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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는 탑 공략집-125화 (125/292)

125화

최정혁은 허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꼭 나한테서 형 소리를 들어야겠어?”

“어. 내기는 내기니까.”

사실 내기가 아니었다면, 녀석이 계속 반말을 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행동이 선을 넘는 녀석은 아니니까.

“젠장!”

“그리고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뭘 그렇게 억울해하냐?”

“여긴 사회가 아니라 탑이잖아. 강한 자가 형인 세상!”

“그러니깐 더 형이라고 불러야지. 인마.”

“젠장, 형!”

“뭐?”

“형이라고 형. 됐어?”

“좀 더 꼬장을 부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이건 뭐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라서 비벼 보지도 못하게 됐잖아!”

사실, 12층 부캐 미션을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다.

최정혁은 손서연과 일대일로 승부를 겨뤄 이기기도 했으며, 사실 나도 이놈을 상대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게임 시스템이 지배하는 이곳 탑에서 프로 게이머는 너무 사기적인 직업이었으니까.

‘또다시 사부의 은혜네.’

사부가 스킬에 의존하지 않도록 내 상태창에서 검술 스킬을 떼어 버린 것. 그것이 또 한 번 신의 한수가 되었다.

심득으로 각인 된 무영추혼검은 새로운 몸체인 부캐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수개월의 칼리아 여정동안 수련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최정혁보다 많이 강하다.

녀석도 그 차이를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당신, 아니 형. 정말 프로 게이머 아니야?”

“아니라니깐.”

“그게 아니라면 더 말이 안 되는데.”

“왜?”

“탑에서 프로 게이머보다 우월한 건 없으니까.”

“아는 만큼만 보이는 거라고 해 두자.”

녀석이 지금 착각하는 게 있다.

살성인 손서연만 해도 현시점에선 최정혁보다 강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둘의 격차는 좁혀질 공산이 적을 터.

물론 최정혁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야, 그냥 형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형님 어떠냐?”

“오그라들어. 무슨 조폭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빌려줄게. 불굴의 검.”

나는 인벤토리에서 불굴의 검을 꺼내 들었다.

정들긴 했지만, 이제는 엘리시온의 하위 호환.

체험판으로 잠시 빌려준 뒤 최정혁에게 적절한 가격에 팔 생각이다.

물론 적절함의 기준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빌려주면서 형님이라 부르라고?”

“어. 너 아니어도 이거 원하는 사람은 또 있을 테니까.”

“그래도 나한테처럼 형님 소리를 요구하진 않을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싫어?”

“형님.”

생각보다 최정혁의 납득은 빨랐다.

이 모습을 보며 오민아는 나를 향해 윙크를 날린다.

커플끼리 쌍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 * *

한동안 탑은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않은 채 우리에게 자유 시간을 부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자유가 진짜 자유는 아니다.

맘 놓고 자유를 만끽했다가는 숨 쉴 자유를 빼앗길 테니까.

수련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돌아온 본캐의 몸에 다시 적응하는 것.

다른 하나는, 칼리아에서 얻은 마법 스킬을 본캐에 새롭게 적응시키는 것.

그런 면에서 나는 좀 유리했다.

마법 스킬에 대해선 크게 고민할 게 없었기에.

그냥 사람들의 마음이 이따금씩 마음이 들려올 뿐이었다.

“캥!”

캥수와 스파링을 하며, 본캐의 몸에 적응하는 것도 이제는 거의 완료했다.

생각해 보니 유리한 것투성이다.

[이제 곧 16층이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12시간]

갑자기 전송된 탑의 메시지에 로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

“드디어 또 시작이네요.”

“빌어먹을 탑!”

다들 휴가를 마치고 부대 복귀를 앞둔 병사들처럼 썩은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리고 탑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6층의 테마는 폭렙의 장입니다.]

[여러분들은 정체되어 있던 레벨을 16층에서 대거 올리게 될 것입니다.]

“폭렙의 장?”

“그런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탑의 메시지에 의문을 표했다.

레벨이 올라간다고 탑에서의 생존이 수월해질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레벨이 올라간 만큼 앞으로 출현하게 될 몬스터는 더욱 강해질 것이며, 미션의 난도가 올라간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레벨을 대폭 올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부동산 폭등이랑 똑같은 거죠 뭐. 내 집값이 올랐어도 다 같이 올랐으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단, 각 로비마다 한 명은 구경꾼이 되어 16층 레벨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뭐?”

[16층이 시작되기 전, 구경꾼으로 남을 플레이어 한 명을 선정하십시오.]

[만약 구경꾼 선정에 실패한 로비는 전원 16층 레벨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탑은 무주택자 한 명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미친!”

“구경꾼이 된 한 명은 그냥 죽으라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그것도 우리 스스로의 뜻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

탑 어딘가에서 플레이어 간의 분열을 조장하며 즐기고 있을 또라이가 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다들 한탄 한마디씩만 뱉어 내고는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련이 될 리도 없다.

그저 멍하게 서로만 바라보고 있을 뿐.

나 역시 머릿속이 복잡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그 이유가 조금 다르다는 것.

‘혈마가 남긴 수정체가 문제로군…….’

절묘하게도 이 아이템을 쓸 수 있는 유효 기간이 16층뿐이니 말이다.

폭렙이냐, 아니면 혈마냐.

어느 쪽이 이득인지를 저울질해야만 했다.

물론 다른 동료들을 위한 희생은 고려 사항이 아니다.

내 몫을 손해 보면서까지 이타심을 발휘할 이유는 없으니까.

[공략집이 전송되었습니다.]

이 녀석, 아주 오랜만이다.

지난 15층에서는 나를 외면했던 아주 야속한 녀석. 하지만 다시 돌아와 주니 반가운 마음이었다.

[16층에서의 레벨업 기대치는 평균적으로 15 UP입니다.]

[혈마는 탑에서 수련을 하다 반(半)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입니다. 낮에는 정상인으로, 밤에는 미치광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살성 중 한 명이 현재 혈마의 제자로 들어가 검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

하지만 공략집은 내게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과연, 폭렙의 장이라 불릴 만은 하네.’

무려 15레벨가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곳.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16층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탑에서 낙오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혈마…….’

사부와 동급의 고수를 만날 기회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미 제자 하나를 두었다는 것은 나에게도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밤에는 미치광이라는 것이 살짝 걸리기는 하지만.

‘그리고 살성.’

이것 역시 흥미가 동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제가 구경꾼으로 남을게요.”

나의 선언에 다들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이호영 씨가요?”

“네. 제가 지원합니다.”

“왜죠? 이호영 씨가 가장 강하다는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이미 나에게 빚을 진 사람들.

지금 이런 반응은 진심이었다.

“물론 아무런 조건 없이 구경꾼으로 남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요?”

“네. 제 조건은 5만 골드. 그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으면 그 정도는 나올 겁니다.”

이는 내가 현자의 상태창으로 확인하며 계산한 수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5만 골드가 모이지 않는다면, 저의 제안은 무효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제안이 성사된다면, 저에게 부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공짜로 해 드리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다들 알잖아요? 저는 원래 레벨업 느린 거.”

나는 머리 위의 내 레벨을 가리켰다.

“호영이 형!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괜찮겠어? 폭렙이라잖아! 16층이 끝나면 형이 우리 로비의 최약체가 될지도 모른다고!”

“세용아.”

“왜!”

“그거 혹시 네가 바라고 있었던 상황 아니야?”

“무…… 무슨 소리야! 내가 형보다 강해진다고 배신을 할까 봐?”

“뭐, 꼭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궁금하긴 하네. 네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김세용을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말해 놓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 로비의 안정적인 역학 관계는 전적으로 나의 강함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형님! 나는 그 제안에 찬성.”

최정혁은 한껏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끼리도 골드 협정을 맺을 필요가 있을 거 같군. 현재 보유 골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금만 내는 건 불공평 하니까 말이야.”

녀석은 총대를 메고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다시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최정혁으로부터 42,000골드를 이전받았습니다.]

“여기 주목! 나 4만 2천 골드 냈어! 다들 얼마씩 냈나 기억했다가 나중에 정산받아 낼 거야!”

여기에 안세창과 서준호가 합세하여 동의의 뜻을 표했다.

[안세창으로부터 4,000골드를 이전 받았습니다.]

[서준호로부터 4,000골드를 이전 받았습니다.]

“또 한 번 이호영 씨에게 신세를 지게 되네요.”

“제가 한 말 잊었군요. 공짜가 아니니 부채 의식은 가질 필요 없다고.”

“그래도 말입니다.”

두 사람은 나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어떤 기분을 갖고 있을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바로 모두에게 선언했다.

더 이상 이 문제로 피곤해하지 않도록.

“5만 골드가 모였으니, 협상은 타결되었습니다. 약속대로 제가 구경꾼을 하죠.”

[16층의 구경꾼은 플레이어 이호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탑의 메시지에 채이설, 김세용, 고용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들의 우려와 달리 나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

5만 골드가 덤으로 생겼으니 말이다.

* * *

[16층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미션: 14일간 생존하십시오.]

폭렙의 장으로 명명된 이곳은 거대한 밀림.

시작과 동시에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우리의 앞에 쏟아져 나왔다.

곤충형 몬스터부터, 거대한 파충류형까지.

그야말로 몬스터 백화점이었다.

애앵!

애애앵!

내 머리 위에서 빙빙 도는 수십 마리의 모기형 괴물들이 거슬린다.

엘리시온을 휘젓자 이 녀석들은 바로 발밑에 뚝뚝 떨어졌다.

[당신은 구경꾼이므로, 경험치를 획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양아치 같은 탑이다.

‘14일이라…….’

몬스터의 물량이 이토록 폭발적이라면 2주간 어마어마한 사냥이 이루어질 것이다.

게다가 위험한 수준의 몬스터는 존재하지도 않으니 안정성도 확보된 곳.

나 외의 다른 플레이어가 구경꾼으로 선정되었다면 극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형님,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 아니지? 갑자기 5만 골드가 작게 느껴지는데.”

“5만이 작다고? 땅 한번 파 봐. 100골드 한 장이 나오나.”

“뭐, 형님이 만족했다니 그럼 된 거고.”

최정혁은 한껏 신난 표정.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불굴의 검을 휘젓고 다녔다.

그럼 이제 나도 슬쩍 자리를 좀 비워 봐야겠다.

- 12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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