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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30화 (130/292)

130화

- 확실해졌어. 이놈은 한강혁이 아니야.

결국 혈마가 확신을 하게 된 모양이다.

언젠가는 알아챌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굳이 내가 한강혁인 척 애쓰지 않았으니까.

나의 과감한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혈마가 한강혁을 싫어한다는 것.

그것도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멸하는 수준이었다.

‘혈마는 한강혁을 가르치기로 한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었지.’

확신이 있었다.

내가 끝까지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한 모른 척 눈감아 줄 것이란 확신.

다시 말해 혈마가 한강혁의 복수를 하지 않으리란 확신.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누구냐 물었다. 너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준 사람.”

혈마는 무영추혼검의 근원을 내게 요구했다.

어쩌면 이미 무림 쪽의 향기를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거 꿈이었잖아요.”

“꿈?”

“네. 지금까지 계속 꿈 이야기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린다면, 그건 꿈일까 현실일까?”

“말씀 한번 살벌하게 하시네요.”

“말해라. 진짜로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는 수가 있다.”

혈마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반(半) 주화입마 상태에서 벗어나며, 지난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궁금하십니까?”

더 이상 시치미를 떼는 건 의미 없는 일.

더 했다가는 정말로 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말해라.”

“제가 가르쳐 드린다면요? 그다음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나러 갈 것이다.”

“왜죠?”

“그자와 겨뤄 봐야 하니까. 그리고 가려낼 것이다. 누구의 검술이 최고인지를.”

누가 무림인 아니랄까 봐.

“무림 고금제일을 가리시려는 거군요.”

“역시 그자도 무림인인가?”

혈마의 눈동자가 커진다.

입가엔 미소가 서린다.

그의 표정엔 만족스러움이 만연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만나 봐야겠군. 누구냐? 그자는.”

“……그분은 현 무림 천마신교의 지존이십니다.”

굳이 숨기지 않았다.

두 초인의 만남이 정말로 성사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나의 흥미가 동한다.

사부도 혈마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까마득한 후배로군.”

“그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존 외에는 누구도 수라마혈검의 아성에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무림에서는 말이죠.”

“수천수만 년의 시간이 흘러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일이다.”

놀랍다.

이런 멘트는 사부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그자는 이 탑에 있을 공산이 크겠군.”

“그분 역시 탑의 포털을 여신 분이니까요.”

혈마는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탑 어딘가에 있다면 만날 방법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

“……어제 그리고 오늘 너에게 빚을 졌군.”

역시 내가 말하지 않아도 혈마는 통찰하고 있었다.

본인이 주화입마에 걸렸던 것.

그리고 어젯밤의 일로 인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빚은 갚아야 하는 겁니다. 제가 어젯밤에 쓴 돈만 해도 어마어마하거든요.”

“빚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니 안심해라. 떼먹지 않을 테니까.”

이로써 확실해졌다.

16층 폭렙의 장을 건너뛰고 이곳으로 온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 * *

내가 탑의 메시지를 받은 것은 그날 밤이었다.

[당신은 살성을 살해하였습니다.]

[새로운 살성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오퍼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회귀 전의 내가 한강혁을 죽였을 때도 같은 제안이 왔었으니까.

‘그땐 고민 없이 수락하긴 했는데.’

당시의 나는 내가 곧 회귀를 하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 직접 살성이 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덕분에 호기심도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건 제안 조건이 너무 환상적이기 때문.

[살성 제안을 수락하면 당신은 다음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80만 골드

2. 전설급 스킬

3. 전설급 무구

4. 마력 고속 성장

회귀 전과는 제안 조건 자체가 달라졌다.

내 몸값이 많이 뛰긴 했나 보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나는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락할 생각은 없으나, 이대로 메시지 창을 띄워 놓고 조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기분이 드는 게 좋았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이 메시지는 자동 소멸할 테니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안 없어져?’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떠 있는 메시지.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거절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여전히 제안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탑이 내게 미련을 보이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 결정은 여전히 선택하지 않는 것.

어차피 거절할 거 애간장 좀 녹여 봐야겠다.

* * *

혈마가 달라졌다.

사무적이었던 지난 이틀과 달리 오늘은 의욕이 넘치는 열혈 교사의 느낌이다.

나를 후계자로 삼은 사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부는 좋게 말하면 자율적이지만 다소 방임적인 스타일이었는데, 혈마는 내게 밀착하여 모든 디테일을 쪼개어 가르쳤다.

‘설마 다 준비해 온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계적인 방식에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내게 느끼고 있는 마음의 빚을 정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네게 물어볼 것이 하나 있다.”

“말씀하세요.”

“너는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냐?”

“네?”

“나와 그자를 비교한다면 말이다.”

결국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의문이었다.

누가 더 세? 쯤 되는.

“저의 의견이 중요합니까? 어차피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경지도 아닌데.”

“……중요하다.”

“왜죠?”

“무림인들에겐 세간의 평도 목숨 같은 법이니까. 그리고 너는 나와 그자를 가까이에서 본 유일무이한 인물이지.”

쉬운 질문은 아니었다.

포털을 연 시점으로 따진다면 혈마가 사부보다 수백 년은 앞서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공에 더 정진하였을 테니 혈마 쪽이 우세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혈마가 등선에 완전히 성공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두 인물 모두 등선을 코앞에 둔 인물.

그 마지막 벽을 넘지 못했다면 누가 더 오래 살아왔는지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오십 보 백 보일 테니까.

“몰라요. 저는 정말 모릅니다. 다만, 두 분이 결판을 내는 날이 온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시고 저에게 결과를 전해 주십시오. 탑 내에서 소문은 확실하게 내 드릴 테니까요.”

“탑 내라고 해 봐야…….”

“혹시 또 압니까? 탑이 다시 무림과 연결되는 날이 올지.”

“좋다. 어찌 되었든 너는 그자와 나의 연결 고리이니, 네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지.”

역시 혈마가 달라졌다.

이토록 친절해지다니.

“그런데 혹시 탑이랑 친하십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혈마는 탑에서 가장 고인물이다.

지구에 탑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서 지내 온 인물.

심지어 사부보다 수백 년이나 앞서 있다.

‘사부한테는 물어볼 수도 없었는데…….’

사실 사부에게 탑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웬만한 것은 탑과의 맹약으로 인해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친하다는 표현보다는……. 내가 탑을 위해 많은 걸 해 온 게 사실이지.”

“무엇을 해 오셨단 말입니까? 혹시 말씀해 주실 수도 있습니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혈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곤란한 질문이다. 탑과의 맹약 때문에…….”

역시 혈마도 사부와 마찬가지.

이놈의 빌어먹을 맹약이 문제다.

하지만 그 순간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탑에 존재하는 검술 스킬의 삼 할 정도는 내 몫이겠지.

충격적인 이야기.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스킬들. 이것들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니.

‘게임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생겨난 거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

혈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탑의 또 다른 조력자들의 존재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직업과 수많은 스킬들. 이것들에는 모두 모티브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 아주 큰 것을 알아 버렸다.

‘좀 더 깊이 파 볼 필요가 있겠어.’

대답해 줄 리는 없지만 지금 혈마는 나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이니, 질문 자체에 거부감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탑과의 맹약. 안타깝네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갑자기 막 생각나는데.”

“아마 대부분이 다 답변해 줄 수 없는 것들이겠지. 너에게 빚이 있지만, 이걸로는 갚아 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군요.”

직접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부디 마음으로나마 생각해 주기를. 이라는 마음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혹시 이 탑을 만든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뭐 알고 계셔도 답변 못 해 주시겠지만.”

“정확히는 모르지만, 막연히 느끼고는 있지. 물론 이것도 얘기해 줄 순 없다.”

당연한 반응.

관건은 마음의 소리이다.

혈마에게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 내가 등선을 하게 된다면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인가?

결국은 들어 버렸다.

혈마의 말대로 뭔가 막연한 말이지만 말이다.

* * *

사흘이 더 지났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칼리아에서 홀로 수라마혈검을 수련하며 막혀 있던 부분, 그것을 혈마가 완벽하게 뚫어 주니 검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한 차원 더 깊어지게 되었다.

혈마를 아주 적절한 시기에 만난 것이다.

그동안 홀로 고민했던 인고의 시간이 없었다면, 혈마와의 수련이 지금처럼 알차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유익했던 점.

지금 내가 혈마로부터 배우고 있는 수라마혈검은 칼리아에서 본 것과는 미세하게 달랐다.

칼리아 시절 이후 수백 년간 혈마가 보완하고 다듬으며 만들어 낸 최종판인 셈이다.

위력이 더 강해지거나 초식이 정교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내 입장에선 익히기가 매끄러웠다.

이는 향후의 수련에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터.

혈마를 만나러 온 선택이 갈수록 만족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제 수라마혈검의 어엿한 인인자쯤 된 것인가?’

위대한 검투사 조셉, 그리고 검종의 마스터였던 엘라.

이제는 내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혈마와의 차이가 워낙 컸기에 인인자라는 칭호가 의미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앞의 메시지 창이 변해 있었다.

[살성 제안을 수락하면 당신은 다음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100만 골드

2. 전설급 스킬

3. 전설급 무구

4. 마력 고속 성장

[수락하시겠습니까?]

분명 처음에는 조건 1이 80만 골드였는데, 언제부터 100만 골드로?

탑의 애간장을 녹인 효과인지, 그게 아니면 수련을 하는 동안 나의 가치가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변화가 생겼으며 탑은 여전히 내게 보낸 살성 러브콜을 거두지 않았다.

이거 그대로 두면 점점 더 숫자가 올라가는 건가?

괜히 쓸데없는 호기심이 피어난다.

- 13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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