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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31화 (131/292)

131화

“넌, 오늘 가야 할 곳이 있다.”

열흘째 되는 날 혈마가 뜬금없이 던진 말이었다.

“혹시 새로운 장소에서 수련을 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다. 그곳엔 너 혼자만 가는 것이니까. 또한 나는 네가 어디로 가는지,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탑의 결정이로군요.”

“그래. 이미 그렇게 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지.”

원래는 살성 한강혁이 가야 하는 곳.

혈마는 내가 한강혁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나를 그곳으로 보내려 했다.

‘역시 한강혁을 죽이길 잘한 건가?’

분명 살성만을 위한 무언가가 안배되어 있는 장소일 것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살성은 이 탑에서 특혜를 받는 존재이니까.

문득 나에게 온 살성 제안 메시지에 눈길이 간다.

[살성 제안을 수락하면 당신은 다음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150만 골드

2. 전설급 스킬

3. 전설급 무구

4. 마력 고속 성장

[수락하시겠습니까?]

며칠 새 조건은 더욱 향상되어 있었다.

처음 제시 금액이 80만 골드였으니 무려 두 배 가까이 오른 금액.

물론 나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탑과 이런 식으로 밀당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시간이 되었으니 포털을 열어 주마.”

“직접 하시겠다고요?”

“탑으로부터 받은 권능이지. 함부로 쓸 수는 없는 것이지만.”

사부는 내게 이런 탑의 권능을 보여 준 적이 없다.

그저 가끔씩 나와 똑같은 도플갱어를 소환해 내 대련을 시켰을 뿐.

‘하긴 혈마가 탑에서는 훨씬 더 고인물이니까.’

게다가 혈마는 시스템 속 검술 스킬을 창조해 낸 탑의 공신 같은 인물. 권능을 더 받은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이이잉-

혈마의 손짓에 공간이 찢어지며 균열이 생겨났다.

혈마가 나를 쿨하게 보내는 걸 보면 절대 위험한 곳은 아닐 것이다.

“다녀와라.”

“네.”

한강혁이 갔어야 할 저 미지의 장소로 나는 가볍게 몸을 던졌다.

* * *

[이곳은 피의 날이 펼쳐질 20층입니다.]

[살성의 권한으로 20층을 미리 체험하십시오.]

[남은 시간: 2시간]

[2시간 뒤 11인 전원이 한 장소에 소환됩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곳은 아직 플레이어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미래의 스테이지.

심지어 피의 날이 전개될 곳이었다.

‘피의 날이라.’

전부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살성들이 플레이어를 상대로 대학살을 펼치며 힘을 얻는 날.

본래는 10층에서 맞이해야 하는 걸 나와 손서연의 합작으로 한동안 유예시킨 날이기도 했다.

아마 두 번의 유예는 없을 것이다.

‘20층 이후에는 소수의 플레이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

살성은 탑의 생태계를 조절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만약 탑이 플레이어의 수가 과도하다고 판단한다면 살성의 권능을 대폭 높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속한 권역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찌 되었든 우리 권역은 10층에서 피의 날을 건너뛰어 버렸으니까.

“한강혁!”

내 앞에서 포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남소현. 검투사. 물론 살성이다.

“어.”

난감한 일이었다.

나는 상대를 전혀 모르는데 상대는 나를 아는 상황.

일단 말을 아낄 필요가 있겠다.

남소현과 한강혁이 어떤 관계인지도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오랜만이야. 체감상으론 몇 년 만인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

“뭐, 그렇지.”

“야, 무슨 반응이 그래!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 8층에서랑은 다르게.”

8층이라면 자격 갱신의 장.

검투사인 이 둘은 그때 처음 만난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당시 남소현을 보지 못했다.

한강혁 외에 또 살성이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회귀 이후의 내 자리를 채운 것이로군.’

“그나저나 한강혁, 너도 지금 검술의 고수로부터 배우고 있는 거 맞지?”

“어? 어.”

그건 남소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탑은 피의 날을 대비시키기 위해 살성들에게 스승 하나씩을 붙인 모양이니까.

남소현은 흥분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내 사부 말이야. 완전 대박. 무림 출신이라는데 검술에 이런 경지가 있나 싶어!”

“무림 출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림에서 왔으며 현재 탑에 있는 인물이라면…….

내가 아는 한 단둘뿐이다.

사부와 혈마.

“어, 천마신교의 교주인데, 본인 말로는 고금제일이라나 뭐라나.”

난 순간 이마를 짚었다.

사부는 지금 무림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시 탑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

심지어 또 한 번 제자를 거두어 버렸다.

물론 탑과 맺은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이 밀려왔다.

“말해 봐. 그 교주에게 무슨 검술을 배웠는지.”

지금 남소현에게 확인해야만 했다.

사부가 과연 무슨 검술을 가르쳤는지를.

“네가 말하면 알아?”

“알진 못해도 검술명으로 느껴지는 게 있잖아. 그게 일류인지 삼류인지.”

“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빨리 말해.”

“자운심검. 어때? 이름만 보면 삼류냐, 일류냐?”

“일류.”

사실 모른다.

천마신교에 있는 동안 들어 본 적도 없는 검술이니까.

순간적으로 사부에게 느꼈던 배신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만약 사부가 남소현에게 무영추혼검을 가르치기라도 했다면 멘붕에 빠질 뻔했다.

“정말 일류인 거 같아?”

“확실해.”

“그러는 넌? 누구에게 무슨 검술을 배웠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무림인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어. 그자의 별호는 혈마이고, 내가 배우고 있는 검술은 수라마혈검.”

“……삼류네. 이름만 들어 보면.”

“…….”

그렇게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고 보니 배신을 한 것은 사부가 아니라 나인 것 같다.

최고의 검술인 무영추혼검을 익혔음에도, 또다시 혈마의 검술을 배웠으니까.

심지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

‘이런 게 내로남불인가?’

그래도 변명할 거리는 있다.

내가 수라마혈검을 배우는 이유는 무영추혼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라는.

결국 검술의 궁극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니 말이다.

* * *

주어진 체험 시간은 2시간.

20층 전체를 꼼꼼히 둘러보기엔 부족했지만, 이곳의 대체적인 특성을 파악하기에는 또 충분했다.

20층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모두 트롤 종들이다.

베이비 트롤, 그냥 트롤, 트윈 헤드 트롤, 자이언트 트롤, 플라잉 트롤.

공통점은 모두 탁월한 재생 능력을 보인다는 점인데, 마지막 두 종은 상당히 위험하다.

‘레벨도 레벨인데, 전투 스타일 자체가 너무 까다로워.’

다른 플레이어들이 20층까지 폭렙을 하지 않는 한 이곳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20층의 특징 중 하나는 상점창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

필요한 물품을 미리 구입해 두어야 하는 것도 체크 포인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 명의 살성들.

이들은 저마다 고유의 세이프 존을 갖게 된다.

몬스터와 플레이어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는 공간이자, 마나 충전소.

‘완전 특혜로군.’

20층에서 살성이 웬만해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권역에 몇 명의 플레이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세이프 존이 있는 한 살성에게 무조건 유리한 싸움이 될 것이다.

[6번 포스트를 당신의 세이프 존으로 등록합니다.]

[당신의 20층 시작 지점은 이곳입니다.]

‘어? 이게 되네?’

20층에 존재하는 11개의 포스트.

나는 그중 하나를 나의 기지로 선점해 놓을 수 있었다.

살성이 아님에도 세이프 존을 얻은 건 이곳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제대로 보험 하나를 들어 놓은 셈이다.

[마나를 충전합니다.]

세이프 존에 발을 들여놓으니 바로 시작되었다.

트롤을 사냥하며 소진된 마나가 급속으로 충전된다.

게다가 충전 횟수에도 제한이 없다.

나에겐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재앙.

살성들이 미쳐 날뛸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다.

* * *

[소환을 시작합니다.]

제공된 2시간이 소요되자 모두 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둥글게 배치된 11개의 원탁.

우리는 그곳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를 제외한 10명은 모두 살성.

이곳엔 손서연도 있었다.

‘쓸데없이 반갑네.’

하지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진 않았다.

다른 살성들을 파악하기에도 정신이 없다.

남자 다섯에 여자 다섯.

칼쟁이 넷에 활잡이 셋, 창기사 둘, 총잡이 하나.

생김새나 표정도 제각각이다.

살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생글생글한 얼굴부터 딱 봐도 사이코패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표정까지.

‘이 권역에 미친놈년들은 다 모인 셈이군.’

물론 하나같이 능력치들이 사기급이다.

넘치는 마력에 높은 스탯.

몸에 두른 무구나 아이템들도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지금 왜 모인 건지 아는 사람?”

“혹시 탑이 주선하는 소개팅인가?”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다들 표정이 굳는다.

“기다려 봐. 곧 메시지가 오겠지.”

“그 전에 다들 몇 번 포스트를 선점했는지 공개나 하자고.”

서로에 대한 간단한 스캔이 끝났는지 이야기가 봇물 터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손서연은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 시끄러운 녀석들!

캐릭터 하나는 여전하다.

그리고 곧 탑의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D-1463구역의 살성 대표를 선출하십시오.]

[각 구역의 살성 대표는 피의 날 종료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습니다.]

[대표 선출은 무기명 투표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모인 이유가 이거였어?”

20층에서 살성이 갖는 또 하나의 특혜.

언제든지 20층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살성 대표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살성이 아닌 나도 이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갖는가?

그리고 같은 이유로 나는 살성 대표가 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곧 찾을 수 있었다.

‘나!’

즉시 나 자신에게 투표를 해 보았다.

[대표 권한이 없는 인물에게 투표하였습니다. 다시 하십시오.]

놀랍다.

살성이 아닌 이유로 비록 대표는 될 수 없지만, 투표권은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시스템의 오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내 한 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캐스팅 보트를 내가 쥐고 있는 셈.

‘자기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을 바보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점은 모두가 통찰하고 있었다.

“이 투표 말이야.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는 거 아닌가?”

“맞아. 모두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어.”

“피의 날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지만, 종료 선언의 권한은 너무 막강해. 살성 대표를 포기할 이유는 없지.”

모두가 이 투표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나선 상황.

이제 곧 탑은 우리에게 투표 절차의 개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싸움을 시켜 대표를 뽑게 한다든지.

탑의 빌어먹을 성향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그 전에 내가 나서야 한다.

“일단 시험 삼아 1차 투표를 진행해 보지? 결과가 모두의 예상대로라면,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야 할 테고 말이야.”

일단 이대로 1차 투표를 진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내가 원하는 대표가 결정될 테니까.

- 13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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