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혈마의 수정체가 나를 안내해 준 곳.
포털 너머의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아주 고약한 냄새였다.
“취이이이이익!”
[자이언트 오크]
무려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뿜어내는 냄새는 일반 오크의 몇 배나 지독했다.
“취이이이이익!”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손에 든 철퇴를 공중에 빙빙 돌리고 있었다.
일단 저 괴물의 완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사람 키보다도 큰 철퇴를 아무렇지도 않고 돌리고 있으니까.
부우우우웅!
자이언트 오크는 그 거대한 철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지면이 살짝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이토록 폭력적인 힘을 가진 오크가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 않았다.
휘잉!
그리고 오크의 신장만큼 높이 튀어 오른 한 인영.
손에는 장검 한 자루를 들고 있다.
헐떡거리는 호흡으로 보건대 꽤 오랫동안 오크와 경합을 벌이고 있던 모양이다.
‘찬스로군.’
오크가 노출한 찰나의 빈틈.
스으으윽!
마력이 폭발하며 검날이 호쾌한 사선을 그렸다.
아름답고 절묘한 한 수였다.
선혈이 튀며 오크의 목이 베어진다.
‘수라마혈검!’
단 일 검이었으나, 수라마혈검의 향기가 느껴졌다.
깔끔하게 절단된 오크의 머리통은 그대로 추락했다.
“취이이익!”
오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괴성은 다시 한번 역한 냄새를 뿜어낸다.
그리고 오크의 머리통과 함께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인물.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살성이 있다더니 이 녀석이었어?’
8층 자격 갱신의 장에서 만났던 검투사이자 살성.
한강혁이었다.
여러모로 인상 깊은 놈이었다.
당시 저레벨임에도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였으며,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을 보이며 같은 파티원을 무참히 살해한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무엇보다, 이 녀석이 인상 깊은 이유는,
‘내가 죽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회귀를 하였으니, 한강혁은 다시 살아났다.
오로지 나만 기억하고 있는 과거.
당연히 한강혁은 나를 모른다.
천마신교에서 재회한 사부가 나를 몰랐던 것처럼.
한강혁은 나의 등장에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당신,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겁니까?”
이 녀석 특유의 존댓말은 여전하다.
“방금 왔어.”
“기척은 전혀 못 느꼈습니다만?”
“그럴 테지. 포털을 타고 왔으니까.”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기도 했고.
“포털이라…… 당신, 뭐 하는 새끼죠?”
존댓말을 쓰고 있을 뿐, 안하무인 같은 태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탑에 들어온 이후 항상 강자의 입장으로 살았을 테니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에게 죽었던 것이고.
“제가 물었잖아요? 당신 뭐 하는 새끼냐고.”
“나?”
“그럼, 여기 당신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뒤를 봐.”
고개를 돌리는 한강혁의 얼굴을 향해 거대한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쏘아진다.
퍼어어억!
“캥! 캥!”
그때도 그랬었다.
내가 한강혁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
2 대 1이었으니까.
쿠웅!
한강혁은 그대로 바닥에 뻗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캥수의 풀스윙을 맞고도 버텨 낼 재간까진 없는 것이다.
“케엑 켁! 너 뭐 하는 새끼야!”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재수 없게 존댓말을 쓰니까 그렇게 처맞는 거잖아.”
일단은 이 녀석부터 줘 패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 * *
한강혁을 죽일까도 살짝 고민을 했었다.
살아 있다면 다양한 만행을 저지를 놈이 분명했기에.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혈마.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혈마와 한강혁은 사제 관계에 놓여 있는 상태이다.
내가 한강혁을 죽인다는 것은 혈마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에 잠시 보류해 두었다.
그래도 패는 것까진 괜찮을 거란 생각이었다.
‘이 녀석에게 알아내야 할 게 좀 있으니까.’
바로 묻는 것보다는 반 죽여 놓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할 터.
퍼억-
퍼어어억-
한강혁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나는 여전히 손속에 정을 두지 않았다.
녀석은 영문도 모른 채 맞고 또 맞았다.
살성으로선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귀한 시간일 것이다
“나한테, 뭐 하는 새끼냐고 물었던가?”
나는 털썩 주저앉은 한강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양쪽 눈은 퉁퉁 부어 있었으며, 코뼈는 푹 주저앉았고 입술은 위아래로 겉과 속이 다 터져 있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거야?”
녀석은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없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 보니 이미 멘붕에 빠져 있었다.
공포의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으니 일단은 성공한 셈.
나중에 어떻게 또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쫘아악!
나는 이미 퉁퉁 부은 한강혁의 따귀를 한 번 더 때렸다.
“정신 차려!”
이미 저항 의지를 잃었기에, 한강혁은 맞고만 있었다.
“사…… 살려 줘…….”
“살려 줘?”
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쫘악-
나는 녀석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한 번 더 얘기해 봐.”
“살려 줘.”
쫘아악-
쫘아아악-
이번엔 좌우를 번갈아 때렸다.
“틀렸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
“따라 해 봐. 살려 주세요. 라고.”
“……사 ……살려 주세요!”
쫘아아악-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초면에 반말을 하면 이렇게 처맞는 거야.”
한강혁은 넋 나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손이 다시 올라가자, 놈은 황급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못했습니다.”
역시 매 앞에 장사 없다.
이렇게 고분고분해진 한강혁을 보게 될 줄이야.
사실, 좀 부족한 감이 있었으나 일단은 이 정도로만 해 두기로 하였다.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오크 사냥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봤어. 그런데 지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혹시 좀 더 맞고 싶은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그럼 빨리 말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16층에 있는 동안, 넌 왜 여기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 순간, 한강혁의 동공이 흔들린다.
- 이놈, 살성이 아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여긴 오직 살성만이 올 수 있는 곳.
그렇다면 손서연 역시 다른 어딘가에서 한강혁처럼 지내고 있을 것이다.
“대답이 좀 늦네. 살성 한강혁.”
나는 의도적으로 살성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
한강혁은 황급히 대답했다.
“15층이 끝나자마자,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와 버렸습니다!”
“왜?”
“피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라고 들었습니다. 참고로 피의 날이라는 것은…….”
“그 설명은 됐어. 나도 알고 있는 거니까. 피의 날이 언제인지나 이야기해 봐.”
“20층입니다.”
좋은 정보.
예상과 다르게 한강혁은 술술 불었다.
이런 걸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진실이었다.
“이렇게 나한테 막 알려 줘도 되는 거야?”
“당신은 살성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니까요.”
이게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로선 편리한 설정.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 20층 피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뭐 그런 건가?”
“맞습니다.”
“혼자서?”
“그건 아닙니다. 무림의 고수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줘 패고 시작하길 잘했다.
이렇게 바로 바로 말할 줄이야.
“그럼 다음 질문. 다른 살성들도 다 어딘가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해? 너만 유난히 약해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야 ……약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약해.”
확실히 약하다.
손서연과 비교하면 어린애 수준일 정도로.
“자, 그럼 다음 질문.”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야만 했다.
살성, 그리고 피의 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 * *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단 14일.
일 분 일 초가 천금 같은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혈마를 만나기엔 좀 곤란할 거 같았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밤에는 혈마가 그 정도로 위험한가?”
“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성을 잃은 몬스터 같다고나 할까요?”
“아침이 되면 본인은 전혀 기억 못 하고?”
“네. 필름이 완전히 끊긴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략집이 미리 언질을 준 대로, 혈마는 주화입마에 빠져 있는 상황.
한편으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낮에는 온전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 이거지?”
“네. 밤에 폭주를 하더라도 이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은 거 같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이 녀석과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캥수를 불침번으로 세워 놓으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한강혁은 능숙하게 야영지를 꾸렸다.
불을 피우고, 이미 채취한 과일을 꺼내 왔다.
녀석은 나에게 가장 탐스러운 사과 하나를 건넨다.
“독 들어 있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제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로비만 떠나면 억제되어 있던 식욕이 폭발한다.
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콰악-
달콤한 사과즙이 입 안에서 터져 나오며 내 미각을 즐겁게 한다.
절대 감각은 식도락에도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야 이, 쓰레기 새끼야!”
“어! 사과에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냥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다.
최소한 일곱 종류의 독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극독.
무색무취인 것으로 잘도 구해 놓았다.
“아! 생각해 보니 문제 있는 사과네요! 수련의 마지막 날에 혈마에게 쓰려고 만들어 놨던 건데!”
“개쓰레기 자식.”
“어쩔 수가 없잖아요. 이미 당신한테 너무 많은 걸 알려 줘 버렸으니까.”
한강혁이 나를 보며 히죽 웃는다.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놈이 쓰레기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서.
내 만독불침 특성이 풀가동되며 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강혁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쫘아아악!
나는 녀석의 따귀를 때렸다.
“살려 주세요!”
녀석의 입에서는 조건반사적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죽일까 말까 계속 고민을 해왔는데, 역시 죽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내 들었다.
한강혁 역시 뒷걸음을 치며 본인의 검을 소환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만약 절 죽이시면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왜? 네 스승 때문에?”
“크크. 알고 계시는군요.”
“그것 때문에 널 살려 뒀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그냥 죽이는 게 나을 거 같아.”
“당신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는데, 혈마한테는 절대 안 돼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는 게…….”
“그건 네가 걱정할 바 아니야.”
물론 믿는 구석은 있다.
천마신교의 부교주로부터 받은 인피면구.
이것은 감쪽같이 날 한강혁의 도플갱어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바로 인피면구를 얼굴에 착용했다.
[인물을 선택하십시오.]
“한강혁.”
스르르르.
내가 녀석의 이름을 읊조리자, 이 공간에는 두 명의 한강혁이 존재하게 되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강혁이 덜덜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 하하! 당신, 재미난 아이템이 있었네요? 그런데 얼굴만 바꾼다고 당신이 내가 될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또 뭔데?”
“혈마의 검술! 그걸 모르는 당신은 결코 내가 될 수 없어요.”
한강혁의 마지막 보루는 결국 수라마혈검이었다.
이 녀석, 나에게 두 번 죽을 운명이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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