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수고했어. 캥수야.”
“캥!”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캥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캥수를 타고 절벽을 뛰어넘었으니, 모든 준비는 완료된 셈.
간밤에 설치해 놓은 덫도 완벽했다.
이제 혈마가 이 절벽을 뛰어넘기만 하면 내 계획의 첫 단계는 완성된다.
“캥수야, 설마 혈마가 포기하진 않겠지?”
“캥!”
“뭐? 정신 나간 상태이니 포기할 리가 없다고?”
“캥! 캥!”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사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거리가 꽤 멀다.
그래서 혈마가 살짝 걱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그는 미치광이의 상태이니 내공의 운용이 불안정했으며, 제대로 된 경공술을 펼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혈마는 주저 없이 뛰어오를 것이다.
캥수의 말대로 그는 정신 나간 상태이니까.
“크아아아아아!”
절벽 반대편에서 괴성 소리가 들려온다.
혈마가 마침내 절벽 끝에 다다른 것.
“캐애애앵!”
캥수도 혈마를 향해 보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혈마가 반대편의 우리를 발견하자, 그의 폭력적인 괴성은 더욱 커져 갔다.
이성이 마비되어 있는 그에게 절벽 사이의 거리는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
혈마는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고는 하늘 위로 도약했다.
폭주 전이라면 가볍게 넘을 수 있겠지만, 현재는 내공의 운용이 불안정한 상태.
더군다나 동트기 전의 칠흑 같은 어둠도 지금의 그에겐 제약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들은 기우에 불과했다.
‘세상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
혈마는 광폭한 한 마리의 독수리처럼 이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초인의 무의식이 놀랍기만 하다.
이제 관건은 혈마가 착지하게 될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때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자간의 덫]
상점창에서 몬스터 잡이용으로 판매하는 아이템을 설치해 두었다.
몬스터에게도 쓰지 않던 걸 이런 식으로 쓰게 되다니.
하나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무려 스무 개를 깔아 놓았다.
물론 혈마를 여기에 가두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분노한 혈마는 순식간에 이것들을 찢어발길 테니까.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찰나의 타이밍.
혈마에게 무사히 접근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면 족했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긴 했다.
‘고금 제일을 논하는 고수를 상대로 덫을 치다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온다.
휘이이이이잉!
혈마의 비행은 그야말로 경이적이었다.
무의식만으로 펼쳐 낸 무위가 그를 반대편 절벽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인도한 것이다.
차아악!
차아악!
차아악!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간의 덫.
스무 개의 그물이 동시에 혈마를 덮친다.
마력으로 자동 실행되는 성능이 아주 만족스럽다.
‘일회용짜리 하나가 무려 1000골드나 하는 것이니까.’
“크아아아아!”
마력의 그물 더미에 혈마의 시야가 잠시 가려졌다.
미친 정신 상태로 수십 미터를 비행한 직후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하며, 엘리시온을 들고 혈마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자간의 덫 스무 개가 곧바로 갈기갈기 분쇄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도 이미 예상했던 일, 시간을 오래 벌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려 2만 골드를 공중으로 태워 버리며, 그 대가로 찰나의 타이밍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단 한 번의 초식에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초인을 상대로 다음 기회라는 건 있을 수가 없으니까.
내가 가진 최선의 한 수, 무영추혼검이 혈마의 앞에서 전개되었다.
파아아앗!
엘리시온이 검 끝이 혈마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어느 때보다 성공적이었던 한 초.
콰아아악!
내 머릿속에서 엘리시온은 이미 혈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아아아아악!”
직접 마주한 현실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 엄습하였고 나는 절로 비명을 질렀다.
꿰뚫린 것은 바로 나 자신.
혈마의 검이 나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미치도록 아프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그래도 성공인가?’
혈마가 나를 일격에 죽이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긍정의 사고회로가 돌았다.
곧바로 나는 손을 뻗어 라덴의 에테르를 혈마의 가슴에 뿜어냈다.
마왕의 권능이 혈마를 덮쳐 간다.
[에테르의 기운이 상대의 심장에 스며듭니다.]
제아무리 혈마가 등선을 앞둔 인물이라 해도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 있는 자. 더군다나 미치광이의 정신 상태로는 마왕의 권능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에테르의 전이를 완료하였습니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에테르를 분출하는 데 꽤 많은 심력이 소모된 모양이다.
정신이 몽롱하다.
이제 정신줄을 놓고 기절을 해도 될 것 같다.
이제 뒷일은 캥수에게 부탁하며.
* * *
엘릭서.
무려 7만 골드라는 거금을 주고 상점창에서 구입한 치유 계통의 아이템이다.
주된 사용 목적은 마왕과의 계약으로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
하지만 바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엘릭서의 경이적인 효능은 극심한 부상을 회복시키는 데에도 있었으니까.
내가 구입한 엘릭서의 양은 200mL.
혹시 몰라 캥수에게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다. 비싼 거니까 아껴 쓰라고.
다행히 녀석이 아주 잘 이행해 준 모양이다.
엘릭서가 한 모금 한 모금 내 목을 타고 흐르며, 의식이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눈을 떠 보니 캥수가 내 입에 조심스럽게 엘릭서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캥수의 눈망울이 촉촉하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전래동화에 실리고도 남지 않을까?
“캐애앵!!”
눈을 뜬 나를 보자마자 캥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안 죽어. 인마.”
“캥!”
“그냥 좀 피곤했을 뿐이라니까.”
거의 오염되지 않은 영혼으로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려다 보니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가 상당한 듯싶었다.
캥수가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핥기 시작한다.
혈마는 내 옆에서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나와 동시에 기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수고했어. 캥수야.”
“캥! 캥!”
“엘릭서 좀 줘 볼래?”
“캥!”
[잔여량: 121mL]
기특한 녀석.
내가 기절해서 놀랐을 텐데, 그럼에도 엘릭서를 단번에 들이붓지 않았다.
덕분에 이 아이템이 가진 효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대략 80mL를 쓰니, 심력이 완전 회복되었으며 관통당한 어깨도 말끔해졌다.
200mL 전체를 사용한다면, 반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염된 영혼이 99% 정화되었습니다.]
또한, 영혼 치유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엘릭서가 소모되는 걸 확인했다.
‘여전히 완벽한 상태는 아니란 말이지.’
기왕 치유를 시작한 거 100% 상태로 돌려놓아야겠다.
오염된 영혼을 길게 남겨 두는 건 향후 마왕의 유혹에 취약하게 작용할 테니까.
나는 엘릭서를 한 방울, 한 방울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보냈다.
완벽히 회복되기까지 추가로 소모된 엘릭서는 13mL.
[잔여량: 108mL]
오늘 하루 제대로 돈지랄을 한 날이다.
* * *
선운봉 정상.
항상 그랬듯이 혈마는 오늘도 그곳에서 잠을 깼다.
평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다는 것.
어제 그 난리를 치고도 혈마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일단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혈마 역시 항상 그랬듯이 간밤에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과연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도 모르고 있을까?’
그의 반(半)주화입마 상태는 이제 말끔히 치유된 상태.
물론 낮에는 증상이 전혀 없었고, 밤에는 의식이 없었기에 혈마가 모른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닌 초인에 근접한 존재, 신변에 생긴 변화를 감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혈마는 좀처럼 마음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오늘 새벽에도 선운봉 아래로 내려가 수련을 했느냐?”
“아닙니다. 저는 줄곧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군.”
혈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콕 찍어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달라진 느낌.
어찌 되었든 오늘부터는 수련에 더욱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혈마는 이제 해 질 녘이 되어도 잠자리에 들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니까.
내가 지난밤 개고생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혈마는 어제와 다름없이 내게 검술을 전수하였다.
내가 익혔던 수라마혈검의 여백이 조금씩 채워진다.
그냥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탑에서 나의 재능은 사부도 인정했을 정도니까.’
14일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혈마 같은 초인과 함께라면 나를 한 단계 이상 도약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수라마혈검의 완성도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검의 이치와 묘리를 깨우치게 되며, 나의 근본인 무영추혼검도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지금 내가 혈마로부터 배우는 것은 사부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의 연장선.
결국 두 초인은 내게 같은 것을 전수하고 있는 셈이다.
밀도 있게 전개된 오늘의 교습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까지 깨어 있으시군요? 해만 지면 잠자리에 드시던 분께서.”
“지난밤, 꿈을 꾸었다.”
뜬금없는 동문서답.
하지만 혈마의 표정이 뭔가 의미심장했다.
“좋은 꿈이었습니까?”
“기괴한 꿈이었지.”
하긴, 기괴한 일도 있었으니까.
“그 꿈, 저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말씀해 보시죠. 혹시 또 압니까? 제가 기가 막히게 해몽을 할지.”
“해몽은 필요 없다.”
혈마는 내게 특유의 거리 두기를 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꿈에서 나는 미치광이였었지.”
첫마디부터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것은 지난 밤중에 있었던 일.
혈마는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그의 표정도, 마음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꿈에 나온 것은 바로 너였다.”
“말씀과는 달리 절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어쨌든 너는 괴상하게 생긴 괴물을 타고 다니더군.”
“꿈이니까요.”
뭔가 기분이 싸하면서 묘하다.
정말로 나에게 해몽을 바라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아직 알 수가 없다.
“꿈에서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너와 나는…….”
혈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간밤의 긴박했던 숨바꼭질이 다시금 머리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의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이 있었지.”
“그게 뭡니까?”
“꿈속에서 네가 펼쳤던 검술. 그것은 실로 놀라웠다.”
“…….”
“비록 네가 구현한 검술은 조악했으나, 그 본질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수라마혈검과 대등한 느낌이었으니까.”
“꿈에서는 뭐든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누구냐?”
“네?”
“누구냐 물었다. 너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준 사람.”
그 순간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확실해졌어. 이놈은 한강혁이 아니야.
역시.
꿈 이야기가 아니다.
혈마는 간밤에 벌어진 일을 다 알고 있었다.
- 13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