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결국 걸어보기로 했다. 네가 대살성이라는 쪽에.”
“…….”
“그러니,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대살성.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어쩌면 이번 20층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나야 하는 남소현 그녀 역시도 살성이니까.
“마치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말하는군. 손서연.”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어딘지 모르게 손서연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다.
나를 표적에서 해제하며 탑으로부터 페널티를 받은 것. 아마도 그 이유일 공산이 크다.
“후회하냐 손서연?”
“뭘?”
“살성이 된 것.”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내 손으로 그놈들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공략집이 내게 보여 준 손서연의 트라우마.
그리고 지금 들려온 마음의 소리.
맥락의 퍼즐이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그렇군.”
나는 손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대신 살인귀가 되어 버린 그녀의 모습이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런 가치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이곳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아포칼립스의 공간이니까.
“후회하진 않지만, 가끔씩 공허해지는 것은 사실이지.”
처음이다.
손서연이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끝나 버린 복수.
그럼에도 여전히 몸 안에 깃들어 있는 괴물의 속성.
그녀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공허함을 느낀다.
탑에 들어온 이후 내 모든 일상은 살기 위한 몸부림.
나 자신이 살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다.
때론 암살도 했으며 때론 무고한 자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과연 손서연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너도 살아남아라. 손서연. 탑의 결말을 볼 때까지.”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었고, 고개를 돌렸으며, 자리를 떠나 여운만 남겼을 뿐이다.
* * *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한 가지로 압축되었다.
살성 남소현. 그녀를 찾아가 피의 날을 종료시키는 것.
물론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따른다.
‘내가 그녀를 이길 수 있을까?’
마지막에 본 모습으로만 판단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그것이 내가 그녀를 살성 대표로 옹립한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고.
하지만 현재로선 장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두 가지 변수가 존재한다.
그날 이후 그녀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
그리고 피의 날에 살성만이 누리는 보정 효과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잠깐이었지만, 조금 전 손서연이 보여 준 피의 날의 권능 역시 놀라운 것이었다.
‘표적을 지정하고 영점을 잡는 것.’
만약 그녀가 발사한 탄환을 막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그녀가 나를 계속 공격했었더라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소현 역시 똑같은 권능을 누리게 될 터.
키포인트는 남소현의 표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둔 방법은 있다.
나는 바로 인피면구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변장할 플레이어를 지정하십시오.]
“한강혁.”
내게 죽은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고, 지금 난 한강혁이 되었다.
그리고 한강혁과 남소현은 이미 구면.
방심하게 만들기엔 괜찮은 조건이다.
“서두르자, 캥수야.”
“캥!”
이미 많은 플레이어가 죽었다.
대략 1,500명으로 시작한 20층 피의 날에서 벌써 3분의 1이나 미니맵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피의 날이 종료될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팔방에선 몬스터의 흉포한 울음소리와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있다.
전쟁처럼 끔찍한 살육의 현장 속에서 나는 캥수를 타고 남소현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캥수야. 힘들어?”
“캥!”
“아니라고?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서둘러 줘.”
이따금 멈추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트윈 헤드 트롤들에 둘러싸여 살점이 뜯겨나가는 어느 젊은 청년을 봤을 때도.
자이언트 트롤의 거대한 손아귀에 잡혀 질질 끌려가던 중년의 여성을 봤을 때도.
캥수를 멈추고 이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의 모든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나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까 말이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최대한 힘을 비축해서 남소현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만 했다.
* * *
20층 피의 날.
이번 층은 현재 상태로도 충분히 매운맛이었지만, 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PK에 성공한 플레이어에게는 건마다 HP의 완전 회복과 스탯 포인트 2개를 지급합니다. 단, 살성은 예외입니다.]
“캥!”
이 미친 메시지에 캥수마저 분노했다.
플레이어 중 일부는 조금 전의 메시지에 동요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이것이 연쇄 효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점.
지금까지는 주로 몬스터를 경계해야 했지만, 이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탑에서의 학습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지금까지 생존해 온 플레이어들이라면, 탑에서 인간의 더러운 이면을 수없이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처음 보게 된 타인에 대한 신뢰가 생겨날 리가 없다.
지금까지는 몬스터에 맞서 서로 협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뒤통수.
살성들도 지금부터 더욱 분발할 것이 분명해졌다.
본인의 소중한 먹잇감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곤란한 일일 테니까.
휘이이이잉-
그 순간 나를 향해 화살 한 발이 날아온다.
전방 30미터. 궁수 타입의 플레이어다.
‘미친 적응력이군.’
탑의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나를 공격한 것이다.
화살에선 상당한 양의 마력이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다.
살성이 아님에도 이 정도의 과감함을 보여 줄 수 있는 플레이어라면, 탑이 좋아하는 모범생이자 우등생.
그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졌을 테니 말이다.
챙!
엘리시온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녀석을 그냥 유유히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솨아아악!
캥수가 녀석을 지나쳤을 땐 이미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PK에 성공하였습니다.]
[HP가 회복됩니다.]
[스탯 포인트를 2개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스탯 포인트 전체를 체력에 투자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오랜만이야!
마왕 라덴의 목소리가 내게 들려 왔다.
라덴은 내가 죽인 생명체의 영혼을 매개로 연결된다.
몬스터의 영혼도 매개체가 될 수는 있지만, 연결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아무래도 사람의 영혼인 듯싶다.
어디까지나 내 가설일 뿐이지만 말이다.
“저, 바쁩니다.”
- 알고 있어.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알고 있고.
“그럼 다음에 뵙죠?”
- 야! 어차피 뛰고 있는 건 네 펫이잖아. 하여간 더럽게 비싸게 군다니까!
“할 말이 뭔데요?”
- 할 말이 달리 있겠어? 영혼이나 좀 팔아 봐.
사실 걱정했던 바가 하나 있었다.
바로 엘릭서를 통해 오염된 영혼을 치유했던 것.
그녀에게 영혼을 팔았던 것은 지금까지 두 번이었다.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그로 인해 내 영혼은 오염되었고, 엘릭서를 구입하여 오염된 부분을 말끔히 치유했었다.
어쩌면 라덴이 그걸 꼬투리 잡을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할 말은 그게 다예요?”
- 어.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굳이 내가 먼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단은 괜찮아 보이니까.
“오늘은 안 팔아요.”
- 후회할 거 같은데.
“그런 거 안 합니다.”
- 뭐, 일단 옆에서 좀 지켜보고 있을게. 혹시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오래 있을 수도 있어요?”
- 네가 오늘 죽인 생명이 꽤 되잖아.
라덴은 그리고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사실 마왕의 권능은 달콤한 게 사실이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나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였으며, 먼지만큼의 영혼으로 큰 권능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익숙해지면 곤란한 일.
아마도 그녀는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캥수야. 조금만 더 힘내. 거의 다 왔으니까.”
“캥!”
미니맵 상의 붉은 점.
참 열심히도 죽이고 있다.
지금도 그녀 주변의 푸른 점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 * *
“한강혁, 뭐냐 너?”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네.”
“당연하지! 여기까지 오는 거, 사실상 반칙이잖아!”
본인의 구역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녀의 옷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미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이쯤 되니 손서연을 재평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 펫도 있었어?”
“뭐 어쩌다 보니.”
그러면서 그녀의 상태창을 주시하였다.
예전에 비해 확연하게 늘어난 스탯.
확실히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동안 남소현을 가르친 것은 천마신교의 지존이자 나의 사부.
분명 그녀의 검술은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처음이니까 곱게 말할게. 꺼져. 한강혁.”
“구경만 좀 하고 가려는 거야. 선수끼리 치사하게.”
“너 지금 제정신 아니지? 말끔한 옷 상태 하며!”
역시, 피의 날에는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제약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내가 피의 날을 종료해 버리면 어쩌려고?”
“지금 당장 해 보든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미친놈.”
“아 참. 하나만 묻자.”
“뭘?”
“대살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대살성, 그런 것도 있어?”
- 뜬금없이 무슨 꿍꿍이지?
확실히 모르는 반응.
유일하게 알게 된 것은 모든 살성이 대살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의 또 다른 여덟 살성을 하나하나 만나가며 물어볼 시간이 없으니까.
“모르면 말고.”
“어쨌든 그럼 난 간다. 방해하면 죽일 거야.”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또다시 살육을 벌이려는 것이다.
나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기회를 엿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남소현의 전력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파바바밧-
남소현은 트롤들 사이를 헤치며 이동했다.
그녀의 검격에 트롤들의 모가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놀랍다.
생각보다 그녀의 무위는 높다.
여기에 피의 날의 권능까지 더해진다면…….
‘자운검법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지만, 확실히 사부의 향기는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사부가 그녀에게 무영추혼검까지는 전수해 주지 않은 모양.
트롤을 헤쳐나간 남소현은 이내 플레이어 하나를 발견하였고,
솨아아아악!
경이적인 쾌검을 발휘하며 플레이어를 일격에 죽이고 말았다.
‘손서연이 했던 표적 지정이로군.’
남소현이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따라다닐 건데?”
“글쎄다. 조금만 더?”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남소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 호영아아아!
앙탈 섞인 라덴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계속 있었습니까?”
- 말했잖아. 네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다고. 보아하니 등 뒤에서 기습하려는 모양인데, 가능하겠어?
“문제 있습니까?”
- 문제? 많지! 딱 봐도 기습이 실패할 확률이 높아 보이잖아. 네 생각은 다른가 보지?
실패 확률이 높을 거란 라덴의 평가.
신경이 쓰이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녀는 내게서 영혼을 사기 위해 약을 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남소현의 뒤를 좀 더 밟아 보며 기회를 엿볼 생각이다.
- 13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