭐?

전혀 기억에 없는 일.

고블린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소름이 오돌토돌 올라왔다.

순간 눈이 절로 떠졌다.

“이호영 씨!”

“정신이 좀 드십니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

그리고 익숙한 배경.

이곳은 탑의 로비였으며, 동료들은 내가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제가 쓰러져 있었습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피의 날이 종료되었다는 탑의 메시지.

그 메시지를 들은 직후엔 조르고 있던 남소현의 목을 놓아 주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엔 인피면구를 인벤토리에 넣었고, 로비로의 복귀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벌써 사흘째 되었습니다. 20층이 끝난 것 말입니다.”

“로비로 복귀했을 땐, 저만 기절해 있었다는 거죠?”

“네! 그래서 걱정했습니다. 로비로 복귀할 땐 보통 모든 상처가 치유되곤 했으니까요.”

뭔가 이상하긴 하다.

그때 다 죽어 가던 김세용도 멀쩡한데, 나만 기절해 있었다니.

“그런데 안세창 씨는요?”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한 명.

내 물음에 다들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미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세창 씨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딘가에서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그는 피의 날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나 역시 진실의 외면에 굳이 맞서진 않았다.

“그런데 이호영 씨 말대로 엘릭서가 신의 한수였습니다!”

“맞아요! 형 덕분에 정말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겼어요!”

“그리고, 우리 모두 이호영 씨에게 빌린 골드를 갚을 수 있게 되었네요. 다들 20층 클리어 보상으로 골드를 넉넉하게 받았으니까요.”

이호영 덕분에.

이젠 참 익숙해진 말이다.

은혜 갚은 고블린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방금 전 꾼 꿈이 다시 머릿속에서 생생해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순간.

[공략집이 전송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 13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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