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결과는 보나 마나겠지.”
긴장감 없이 치러진 1차 투표.
모든 살성들은 투표의 결과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
“열한 명 전원 동률이라는 데에 100골드 걸겠어.”
“난 200골드.”
분명 탑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곳은 일반 플레이어가 아닌 살성들만의 회합이니까.
“결과 나오면 서로 대화 좀 나눠 보는 게 어때??”
“동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동맹이라도 맺어 놔야 대표를 뽑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눈치 빠른 몇 명은 벌써 눈빛 교환을 하며 물밑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
좋은 처세술이다.
내가 이미 깽판을 놓아 버려 소용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결과 발표가 임박했지만, 모두가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이곳의 열한 명은 제각각 다른 구역 출신이며, 대표 선출에 대한 사전 교감은 있을 수 없는 일.
재투표를 예상하는 건 아주 합리적인 사고였다.
[20층 피의 날 살성 대표는 총 2표를 획득한 남소현 플레이어로 결정되었습니다.]
“뭐??”
“누가 결정됐다고?”
놀란 것은 남소현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표라고? 왜?”
하지만 그 의문에 대답은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살성 대표가 선출되어 회합을 종료합니다.]
[전원 귀환하겠습니다.]
“이게 뭐야!”
“이렇게 끝난 거라고?”
갑자기 주위 배경이 희미해진다.
항상 그렇듯 차원 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탑은 아주 신속하게 우리 열한 명을 포털 밖의 세상으로 돌려보냈다.
‘혹시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탑이 우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팝콘이나 뜯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되었든 살성 대표는 내가 원하는 인물로 결정되었다.
사실 내가 남소현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곳에 모인 10명의 살성 중 최약체였기 때문.
스탯상으로는 나와 비슷한 수준이며 나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더욱이 나와 같은 검투사라면 내가 질 이유는 없다.
사부와 함께 있는 남소현은 고작 자운심검을 전수받았을 뿐이니까.
‘피의 날이 시작되면 남소현부터 찾아야겠군.’
필승법은 아주 간단하다.
남소현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서 피의 날을 바로 종료시키는 것.
물론 변수는 존재한다.
피의 날까지는 몇 층이 더 남은 상황이며 살성은 빠르게 성장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부가 갑자기 변덕이 생겨 남소현에게 무영추혼검이라도 전수한다면, 상황은 상당히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녀와 안면도 터 두었고, 정보의 우위를 가진 것도 내 쪽이니 지금부터 준비만 잘하면 될 것 같다.
* * *
혈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단 이틀만 남게 되었다.
아마 한강혁이었다면 피의 날인 20층이 될 때까지 여기 머물렀겠지만, 난 16층이 종료되는 즉시 이 공간에서 사라지게 된다.
아마도 혈마는 그때까지 모른 척해 줄 것이다.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이 녀석 한강혁 아니었어?’라는 혼잣말을 하며 탑을 기만할지도.
문득, 16층에서 폭렙을 하고 있을 동료들 생각이 난다.
다들 잘하고 있겠지만 더 잘해야 할 것이다.
20층 피의 날이 만만치 않을 거란 걸 확인했으니까.
오랜만에 그들을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 세용아, 게으름 피우는 거 다 보인다.
- 채이설 씨…….
비록 회신은 오지 않지만 약간의 자극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성공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확실히 강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혈마의 집중 과외는 내가 오랜 시간 막혀 헤매던 곳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다.
동료들과 16층을 함께했다면 이 정도의 도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직접 혈마에게 확인을 해 봐야겠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라.”
“저를 가르치기로 탑과 계약을 맺었을 때 말입니다, 저의 검술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기준 같은 것도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지.”
“그럼 지금의 저는 그 기준을 넘었습니까?”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닐 텐데? 어차피 나와 탑 간의 계약이니까.”
“뭐, 그렇긴 합니다만.”
“……넘었다. 아주 살짝일 뿐이지만.”
예상은 했지만, 나는 이미 목표에 도달한 상태.
‘아주 살짝’이라는 표현도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한강혁이 20층이 되기 전에 해야 할 것을 16층 이내에 완료한 셈이니까.
“하지만 수라마혈검을 전체로 놓고 본다면 아직 네가 가야 할 길은 멀다고 할 수 있겠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니까.”
그래도 걸음마 정도면 후한 평가다.
사부였다면 이제 겨우 쓸 만한 쓰레기 정도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저도 저지만, 언제까지 탑에 계실 생각입니까? 어차피 우리 플레이어들처럼 탑을 등반하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내 질문에 혈마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웬만한 정보는 탑의 제약으로 발설이 금지되어 있으니 이것 역시 그럴지도.
“등선을 하든지 탑에서 죽음을 맞이하든지 둘 중 하나이겠지.”
“무림으로는 안 돌아가십니까?”
“무림? 난 그곳에서 수백 년 전의 인물이다. 내가 비록 탑의 신비로 기나긴 생을 이어 가고 있긴 하지만, 무림으로 돌아가는 건 인과율을 크게 거스르는 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평소와 달리 꽤 많은 이야기를 해 준 것.
물 들어왔으니 노를 저어야겠다.
“말 나온 김에 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 보고 싶습니다.”
“이미 수차례 이야기했다시피 계약의 제약으로 인해…….”
“제게 빚지신 거 있지 않습니까. 채무 관계도 정산할 겸 제약을 살짝살짝 피해 가는 수준으로 좀 들려주십시오.”
혈마는 탑의 고인물.
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게임 시스템의 공신인 만큼 사부보다는 탑의 제약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울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탑에 대한 이야기는 나 스스로도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니까.”
“말씀하십시오.”
“사부라고 불러 보거라.”
“네?”
“네게 수라마혈검을 가르치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네게 사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내가 너에게 빚이 있다지만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그건…….”
사실 의식적으로 사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내 진짜 사부에 대한 의리.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으니까.
“역시, 천마라는 자 때문이로군. 그래서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이냐?”
“네.”
“단호박 같은 놈.”
“그거 말고 다른 제안이었으면 웬만해선 받았을 겁니다.”
“필요 없다. 지금 난 네놈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니까.”
“…….”
“됐다! 됐어! 어떨 때 보면 참 사악한 녀석이 쓸데없는 고집이 있구나. 어차피 천마가 여길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건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고.
“도대체 탑에 대해 뭐가 궁금한지 들어나 보자. 딱 세 가지 질문만 받아 보기로 하지.”
뜻밖의 쿨내.
혈마가 각오를 한듯하니 조금이라도 탑에 대해 털어 봐야겠다.
* * *
“탑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답을 구하는 것이라 아니라 의견을 묻는 것입니다. 혈마께선 탑의 고인물 아니십니까?”
어차피 구체적인 정보에는 제약이 걸려 있을 게 뻔하니, 혈마의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는 쪽을 택했다.
개인 의견이지만 신빙성은 상당히 있을 것이며, 의견의 행간에는 사실적인 정보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캐치해 내야 한다.
“네가 속한 곳이 지구라고 했던가?”
“네.”
“아마도 넌 탑의 소용돌이 속에 지구가 중심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그 외 차원들은 들러리일 뿐이고 말이야.”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탑의 게임 시스템 속에서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은 지구인들뿐입니다. 무림을 비롯한 다른 차원은 게임을 위한 하나의 스테이지일 뿐이고요.”
“일단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탑은 팽창과 복제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팽창과 복제요?”
“그래. 내가 느끼기에 탑은 점점 커지고 있어.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탑은 지구 외의 다른 곳에도 이미 세워져 있어. 쌍둥이처럼 아주 똑같게 말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시지요?”
“그건 그렇지.”
쉽게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복제의 속성이야 그렇다 쳐도 팽창은 정말 곤란하다.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하는 속도보다 탑의 층수가 더 빠르게 늘어난다면 결국 탑의 결말 자체는 없을 테니까.
“탑의 목적을 물었던가? 그 대답까지는 나도 해 줄 순 없지만, 지금 많은 차원들은 탑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있을 거야. 네가 죽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면 그 통합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결말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알게 되었다.
‘탑의 페이스에 맞춰 등반하는 한 결말은 없을지도 몰라.’
어떻게 해서든 앞질러 가야만 한다는 것.
부디 공략집이 그 지름길을 안내해 주길 바랄 뿐이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리고 어디까지나 다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참고만 해. 괜히 내 말만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러죠.”
“그럼 다음 질문. 두 개 남았으니 잘 생각해 봐.”
이미 생각은 해 두었다.
탑에서의 내 최종 목표와도 관계있는 것이니까.
“탑과 혈마님의 격을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까?”
“질문 한번 세군.”
사부나 혈마는 내가 본 최고의 격을 가진 인물.
인간으로서 다다들 수 있는 정점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고 기연에 기연에 기연을 거듭하더라도 이들과 동격에 올라서는 건 어려운 일.
그럼에도 우주의 기운이 도와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탑은 얼마나 더 높은 곳에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일단 넘을 수 있는 것이어야 도전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미 한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처음 탑에 왔을 때 난 등선을 한 것으로 착각했었다고.”
“네.”
사부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니더군. 탑에 오고 나서야 나는 벽을 느낄 수 있었어. 그 이후 진짜 등선을 위해 수백 년째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야.”
혈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럼에도, 난 이 탑을 움직이는 미지의 존재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왜냐면 그놈은 내 앞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날 겁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 생각은 확실하게 바뀌었어.”
최근이라면, 혈마가 주화입마로부터 벗어난 이후를 말하는 것일 공산이 크다.
“왜죠? 혹시 정말로 겁냈던 것은 아닐까요?”
혈마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보였다.
“아니.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야.”
“그럼요?”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드러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나와는 격 자체가 다르니까. 그건 확실해. 내가 등선을 하지 않는 한 난 미지의 그놈을 만날 수가 없어.”
혈마가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탑과 본인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탑을 넘기 위해선 등선을 해야 한다는 결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 초인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만 그 경지를 노려볼 수 있을 테니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13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