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신기한 일이었다.
일일이 확인할 순 없지만 내 몸에 새겨진 검흔은 적게 잡아도 이백여 개.
진즉 죽었어야 할 몸이다.
‘피가 남아 있을 리도 없는데.’
방금 전 입은 상처에선 또 한 번 피가 왈칵 쏟아진다.
아프다.
정말 미칠 듯이 아팠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적을 베어 내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챙!
운 좋게 엘리시온으로 녀석의 검을 쳐 내는 순간엔 일시적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상처를 단 몇 초라도 유예시킨 셈이니까.
아마도 내 몸은 이미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걸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 죽어 가도록 라덴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젠장, 바로 협상을 시도할 줄 알았는데.
스으윽!
이번엔 또 가슴팍을 길게 베이고 말았다.
지독한 통증에는 도통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이젠 정말 죽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라덴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내가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내줘야 하는 것이 더 많아질 테니까.
심지어 협상의 대상은 인간이 아닌 마왕이다.
죽도록 아프지만 조금 더 견뎌야만 한다.
내가 죽기 전 최소 한 번은 반응이 올 것이다.
“이런 지독한 새끼!”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심판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라덴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순간 안도감이 밀려온다.
지금까지 버텨 준 내 정신력에 경의를 보내며.
“너 같은 새끼는 처음이야. 이 정도 당했으면 살려 달라고 빌어야 정상 아니냐?”
“당신의 신전을 박살 낸 죄. 달게 받을 생각이었으니까요.”
“미친 새끼.”
“그런 얘기는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미친 척 좀 하는 게 유리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더 갖고 싶어 미치겠잖아?”
저 뇌쇄적인 눈빛에 광기에 젖은 목소리.
온몸에 소름이 오돌도돌 돋아났다.
“너 말이야, 아직도 내 제안을 들어 볼 생각 없어?”
사실 미치도록 들어 보고 싶었다.
라덴의 마음을 미리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게 아쉬울 뿐이었다.
“어차피 거부할 제안인데 들어 봐서 뭐 하겠습니까?”
“왜 들어 보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하지?”
“제 영혼을 원하실 것 같아서.”
“그럼, 마왕이 인간에게 뭘 달리 원하겠어?”
“그러니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철벽같은 놈.”
“다른 건 몰라도 영혼은 안 됩니다.”
“야! 그 영혼, 내가 좀 가진다고 닳아 없어져?”
닳아 없어지진 않지만, 심각하게 오염될 것이다.
칼리아의 흑마법사들이 보통 그러했다.
한번 영혼을 판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한 것. 평생을 마왕의 노예로 살아야만 하며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이 된다.
정말로 마왕과 협상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 공략집은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인데.’
그건 분명했다.
공략집이 이 상황을 원했다는 것.
직접적으로 유도하진 않았지만, 내게 노선을 바꾸도록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야! 내가 진짜 마왕 체면에 한발 물러서는 제안을 해 보려고 하는데, 이건 들어 볼래?”
존버가 결실을 맺는 순간.
여기서 또 튕겼다가는 정말 골로 갈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들어는 보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와, 너 진짜 때리고 싶게 말하는구나.”
사실 말하면서도 뜨끔했다.
하지만 이런 스탠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필요하다.
물론, 라덴에게 고개를 숙여 사죄의 뜻을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영혼을 나한테 분할해서 넘기는 건 어때?”
“분할이요?”
“그래. 일단 오늘은 티끌만큼만 주고 나중에 또 필요할 때 날 찾으면 돼.”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생명 하나를 죽여. 그리고 그 영혼을 매개로 날 찾는 거야. 시련이 찾아왔으니 힘을 달라고 말이야.”
“물론 그 힘의 대가는 영혼입니까?”
“당연하지. 한 번에 다 넘기지 않아도 돼. 네가 힘을 원하는 만큼만 조금씩 넘기면 되는 거야.”
“제가 오늘 이후에 당신의 힘을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게 과연 될까? 한번 맛 들이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라덴이 혀로 자신의 입술을 훔치며 관능적인 미소를 보였다.
사실 솔깃한 제안이었다.
나의 의지에 따라 오늘 이후엔 영혼을 넘기지 않아도 되니까.
“그 제안, 받아들이죠.”
“철벽처럼 굴더니 갑자기?”
“방금 하신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내 대답에 라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비싸게 나오니 더 마음에 들어. 언젠간 말이야, 너는 완벽한 나의 소유가 될 거야.”
라덴이 나에게 걸어왔다.
발소리에 격한 긴장감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숨이 막혀 오는 듯한 위압감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내가 바로 너의 영혼 일부를 취하고 제약을 걸 테니까.”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만큼,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짚은 손을 뗄 때까지도 말이다.
“이걸로 됐어. 약속대로 아주 미약하게만 너의 영혼을 뽑아 왔거든.”
섬뜩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이며, 던져진 주사위인 셈.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난 너에게 약간의 마력을 선물하였지. 혹시 느껴져?”
“잘 모르겠는데요.”
“그럴 테지. 네가 나에게 준 영혼은 쥐꼬리만큼도 안 되니까. 이제부터 필요할 땐 언제든 날 찾아. 네 영혼 아주 후하게 쳐줄게.”
“뭐, 상황 봐서요. 그런데 한 가지 약속이 더 있었죠. 당신이 나에게 부여했던 심판. 이제 면제입니다.”
“물론이야. 그리고 선물 하나를 더 주지.”
라덴이 말한 선물이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배경이 칼리아로 변하며 여러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가 변화시킨 칼리아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약 200년의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말이다.
“어때? 만족스러워?”
그 질문에 나는 씨익 웃었다.
해낼 줄 알았다.
레나, 엘라 그리고 검종까지.
내가 그리던 칼리아의 미래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 * *
길었던 칼리아의 여정이 모두 종료되었다.
무려 4층이나 연계되었던 부캐 미션. 나는 탑의 로비로 돌아오자마자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꼈다.
오랫동안 부캐의 몸에 적응해 있었기에, 다시 찾은 본캐의 몸에 동기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캥! 캥!”
대기실에선 캥수만이 나를 맞이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지루했지, 캥수야?”
“캥??”
“뭐? 별로 지루할 것도 없었다고?”
“캥!”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 부캐 미션에선 족히 수개월은 소요되었고, 칼리아에 있는 동안 가장 걱정했던 게 캥수였다.
캥수 성격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혼자 보냈다가는 우울증에 걸리고 남았을 테니까.
“캥! 캥!”
녀석은 나에게 주먹질을 하며 장난을 걸어왔다.
딱 봐도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모습.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칼리아와 이곳 로비는 동일한 시간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나머지 동료들도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다.
퍼억-
생각이 깊어진 사이, 캥수의 주먹이 내 얼굴을 강타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캥수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캥!”
이걸 왜 못 피했냐는 제스처와 함께.
사실 나도 놀랐다.
오랜만에 본캐의 몸으로 돌아오다 보니 바로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캥수는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애교를 부리면서 봐달라는 건데, 인심 썼다.
몇 달 만의 재회이기도 하니까.
“알았어! 봐줄 테니깐 이것 좀 잠깐 놔 봐.”
“캥!”
당장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레나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인벤토리.
본캐와 부캐 사이에는 차원의 벽이 존재했는데, 과연 레나가 그걸 뚫어 냈을지가 관건이었다.
[2/2]
일단 놀랍다.
여전히 존재하는 저 메시지 창.
이제 아이템도 무사히 남아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어, 첫 번째 물품을 꺼냈다.
“캥?”
캥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엘리시온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녀석도 명검을 알아본 것.
이게 정말 가능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땡큐. 레나.
그리고 하나 더.
혈마가 있는 곳을 안내해 줄 수정체.
[로비에선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템은 16층이 종료된 뒤 소멸됩니다.]
곧 소멸 예정이란 문구가 있기는 하나, 수정체도 역시 무사했다.
레나의 천재적인 재능에는 소름이 돋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빌어먹을 탑을 탈출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달라고 할걸.
스르르르.
그런 뻘 생각이 든 순간 동료들이 로비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차는 있지만, 마지막 한 명까지 돌아오는 데에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동료들은 다들 나와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약간의 어지럼증.
그리고 칼리아와 탑 로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차에 대한 깨달음.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손서연이 없는데요?”
“설마 15층을 통과하지 못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요! 15층은 완전 날로 먹는 층이던데!”
날로 먹는 층?
다들 비슷한 반응이라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망할 라덴.
“손서연은 아직 살아 있을 겁니다.”
“이호영 씨는 혹시 뭐 아는 거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니잖아요?”
그 말엔 다들 동의했다.
손서연은 당분간 우리와 다른 곳에 탑의 미션을 수행할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피의 날이 되기 전까지는 나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이호영 씨, 그거 혹시…….”
“네 맞아요, 엘리시온.”
나는 엘리시온을 번쩍 들어 올리며 동료들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부캐 아이템이 이전되는 거였어요?”
동료들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본인들의 인벤토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살짝 민망한 마음도 든다.
이제 곧 실망의 탄식 소리가 들릴 테니까.
“아아!!”
“저는 다 없어졌어요!”
“저도!”
다들 나를 바라보았다.
왜 너만 되냐는 표정으로.
“아, 그게 레나가 저한테 인벤토리 하나를 주더라고요. 연구 중인 실험이라면서.”
“레나가 이호영 씨만요?”
“네, 딱 하나만 만들었다면서.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해서 저도 아쉽네요.”
“와 씨. 호영이 형. 진짜 운빨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세용아, 내가 15층에서 당한 고초를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거야.”
당시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갑자기 15층 생각을 하니 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야 이호영, 그럼 전에 쓰던 불굴의 검은 어떻게 하려고?”
최정혁이 내게 물었다.
프로 게이머인 녀석은 모든 아이템에 거의 올마스터.
이제 필요 없어진 내 불굴의 검을 탐내는 것이다.
“정혁아, 그런데 나한테 야, 이호영…… 이라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놈이 벌써 약속을 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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