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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27화 (127/292)

127화

“자…… 잠깐! 당신께 제안할 얘기가 있어요.”

한강혁이 황급히 나를 멈춰 세웠다.

“말해 봐. 어차피 개수작이겠지만.”

“개수작이라니요. 당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당신의 외양이 저와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혈마를 속일 순 없을 테니까요.”

“계속해.”

“혈마를 완벽히 속이려면, 제가 그로부터 전수받은 검술이 필요할 겁니다.”

한강혁은 나를 향해 검끝을 세웠다.

지금 녀석이 유일하게 믿는 구석.

바로 수라마혈검이다.

“뭐,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야.”

“오늘 밤 제가 그걸 당신에게 알려 드리죠. 저를 죽이는 건, 다 배우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단 말입니다.”

한강혁은 말을 하는 내내 계속 뒷걸음을 쳤다.

이 녀석이 회귀 전보다 확실하게 좋아진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가늠하는 본능.

한강혁 본인도 충분히 강자이지만, 나에게 정공법으로 맞설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녀석은 꼼수를 부리고 있었다.

나에게 수라마혈검을 알려 준다는 핑계로 오늘 하룻밤을 버틴 뒤, 내 뒤통수를 칠 기회를 노릴 것이다.

사실 들어 볼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내 수라마혈검의 경지가 더 높을 테니까.

“오늘 하루 안에 배울 수 있는 거 맞아?”

“당신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물론 아부성 발언이다.

“일단 보여 줘 봐. 아까 자이언트 오크의 목을 베었을 때의 그 초식.”

“좋아요, 역시 현명하신 분! 잘 생각하셨습니다!”

내 말에 한강혁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잠시 후 녀석은 검을 들어 올렸다.

“잘 보세요! 당신이라면 오늘 밤 안에 저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휘이이이이잉!

한강혁이 허공을 높이 차올랐다.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우아하게 도약한 한강혁은 검날에 마력을 두른다.

‘오러 블레이드!’

푸른 빛의 섬광이 컴컴한 주변과 대비되어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스으으윽-

녀석의 검날은 검정색 도화지에 부드러운 한 획을 그려 냈다.

잠시 후 푸른 잔영이 공중에 흩날린다.

혈마에게서 얼마나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한강혁 역시 자신이 펼쳐낸 초식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다.

“쓸 만해.”

“에이, 평가가 너무 박하신 거 아닙니까? 무려 고금 최고의 고수에게서 사사받은 검술이란 말입니다.”

“고금 최고? 혹시 혈마가 그렇게 말해?”

“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일 겁니다. 그가 펼치는 검술은 완벽 그 자체니까.”

“틀렸어.”

혈마가 살았을 당시엔 그가 고금 제일인이라는 말이 사실일 것이다.

또한 그 뒤로도 수백 년 간은 이 말이 유효할 거라 생각한다.

사부가 무영추혼검을 완성하기 직전, 딱 그때까지만 말이다.

“틀렸다고요?”

“어. 그리고 방금 전 네가 펼친 수라마혈검 말이야, 그것도 틀렸어.”

“……하하. 그게 무슨…….”

“보여 줄게. 제대로 된 수라마혈검을.”

나는 한강혁을 향해 엘리시온을 들어 올렸다.

“다…… 당신 뭐 하려는 거죠?”

살성. 한강혁.

이 녀석을 죽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회귀 전에 그랬듯이 탑은 또 나에게 살성의 공석을 채우라고 요구하려나?

“잘 봐. 혈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꽤 하거든.”

* * *

[살성을 살해하였습니다.]

한강혁의 목이 잘린 후 짤막하게 뜬 메시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탑은 이후 나에게 어떤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대신 한강혁이 죽은 자리에 검은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한다.

‘라덴?’

15층에서 계약을 할 당시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죽은 생명의 영혼을 촉매로 우린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소용돌이는 점차 형상을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될까 봐.

스르르르-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는 법이다.

- 바로 또 만나네?

라덴의 목소리가 쾌활했다.

내 기분은 불쾌했고.

-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네?

이젠 굳이 표정 관리를 할 이유는 없다.

15층에서처럼 그녀가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건 아니니까.

“무슨 일입니까?”

- 질문이 이상하네? 나와 소통을 시도한 건 너잖아.

“그럴 리가요. 당신과 상관없이 그냥 죽어야 할 놈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이렇게 나타날 생각입니까?”

- 꼭 그렇진 않아. 네가 손바닥의 세균을 죽일 때마다 내가 나타나야 한다면 너무 번거롭지 않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 쳇! 역시 비싸게 구는군. 그런데 너 방금 도대체 누굴 죽인 거야? 촉매제의 존재감이 너무 크잖아!

“그냥 나쁜 놈이요. 뭐, 어쨌든 더 볼일 없으면 그만 가시면 됩니다.”

- 와! 너 말 진짜 서운하게 한다. 그럼, 오늘은 영혼 넘길 생각 없어?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난 상관없는데.

“안 팔아요.”

- 보아하니 필요한 상황인 거 같기도 한데.

“안 속아요.”

- 혈마란 놈. 딱 봐도 네 주변에 위험한 놈이 있는데 괜찮겠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왕 라덴. 그녀는 촉매제를 통해 다른 차원의 공간까지 굽어보고 있었던 것.

심지어 혈마의 상태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영혼을 팔면, 혈마를 이길 수 있는 힘이라도 주겠다는 겁니까?”

궁금하긴 했다.

과연 라덴은 나에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는지.

물론 영혼을 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 뭐? 혈마를 이기게 해 줘? 너무 무리한 요구잖아! 너, 양심 무엇?

“그럼 됐습니다.”

- 이기게 하진 못하더라도 위험성 정도는 제거해 줄 수 있겠지. 혈마의 상태를 보아하니 밤에 미쳐 버리는 설정인 거 같은데, 원인은 모르겠지만 이게 영혼이 망가져 버린 결과물이거든. 그런데 마왕이 어떤 존재냐? 영혼 전문가 아니겠어?

놀라운 이야기였다.

혈마는 현재 반(半)주화입마에 빠져 있는 상태.

그럼에도 라덴은 자신 있게 혈마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하였다.

“제가 영혼을 넘기면, 당신이 위험 상태를 제거해 주겠다 이겁니까?”

- 내가 직접 개입하는 건 무리고, 너에게 능력을 부여해 주어야겠지. 어때? 이제 흥미가 동하지 않아?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영혼 거래는 여전히 사절이었다.

한번 오염된 영혼은 되돌릴 수 없는 것. 너무나 위험부담이 큰일이다.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오염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상점창에서 판매하는 엘릭서에는 숨겨진 효능이 존재하는데, 바로 영혼 치유의 능력입니다.]

[가격: 70,000골드/200ml]

아무런 방향 제시도 없이 공략집의 메시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나더러 어쩌라는 것인지.

일단 잔고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보유골드: 104,700]

엘릭서의 200ml가 어느 정도의 효능을 지녔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상황을 그냥 넘겨 버리는 건 공략집의 정보를 낭비하는 셈.

이렇게 됐으니 질러 볼 가치는 있었다.

향후, 마왕의 힘을 활용할지 여부에 대한 실험용으로 말이다.

-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혹시 영혼을 넘길 고민을 하고 있는 거라면 대환영이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영혼을 넘기라니요! 뭐, 티끌만큼이라면 잠깐 생각해 보겠지만요.”

- 호오!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거네?

“아니에요. 제가 미쳤지. 됐습니다! 안 팔아요!”

- 야, 그런 게 어딨어! 팔아! 진짜 티끌의 티끌만큼만 가져갈 테니까.

“티끌의 티끌만큼이라 하면?”

- 너와 계약했을 때의 딱 절반!

그 정도면 허용 가능한 수준이다.

그야말로 자각하기 힘들만큼 미미한 양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 절반이면, 충분히 엘릭서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아요. 안 팝니다. 협상 끝!”

- 반에 반! 더 이상은 안 돼!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라덴.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다.

향후 협상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도.

* * *

동이 텄다.

한강혁의 말대로라면 이제 슬슬 혈마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할 시간.

참 불편한 설정이었다.

매일 밤 이렇게 혈마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의미니까.

물론 이런 귀찮음도 내일부터는 없겠지만 말이다.

[미니맵을 가동합니다.]

일단 혈마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그는 매일밤 폭주를 하며 돌아다니지만, 늘 아침이면 선운봉 정상이라 했는데 과연…….

‘신기하네.’

역시 혈마는 그곳에 있었다.

바다로 떠난 연어가 산란기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지금 그는 선운봉 정상이었다.

위치를 확인했으니 이제 혈마를 만나러 갈 시간.

내겐 단 14일만 주어졌으니 1분 1초가 아쉽다.

“캥수야 가자.”

“캥!”

나는 캥수의 등에 올라탔다.

내 마음을 아는지 캥수는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날지를 못하는 게 좀 아쉬울 뿐이지, 이동 수단으로는 최상의 펫이다.

“그렇지 캥수야?”

“캥!”

“그런데 혈마가 과연 날 한강혁이라 믿을까? 네 생각은 어때?”

“캥!”

“뭐? 감쪽같이 속을 것 같다고?”

“캥!”

캥수가 뭘 알겠느냐마는 마지막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혹시라도 혈마가 눈치챈다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하지만 잠시 후 그 걱정은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너, 오늘도 새벽부터 싸돌아다닌 것이냐?”

혈마.

조금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작은 체구에 깊게 패인 주름살.

까칠해 보이는 눈빛은 초절정고수의 종특인 듯싶다.

“네. 산 아래로 내려가 어제 배운 검술을 연습하느라.”

“하여간 말 한번 더럽게 안 들어요. 선운봉 정상의 맑은 정기를 받으며 수련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몇 번을 말했냐?”

“……그렇긴 하지만.”

이곳 선운봉에서 밤을 새웠다가는 당신의 폭주에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차마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한강혁도 매일 아침 답답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침마다 산 정상을 올라야 하며, 또 정상에 올라서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

하루의 시작이 너무 빡센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달라지겠지만.

“네놈 성취가 더딘 것도 다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

“형편없는 놈. 무림에서 만났더라면 널 제자로 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가 그 정도로 엉망입니까?”

“실력은 엉망. 인성은 더 엉망이지.”

한강혁은 혈마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녀석의 사이코패스 성격에 독살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이놈을 키워도 걱정. 못 키워도 걱정이로군. ……피의 날이라 했던가.

갑자기 혈마의 고뇌가 들려온다.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이 속에 여러 상황들이 함축되어 있다.

혈마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강혁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제자 놈으로 들어온 녀석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

결정적으로 한강혁을 키워야 하는 목적이 피의 날을 위해서라는 것.

“탑과의 맹약 때문입니까? 절 가르치시는 거 말입니다.”

“그럼 달리 이유가 있을까 봐?”

혈마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미 맹약은 무효가 된 상태이다.

살성 한강혁이 죽어 버렸으니까.

“어쨌든 기왕 사부가 되셨으니 열심히 좀 알려 주십시오.”

“건방진 놈. 알려 주는 것도 제대로 소화 못 하는 주제에.”

“소화했습니다만? 어제 알려 주신 거 말입니다.”

“뭐?”

혈마로부터 점수를 좀 따야겠다.

인성은 몰라도 실력은 바로 증명해 보일 수 있을 테니까.

- 12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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