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내 말에 혈마는 코웃음을 쳤다.
“실력도 엉망에, 인성도 엉망. 거기에 머리까지 나쁜 녀석이로군.”
“…….”
“왜? 금세 들통 날 거짓말을 해 놓고선, 머리 나쁘다는 말이 억울해?”
“거짓말이 아니니 억울할 수밖에요. 어제 배운 내용들, 완벽하진 않아도 웬만큼은 소화했습니다.”
“멍청한 놈. 검술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아무리 살성의 특혜를 받고 있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혈마는 나뭇가지 집어 들었다.
“들어와라. 너의 오만함은 치료가 필요한 것 같으니.”
확실히 고수는 고수다.
그저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을 뿐인데, 공간이 가득 찬 느낌이 든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한강혁이 쓰던 장검을 꺼내 들었다.
엘리시온만큼은 아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가히 명검이라 할 수 있었다.
“갑니다.”
나는 혈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빈틈이 보이지 않아 접근조차 쉽지는 않지만, 지금 내 목적은 혈마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할 리도 없고.
지금은 그저 내가 가진 것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어제 한강혁이 펼쳐 낸 초식은 내가 숱하게 반복해 왔던 것.
칼리아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혈마가 카일의 협곡에 남겨 놓은 수많은 검흔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슈우우우욱!
허공을 종이 삼아, 검을 붓 삼아 나는 그 흔적을 따라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더없이 좋다.
‘베스트 컨디션!’
하지만 쏘아져 나간 나의 검은 혈마의 나뭇가지에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되었다.
검과 맞닿은 나뭇가지는 마치 자석처럼 나의 검을 이끌고 다니며 모든 힘을 흩뜨려 놓았다.
말도 안 나오는 경지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등선에 근접한 초인의 검술에는 자연스러운 경외감이 생긴다.
사부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이런 절대고수조차 주화입마에 걸린다는 것은…….’
무공의 경지에는 끝이 없다는 의미.
혈마의 검술에 무작정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다음 초식을 이어 갔다.
애당초 털끝 하나 벨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으며, 나는 나의 것만 보여 주면 족할 것이다.
스으윽!
스으으으윽!
수라마혈검은 무림 제일의 패도적인 검술.
내가 만들어 낸 두 개의 직선이 공간을 찢어 놓을 듯이, 혈마를 네 동강 내 놓을 듯이 공중에 뿌려졌다.
하지만 야심 찼던 이번 공격 역시 혈마의 가벼운 동작 한 번에 무위가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우리 둘의 거리.
그 순간 혈마의 손에 들려 있던 나뭇가지가 사라진다.
슝!
‘뭐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점.
‘점?’
혈마의 손에서 사라진 나뭇가지가 화살처럼 날아든다.
단순한 나뭇가지가 아니다.
내공을 가득 머금은 저것에 맞는다면 이마에 구멍이 생길 테니까.
타악!
나는 반사적으로 장검을 들어 올려 간신히 나뭇가지의 경로를 바꾸었다.
순간 찌릿한 느낌이 들며, 팔 전체가 저려 온다.
가공할 만한 내력이 느껴진다.
물론 이조차도 혈마가 힘 조절을 한 것이겠지만.
혈마는 고고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머리가 나쁘다고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실력이 엉망이라는 말은요?”
“착각하지 마라. 대단히 감탄한 것은 아니니까.”
거짓말이다.
혈마는 방금 내가 보여 준 무위에 격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진다고? 이런 것이 가능한 일이었던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혈마는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다행이라면, 아직 내가 한강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
- 이것이 살성이 가진 권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 녀석은 너무 위험하다!
살성의 권능.
이것이 혈마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개연성이었다.
“그래도 많이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워낙 엉망이었으니, 이제는 성장할 때도 된 것뿐이다.”
혈마는 애써 나의 발전을 폄훼했다.
“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시군요. 가르치는 입장에선 보통 이럴 때 가장 좋아하던데.”
“난 네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니 기뻐할 이유도 없지.”
혈마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적어도 저 말은 진심이다.
“왜죠?”
“넌, 인성에 문제 있는 놈이니까.”
이렇게 되면 내 계획이 어그러져 버린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 혈마의 점수 좀 따 볼까 했는데.
‘확실히 사부랑은 다른 캐릭터네.’
천마신교 내에선 인성 따윈 중요한 덕목이 아니었다.
과도한 인성은 오히려 약점.
오직 중요한 것은 단 하나, 힘뿐이었으니 차라리 그쪽이 편했다.
“제가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놈만은 아닙니다.”
“이미 늦었다. 네놈의 실체를 다 알게 되었으니.”
“…….”
할 말이 없다.
한강혁. 그 자식이 무슨 말을 싸질러 놓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살성이 무엇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난 탑의 제안을 거절하였을 것이다.”
“후회가 막심한 모양이십니다.”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넌 걱정할 필요 없다. 너를 제자로 거둔 이상 가르치는 일에 소홀함은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다행인데, 사실 내가 바라는 수준은 소홀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수라마혈검의 모든 정수를 지도하는 것.
그것을 바랐기에 16층의 폭렙 미션을 포기한 것이다.
제자에 대한 애정이 고작 이 정도라면 곤란하단 의미.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만약 제가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죽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내가 있는 데도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당신이 주화입마에 빠지는 밤이 왔을 때.
“그럼에도 죽는다면요?”
“내가 널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든 사제 지간은 사제 지간. 만약 지켜 주지 못했다면 복수는 해 줄 것이다.”
“……그렇군요.”
결국 커밍아웃도 물 건너갔다.
“검술이나 또 가르쳐 주십시오.”
혈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천금 같다.
남은 시간을 밤낮으로 수련에 매진하는 수밖에.
혈마가 겪고 있는 밤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말이다.
내 몸 속에는 라덴으로부터 받은 에테르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혈마의 폭주를 잠재우고 치유할 수 있는 마왕의 권능.
가장 난감한 문제는 혈마의 광기가 발현되어야만 에테르가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잘해 낼 수 있을까?’
거사를 앞두고 나니 고민이 깊어진다.
* * *
신기하게도 혈마는 밤에 대한 기억에 전혀 없다 하였다.
필름이 끊긴 채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매일 아침이 되면 활력이 넘칠 정도라고 하니까.
“이 또한 탑의 신비일 것이다.”
혈마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완전 꿈보다 해몽이 좋다.
어찌 되었든 밤마다 미쳐 날뛰는 걸 본인은 모르고 있다.
한강혁 이놈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던 모양이고.
‘휴대폰이 있었으면 촬영이라도 해 놓을 텐데.’
이제 서서히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혈마의 폭주는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닐 테니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다면 캥수의 존재였다.
캥수를 소환하여 타고 도망친다면 최소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너.”
“네.”
“숨기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혈마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니 한강혁은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까.
“없습니다.”
순간 움찔했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보아, 내가 한강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내가 한 말 하나를 더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실력 엉망, 인성 엉망 중 어느 쪽 말입니까?”
“나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사람의 인성이 변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뭐, 그럼 제 실력이 아주 쓰레기는 아니란 이야기군요.”
“아니. 네놈 실력에 대한 평가를 잠시 보류하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됐고! 오늘 배운 것이나 복습해라.”
“벌써 주무시러 가십니까?”
“탑의 신비 때문에 항상 이맘때만 되면 졸리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확실합니까? 탑의 신비 때문인 거?”
“확실하다.”
헛웃음이 나온다.
등선 직전까지 갔던 고수가 이렇게 허술한 생각을 갖고 있다니.
‘하긴, 사부도 무공을 제외하면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지.’
혈마는 잠자리를 향해 걸어간다.
문득 하늘을 보니 이제 해는 산을 완전히 넘어가고 있었다.
“정말 확실합니까? 탑의 신비?”
“정말 확실하다.”
단호박 같은 노인네.
무슨 근거로 이토록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정말 확실합니까?”
“…….”
“탑의 신비로 매일 이 시간마다 졸리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뒤돌아본 혈마는 말이 없었다.
방금 전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폭주!’
서서히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혈마의 눈빛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저건 절대 사람의 느낌이 아니다.
“캥수야!”
나는 즉시 캥수를 소환했다.
“캥!”
“미션이다. 잡힐 듯 잡힐 듯 안 잡히는 거. 할 수 있겠어?”
“캥!”
“너만 믿는다.”
“캥!”
눈에 초점을 잃은 혈마는 언제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뛰어!”
드디어 달밤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 * *
어쩌면 기네스북에 등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술래잡기를 시작한 지도 대략 여덟 시간은 되었을 터.
하지만 혈마는 여전히 힘이 넘쳤고, 다행히 캥수의 기동력에도 문제는 없었다.
“캥!”
갑자기 캥수가 부스터를 단 것처럼 달리자, 혈마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혈마에게 이성이 존재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가 펼치는 본래의 경공술은 캥수의 스피드를 능가할 테니까.
폭주하는 혈마에게 이성은 없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였고, 오로지 날 죽이겠다는 일념만을 가진 악귀에 불과했다.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검기는 나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충분히 거리를 벌리며 도망치고 있어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제정신이 아니라 능력치가 대폭 너프되었을 텐데.’
비록 미치광이가 되었어도 혈마는 혈마. 감히 내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저 노인네는 지치지도 않네.’
내 당초 계획은 혈마를 탈진시키는 것.
라덴으로부터 받은 에테르를 혈마의 가슴에 터뜨리기 위해선 혈마의 기운을 빼놓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 혈마에게 접근하는 것은 자살 행위니까.
문제는 혈마가 폭주를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탈진이 멀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술래잡기만 벌써 여덟 시간 째, 이제 곧 동이 트게 된다.
다시 또 내일 밤으로 미루고 싶진 않았다.
“캥수야. 해 뜨기 전에 도박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캥!”
“뭐? 절벽으로 유인해 보겠다고?”
“캥!”
“기특한 놈. 너, 내 생각을 읽었구나.”
세팅은 지난밤에 완료해 놓은 상태.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에, 실행하지 않고 있었다.
폭주한 혈마가 절벽을 넘지 못한 채 추락사라도 한다면, 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 버릴 것이기에.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이 노인네, 비록 폭주하였다고는 하나 고작 절벽 하나를 넘다가 죽을 리가 없다.
그것이 여덟 시간 술래잡기의 결론.
“가자, 캥수야.”
“캥!”
시간이 없다.
조금 있으면 동쪽에서 아침 해가 산 위로 머리를 들이밀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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