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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36화 (136/292)

136화

미니맵 상에 찍혀 있는 수많은 푸른색 점.

이 하나하나가 전부 플레이어들이다.

‘대략 1500명쯤 되려나?’

절대 감각으로 인지한 정보이니 오차 범위는 그리 크진 않을 것이다.

공간이 광활하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플레이어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

거기에 연령 구성도 예전보다는 훨씬 다양해진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내 연령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면, 이젠 중학생쯤 되는 십 대부터 환갑은 되어 보이는 노인까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10대 후반에서 40대 사이의 플레이어들.

아무리 이 탑이 게임 시스템으로 좌우되는 세상이라 해도 생존에 유리한 것은 역시 젊은 성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개체수를 보이는 것은 몬스터였다.

미니맵 상에 표시되지는 않지만, 발에 치이는 것들이 몬스터.

그리고 한 가지 나쁜 소식이 있었다.

‘아무리 잡아도 경험치를 안 주는군.’

20층에서는 몬스터 사냥의 이득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플레이어의 생존에는 너무 가혹한 조건.

누구냐? 이번 20층을 설계한 놈.

푸른 점과 대비되는 열 개의 붉은 점은 살성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세이프 존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모습인데, 몇몇 살성들은 벌써부터 학살을 시작한 모습이었다.

주변의 푸른 점들이 하나둘씩 지워지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동료들의 건투를 비는 것뿐.

그래도 피의 날 이전에 아무런 페널티도 받지 않았으며 엘릭서까지 준비했으니, 다른 구역 출신들보다는 생존에 유리할 것이다.

하나의 붉은 점이 아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손서연!’

20층 시작과 동시 바로 살육쇼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어딘가를 향해 움직일 뿐이었다.

분명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

속도도 속도지만 한 방향으로만 이동 중이니까.

‘어쩌면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일지도.’

오래전, 손서연은 나를 피의 날의 표적으로 지정해 놓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내 위치가 그녀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 역시 빠르게 마중을 나가 봐야겠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피의 날을 종결시키러 갈 수 없을 테니까.

* * *

“오랜만이야.”

내 인사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

하지만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언제라도 날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전에 없던 살기가 느껴진다.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너에게 한 가지를 묻겠다.”

“말해 봐.”

“……너는 정말로 대살성인가?”

이것은 손서연이 제멋대로 만들어 낸 오해.

그동안 나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이 오해가 때로는 나를 편리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노코멘트.”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지금 상황에서 내가 대살성이라 우기는 건 쉽지 않다.

피의 날임에도 난 아무런 권능도 보여 줄 수 없으니까.

“몇 번을 물어도 노코멘트.”

“어쩔 수 없군.”

그녀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한층 증폭되어 버린 살기.

이것은 결코 연기가 아니다.

피의 날이기 때문인지 그녀는 상당히 과감한 모습이었다.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어? 네가 날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을 텐데.”

나 역시 엘리시온의 검 끝을 그녀를 향해 세웠다.

여차하면 그녀의 등 뒤에서 캥수를 소환해 낼 생각이다.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펫을 불러낸다 할지라도.”

역시 손서연은 캥수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인 점은 너무 자신만만하다는 것이었다.

손서연의 스펙을 보아하니, 확실히 대폭 레벨업이 된 것은 맞지만 그녀는 나의 정보까진 볼 수 없을 테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인데.’

분명 피의 날의 전용 특성일 공산이 크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내 표적이야.”

“그래서?”

“난 무조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럼 알게 되겠지. 네가 대살성인지 아닌지를.”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살성 손서연이 표적 이호영을 향해 영점을 잡기 시작합니다.]

영점?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

손서연의 믿는 구석이 바로 이것이라는 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온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피의 날은 살성의 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잠시 후 당신은 손서연의 트라우마를 보게 될 예정입니다.]

[그녀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것입니다.]

* * *

조문객 하나 없는 어느 장례식장.

상복을 입고 있는 한 여자가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손서연!’

현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틀림없는 그녀였다.

영정 사진 속의 인물은…… 해맑게 웃고 있는 십 대 소녀.

손서연과는 많이 닮았다.

‘그녀의 여동생이겠지.’

텅 빈 장례식장에서 손서연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친척도, 그 누구도.

손서연은 오롯이 혼자 이 슬픔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손서연 씨.”

잠시 후,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검은 정장의 중년.

손서연은 울음을 그치고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독기 가득한 눈빛. 그리고 이어진 한동안의 침묵.

손서연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도 똑같은 살인마입니다.”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세요! 그놈들이 살인자가 아니라고요?”

“손서연 씨…….”

“이보세요, 판사님! 당신 딸이 똑같이 죽었어도 그런 판결을 내렸겠어요? 무슨 그런 개 같은 법이 다 있습니까! 꼭 자기 손으로 죽여야 살인인 거냐고요!”

손서연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그 아이들, 법보다 훨씬 더 가혹한 벌로 고통을 받게 될 겁니다.”

“어떻게요? 그 아이들은 평생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이런 개소리나 하려고 여기에 나타나신 건가요?”

“…….”

“집어치우세요. 법이 할 수 없다면 처벌은 내가 합니다.”

“그 심정 이해합니다만 하늘에 있는 나연 양을 생각하…….”

“……꺼지세요.”

손서연은 다시 복받쳐 울기 시작했다.

다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주위의 배경은 바뀌었다.

얼굴이 피투성이인 손서연.

쓰러져 있는 그녀의 앞에는 교복을 입은 여섯 명의 무리가 서 있었다.

남자 넷에 여자 둘.

이전의 상황이 생략되어 있지만 어떤 맥락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와! 생각할수록 진짜 미친년이네. 이 칼로 정말 우릴 죽일 생각이었어?”

“대학생 누나! 그년 우리가 안 죽였다고! 왜 우리한테 찾아와서 지랄이야!”

“와! 이제 무서워서 길거리도 못 돌아다니겠네. 이 언니 살인 미수로 확 경찰에 신고해 버릴까?”

그리고 그 순간.

쫘아악-

다시 달려들던 손서연은 따귀를 맞고 쓰러졌다.

“이거 정당방위야! 알지?”

방금 손서연을 때린 녀석은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대학생 누나, 우리가 그년 뒤진 것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 모르지? 열흘이나 정학을 먹었어! 안 그래도 생기부 더러워져서 짜증 나 죽겠는데 누가 누구한테 지랄을 하는 거야!”

손서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오열했다.

죽은 동생에 대한 처절한 슬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굴욕.

구체적인 스토리까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황상 짐작할 수는 있었다.

손서연이 괴물이 된 이유.

분명, 이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 *

[살성 손서연이 표적 이호영을 향해 영점을 잡기 시작합니다.]

[당신에 대한 손서연의 공격력이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현재 그녀의 스탯에 ‘대폭’이라는 단서가 붙었다면 나에게 불리한 싸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캥!”

바로 캥수를 소환해 냈다.

내가 점유한 세이프 존까지의 거리는 대략 800미터.

이 부분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아직 손서연의 전력이 미지수이니까.

“네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캥수가 뒤통수를 칠 거야. 캥수 파워는 잘 알지?”

“벌써 패를 까는 건가?”

“어, 방아쇠를 당긴 이후에 소환을 하면 늦을 거 같아서 말이야.”

“좋은 판단이군.”

“피의 날이니까, 조심해야겠지.”

“넌 대살성이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인정할 때가 됐다.

손서연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지 방아쇠를 당길 테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뭐라고? 개수작 부리지 마!”

“고백하자면 살성도 아니야.”

타아앙!

드디어 당겨진 방아쇠.

거대한 마력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서연은 지금 나를 시험하기 위해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피의 날을 맞아 대살성의 권능을 보여 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 부디…….

부디?

찰나의 순간, 손서연으로부터 그런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내가 대살성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쏜 것?

모르겠다.

손서연이 정확히 어떤 마음인지를.

날아오는 탄환의 궤적을 보며 엘리시온을 들어 올렸다.

온전히 쳐 내기는 힘들 것이다.

거리도 가깝고, 워낙 거대한 마력이 깃들어 있으니까.

태애앵!

탄환을 맞은 엘리시온을 타고 온몸에 거대한 진동이 느껴진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전류라도 통한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다.

날아오는 탄환을 완벽하게 방어해 냈음에도 말이다.

‘천운!’

손서연이 총을 쏘는 순간 잠깐 흔들렸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 고백하자면 살성도 아니야.

막 던져 본 말이 손서연의 마음에 미세한 동요를 일으킨 것이다.

퍼어어억!

그리고 캥수의 라이트 훅.

캥수가 혼신의 힘을 실어 펀치를 날렸다.

천하의 손서연이 그대로 십 미터는 밀려났다.

‘피의 날이 무섭긴 무섭네.’

다운을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밀려난 손서연은 자세를 고쳐 잡고 있었다.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웃어?’

미세하지만, 손서연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역시 뭐?”

“대살성이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얘기가 이렇게 돌아가는 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니까.

탄환을 막아 낸 건 그저 천운이었을 뿐이다.

물론 나의 검술이 6성에 도달한 것도 하나의 이유는 되겠지만 말이다.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대살성일 확률이 높겠군.”

“……노코멘트.”

갑자기 콘셉트를 바꾸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물론 넌 여전히 의심쩍은 구석이 많다. 살성들의 회합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참여했어.”

“뭐?”

“피의 날 살성 대표는 남소현. 회합에서 정해졌었지.”

“왜 넌 오락가락하는 것이냐? 방금 전, 넌 살성도 아니라면서?”

“그 부분은……. 노코멘트.”

한 번 질러 놓으니 편리한 콘셉트였다.

“망할 자식.”

그 순간, 다시 한번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행이군.

[당신은 살성의 표적에서 해제되었습니다.]

[살성 손서연에게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13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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