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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34화 (134/292)

134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의 수라마혈검은 드디어 완연한 6성의 경지에 올라섰음을.

그 뒤로 조셉은 더 이상 나의 맞수가 아니었다.

스으윽-

스으으윽-

엘리시온이 만들어 내는 선들의 향연이 더없이 호쾌하게만 느껴졌다.

변화가 생긴 것은 나의 검만이 아니었다.

조셉은 나의 엘리시온에 베이면서도 더 이상 신음하지도 피를 흘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조금씩 형체가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혈마가 내게 부여한 마지막 시험이 끝나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우리의 대결이 종료된 것은 이백 합을 훌쩍 넘기고 나서였다.

희미해져 가던 조셉의 형체는 이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지금 녀석의 표정은 웃고 있다는 것, 그것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셉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평생을 검 하나, 외길만을 걸어온 이 녀석이 넘지 못한 벽을 난 너무 쉽게 넘어 버렸으니까.

‘난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인데.’

문득 검을 쥐고 있는 내 모습에 어색함이 느껴졌다.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따지고 보면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영광이었습니다. 스승님. 벽 너머의 세계를 지금이라도 볼 수 있어서.”

그것은 떠나는 조셉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래. 또 보자.”

나의 제자인 동시에 나의 스승이기도 했던 조셉 클로드.

녀석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그저 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곧 귀환합니다.]

세상이 희미해진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암전이 찾아온다.

또 보자곤 했지만, 기약 없는 헤어짐이었다.

물론 조셉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세상이 빛을 찾았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혈마.

자랑부터 하고 싶었다.

내가 드디어 수라마혈검 6성에 도달하였다고.

하지만 참 얄궂은 운명이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또 한 번의 작별을 맞이해야만 했으니까.

[14일이 모두 경과하였습니다.]

[이제 로비로 돌아갑니다.]

다시 세상이 희미해진다.

혈마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작별 인사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부라고 불러 보거라.”

이것이 혈마의 마지막 한마디.

하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탑의 로비였으니까.

“호영이 형!”

“이호영 씨!”

나보다 먼저 로비에 도착해 있던 동료들이 나를 반겼다.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나는 과연 혈마를 사부라 불렀을지를.

* * *

2주 만에 동료들을 만난 첫 인상.

한마디로 다들 몰골이 장난 아니었다.

머리 위에 이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으면 몇 명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

피와 땀의 얼룩들이 온몸에 가득했고, 헝클어진 머리에 입고 있는 옷은 넝마가 되어 있으니 개방 거지 떼들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겁니까?”

“폭렙을 거저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채이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웃는 게 결코 웃는 게 아니다.

김세용이 이어서 거들었다.

“폭렙의 장이라더니, 와 씨! 이렇게 무식하게 사냥을 시킬 줄이야!”

“도대체 어땠는데?”

“14일 밤낮을 쉬지 않고 택배 상하차를 하는 느낌? 형 이게 뭔지 알아?”

“상하차 해 보지도 않은 놈이.”

“그걸 해 봐야 아나? 암튼 딱 그 느낌이야!”

“레벨 많이 올렸으면 됐지, 뭐.”

실제로 동료들의 레벨과 능력치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공략집은 평균적으로 15 정도는 상승할 거라 말하였지만, 다들 20씩은 가뿐히 오른 상태다.

김세용, 최정혁, 오민아 이 셋은 그보다도 훨씬 더 높고.

“형, 그게 폭렙이라고 해도 효율성이 완전 똥망이었다고! 내가 2주 동안 잡은 몬스터를 생각하면 레벨 100은 올라야 했을걸?”

김세용은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이어 갔다.

“폭렙의 장이 아니라 완전 개고생의 장이었다고!”

“알았어. 인마. 1절만 해.”

2절 3절까지 하려던 걸 멈춰 세웠다.

김세용이 이러는 이유. 단지 개고생한 것이 억울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를 보기가 민망한 것이다.

물론 김세용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

비록 내가 16층의 구경꾼을 자원했다고는 하나, 이들은 내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호영 씨는 16층에서 어디로 사라지셨던 겁니까? 초반에는 함께 있었던 거 같은데.”

우리 구역에서 질문을 담당하고 있는 서준호가 물었다.

“그냥 갑자기 어디론가 소환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서 열심히 수련하고 왔으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모두의 시선에 내 머리 위에 집중되어 있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나의 레벨.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줄곧 보여 주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이들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호영이 형님, 이제 내가 형님을 따라잡은 게 아닌가 싶은데, 다시 한번 내기 어때?”

최정혁. 깐족대는 성격은 여전하다.

오민아는 바로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제지했다.

“내기는 됐고 정혁아, 내가 빌려준 불굴의 검 말이야. 이제는 회수하려고 하는데.”

“뭐? 벌써?”

16층에서 몬스터를 미친 듯이 썰었을 테니 손맛이 익숙해져 있을 터.

이제 다른 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2주씩이나 써 놓고서 벌써라니.”

“어차피 형님은 더 좋은 게 있잖아!”

“아, 그게 내가 이제부터는 양손검을 좀 연습해 볼까 해서.”

“말도 안 돼! 그건 형님 스타일도 아니잖아! 이제 좀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도로 가져가 버리겠다고?”

“정 그러면, 나한테 돈 주고 사. 싸게 쳐줄 테니까.”

나는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차피 상점에 되팔지도 못하는데 치사하게!”

“너한테 따라잡힌 것 같아 불안해서 말이지. 양손검이라도 연습해 두려고.”

“쳇! 얼마에 팔 건데?”

“11만 골드.”

“와! 사기꾼! 그리고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이 녀석이야말로 사기꾼.

내 상태창에 보이는 최정혁의 골드는 11만 2600이다.

그래도 양심상 2600은 남겨 두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이젠 에누리 없이 11만 2500골드.”

“뭐?”

“싫으면 말고. 어차피 나야 양손검을 연습하면 그만이니까. 참고로 몇 초 뒤엔 가격이 더 오를 예정이야.”

불굴의 검을 괜히 빌려준 것이 아니다.

어디서 골드를 이렇게 벌었는지 이놈의 잔고 사정은 넉넉했으며, 한 번은 털어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놈 능력이라면 또 채워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11만 2500이면 시세보다도 저렴한 수준이고 말이다.

“사기꾼!”

이미 불굴의 검이 손에 익어 있을 테니 거부할 수 없는 거래일 것이다.

“정혁아, 잘 생각했어.”

내 손에 들어온 거금의 골드.

일단 쟁여 놓으면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것이다.

하다못해 엘릭서라도 사면 되니까.

* * *

동료들은 새 의복을 구입하는 데 기꺼이 100골드를 지불했다.

보기에 지저분한 것은 둘째 치고, 각종 몬스터들의 타액과 피가 뒤섞여 악취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누군가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말이다.

[이제 곧 17층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휴식 시간 없이 바로 시작되는 모양.

우리 모두는 숨을 죽이고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17층의 미션은 16층에서 구경꾼으로 선정된 플레이어 한 명이 단독으로 진행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에 없던 일이다.

다들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단독 미션이라는데요?”

“16층에서 구경꾼은 이호영 씨였잖아요!”

“그럼 이번엔 이호영 씨 혼자서……!”

나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공략집도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고.

[17층 미션에 도전하는 플레이어가 클리어에 실패할 경우, 해당 플레이어는 사망하게 되며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자동으로 18층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단, 나머지 모든 플레이어는 치명적인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탑이 또 장난질을 치는 것이다.

16층의 구경꾼은 폭렙의 기회를 상실하였으니, 상대적으로 17층의 난이도가 떡상하게 되는 격.

결국 모든 플레이어에게 페널티를 부과함으로써 폭렙의 이득을 상쇄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내가 17층을 클리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이호영 씨!”

다들 나를 불러 놓고는 말을 잇지 못한다.

본인들만 레벨업을 한 것에 대한 미안함. 다시금 마음의 빚이 되살아난 것이다. 참 쓸데없게도 말이다.

“가서 클리어하고 올게요.”

“아무리 이호영 씨라 해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기도 하고, 또…….”

“제가 16층을 건너뛰어서 불안하다 이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저희에게 부과될 페널티가 불안해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이호영 씨를 걱정하는 마음뿐이니 믿어 주길 바랍니다.”

“믿어요.”

나는 안세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겪고도 아직 모르고 있다.

탑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이호영 걱정이라는 것을.

* * *

[17층 미션을 시작합니다.]

[등장하는 모든 몬스터를 섬멸하십시오.]

탑의 의도는 명백했다.

16층에서 플레이어 한 명을 낙오시키고, 나머지 동료들이 그 대가를 17층에서 치르는 것.

결국 다 같이 엿 먹으라는 것이었다.

“저…… 저기에!”

로비 중앙에는 홀로그램 화면이 구현되기 시작했다.

영상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이번 17층 미션을 단독으로 진행하는 이호영.

그의 손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검 엘리시온이 들려 있었다.

“그래도 이호영 씨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16층을 패스했지만 그래도 원래 강했잖아요!”

“일단 지켜보죠. 어떤 몬스터들이 등장할지도 아직 알 수 없고.”

“아무리 호영이 형이라고 해도 이번엔 뭔가 좀 불안한데!”

걱정과 기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화면 속에 등장한 것은 여섯의 듀라한.

모두에게 익숙한 몬스터였다.

다들 16층의 후반부에 지겹도록 상대해 보았으니까.

“초반부터 듀라한이라니 세게 나오네요.”

“와! 그것도 한 번에 여섯 마리씩이나!”

머리 없는 괴물 듀라한.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난폭하고 저돌적이며 끈질긴 특성을 갖고 있는 몬스터.

16층에서 레벨을 20 가까이 올리고 나서야 상대할 수 있었던 괴물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은 자동으로 긴장 모드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과는 달리 화면 속의 이호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엘리시온을 휘둘렀다.

베어 낼 목이 없었기에 그의 검은 수직으로 움직였고, 한 번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듀라한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뭐야!”

“이렇게 쉽게?”

상황이 정리된 것은 단 여섯 번의 공격 이후.

그야말로 일격 필살이었다.

“괜히 걱정했잖아!”

남은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면 속에는 지체 없이 또 다른 몬스터가 등장했다.

“이번엔 미노타우로스?”

화면을 꽉 채운 거대한 몸체.

녀석은 폭력적인 괴성을 내지르며 이호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 괴물의 등장에는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16층의 최상위 몬스터종. 이놈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선 최소 서너 명의 플레이어가 달라붙어 협공을 펼쳐야만 한다.

단독으론 어렵다.

배후가 아닌 정면 공격으로는 거의 타격을 줄 수가 없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이호영이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13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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