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14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긴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내가 떠나고 난 이후의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역사를 바꾸어 놓는 일에는 성공했다.
본래대로라면 14층의 메인 테마는 전쟁.
하지만 검종은 잠시 복수를 보류하였으며, 당분간의 미래는 내가 안배해 놓은 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제 검종의 최우선 관심사는 전쟁이 아닌 수라마혈검이니까.
‘보고 있나? 조셉?’
결국 난 녀석의 후예들을 지켜 냈다.
이제부턴 부디 조셉의 가호가 검종에 깃들기를 바랄 뿐이다.
[15층으로 이동합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다.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15층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동안 칼리아에선 2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또다시 칼리아?
방금 전의 메시지는 그런 암시를 주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지난 세 개의 층은 시대만 달랐을 뿐, 모두 동일 배경.
이번에도 막연히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
‘14층과 같은 세계관이면 좋겠는데.’
궁금했다.
과연 검종은 그 후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 냈는지.
또한 내가 새롭게 전수한 수라마혈검을 이들이 어디까지 완성하였는지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14층의 칼리아는 마법의 황금기였는데, 15층은 혹시?
역사를 바꾼 입장에서 드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이기도 했다.
스르르르.
하지만 도착한 15층에선 내 예상과는 다른 배경이 펼쳐졌다.
완벽한 암흑.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무의 공간으로 인도되었다.
[15층의 미션은 업보의 정산입니다.]
[플레이어들은 그동안 칼리아에서 쌓은 행업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16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
게다가 심판이라는 단어에는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는 칼리아에서 악보다는 선을 많이 행했다.
무엇보다 전쟁을 막았다는 것은 웬만한 악의 행업도 거뜬히 덮고도 남을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라니, 역시 인간적인 관점에서 탑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앞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나는 메시지의 안내를 따라 암흑 속을 걸어갔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식별할 수 없는 심연의 어둠, 그 속에서 나는 방향과 시간에 대한 감각 모두를 잃고 말았다.
‘공략집은 아직인가?’
안타깝게도 공략집은 암흑만큼이나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끝까지 무소식으로 남는 것이 보통.
‘이번에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라는 건가?’
그동안 칼리아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과연 내가 심판받을 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같은 플레이어인 오두호를 죽인 일.
엘라가 이끌고 온 혈마대의 일부를 죽였던 일.
명망 높던 가가야로를 골탕 먹인 일
……그 외의 몇몇 생각들이 더 떠오른다.
하지만 심판을 받을 정도의 잘못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심판이라니.
이 빌어먹을 탑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곳이다.
* * *
[심판자가 현현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업보에 대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심판자.
어둠이 물러나며, 그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리시온을 꺼냈다.
검의 손잡이부터 검 끝까지 마력을 둘렀다.
상황을 봐서 바로 심판자의 목을 벨 수 있도록.
터벅터벅.
나는 앞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또각또각.
실루엣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며 점점 그 형체를 키워 간다.
사람의 모습이다.
정말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보다 작고 가녀리며 붉은 긴 생머리의 여자.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경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내뱉은 말이지만 멘트가 좀 별로다.
이 상황에서 처음 뵙겠다니.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처음이 아닐 텐데.”
“그럼, 우리가 구면이란 말씀이십니까?”
“뻔뻔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악한 미소.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비록 지금은 절대 감각을 사용할 수 없으나, 분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저 여자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다는 걸.
나는 엘리시온에 불어넣었던 마력을 거두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저의 심판자라는 것밖에는.”
구면일 리가 없다.
이 정도의 존재감은 칼리아에서 느껴 본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저의 업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제부터는 최대한 공손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으며 내 업보라 뒤집어씌울지라도.
“그렇게 큰 죄를 저질러 놓고도 짐작 가는 게 없나 보군.”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내가 칼리아에서 지은 가장 큰 죄라 한다면 살인을 한 것.
하지만 분위기상 이 여자가 그런 이유로 날 심판할 것 같지는 않다.
“혹시 제가 칼리아의 역사를 바꾸었기 때문입니까?”
인간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차라리 이쪽일 공산이 더 커 보였다.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
“아니, 헛다리 제대로 짚었어.”
“아닙니까?”
“난 인간들이 역사를 바꾸든 말든 그런 것 따위엔 관심 없어.”
“역시, 당신은 인간이 아니시라는 거군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나 봐? 그 정도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힌트가 될 것 같은데.”
인간이 아닌 존재라…….
내가 칼리아에서 인간 외의 존재를 대면한 적이 있었던가?
불현듯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갑자기 머리가 아찔해진다.
인간이 아니었던 존재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여기가 탑이라 해도 이건 개연성이 좀…….
‘그때 왜 공략집은 날 말리지 않았을까?’
격한 의문이 밀려왔지만,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엔 그렇게 했던 내 행동이 최선이었으니까.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그래? 알았으면 바로 대가리부터 박는 게 좋지 않겠어?”
고민이 된다.
정말로 지금 당장 대가리를 박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 이미 늦었어.’
차라리 뻔뻔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위대한 라덴이시어. 제가 당신의 신전을 박살 내었기에 이렇게 직접 알현할 수 있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살이 떨린다.
라덴의 강함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마치 사부를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
라덴은 내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뒤질래?”
“당신께서 절 죽이고자 하신다면, 기꺼이 목을 내드려야겠지요.”
날 바로 죽일 리가 없으니 과감하게 질러 봤다.
이번 15층의 테마는 업보의 정산.
어떤 식으로든 정산의 방법은 있을 것이며, 지금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이 새끼 봐라? 어차피 바로 안 죽일 거 알고 있다 이거지?”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말 돌리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파괴했던 라덴의 신전.
검종이 은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페이퍼 신전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 그들은 라덴을 숭배하지도 않았으며, 라덴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뭐라고 생각해?”
“그야 신…… 아니십니까?”
신전에서 모시는 존재. 신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내 앞에 현현했다는 사실이 좀 황당하긴 하지만.
“틀렸어.”
“……신 아니셨습니까?”
“아니래도! 라덴의 신전? 도대체 그딴 이름은 누가 붙인 건지 원.”
라덴은 나를 보며 다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너 말이야, 볼수록 탐이 나.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그녀는 내 얼굴을 손가락 두 개로 부비적거렸다.
소름 돋게 불쾌하지만, 차마 뿌리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새어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내 몸 전체가 억눌렸으니까.
“네게 부여될 심판, 면제해 줄까?”
“조건이 있을 거 같습니다만.”
“당연한 걸 뭘 물어.”
그 조건, 굳이 들어 보고 싶진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내가 받아들일 성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나랑 계약하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제야 난 라덴이 어떤 격을 가진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마왕.
“심판을 받겠습니다.”
“뭐야! 바로 거절하는 거야? 조건도 안 들어 보고?”
“이곳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업보의 정산이라 들었습니다. 굳이 요행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요행을 안 바란다고?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딱 봐도 넌 요행 그 자체인데.”
역시.
격이 마왕쯤 되면 나에 대해 간파하는 것이 가능한가 보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너에게 아주 좋은 조건이라니까?”
“안 듣겠습니다.”
“와 씨! 너 진짜 애간장 녹이는 데 뭐 있구나? 그럼 어디 한번 견뎌 봐. 네가 치러야 할 업보의 심판을!”
라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으며 주변의 배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칠흑 같은 암흑.
라덴의 까칠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 * *
공략집은 여전히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아직 위기가 아니라는 것인가?’
사실 동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미 왼손의 손가락 몇 개는 감각이 없는 상태.
한쪽 다리는 상처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암흑 속에서 나를 공격하는 존재가 있었으며, 나는 계속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어둠 속에서도 정교한 공격을 펼쳐 내고 있었다.
누굴까?
일단 라덴은 아니다.
강하긴 하지만 느껴지는 격이 그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있었다.
‘검!’
나를 공격하고 있는 무기가 검이라는 것.
스윽!
이번엔 어깨를 베였다.
눈으로 볼 순 없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렸다.
조금씩 정신이 혼미해진다.
탑에 들어온 이후 열네 개의 층에서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위기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적도 없었으며, 해답이 보이지 않은 적도 없었다.
15층이 되니 갑자기 난이도가 미쳐 날뛴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이런 식의 시련을 겪는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방식이라면 그 누구도 15층을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
칼리아에서의 업보라…….
이 빌어먹을 탑이 농간을 부렸다.
나에게 마왕을 매치시켜 버리다니.
“허업!!”
어떻게 공격을 해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오른쪽 발등에 관통을 당했다.
점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간다.
여전히 나는 제대로 된 방어도 펼칠 수 없었다.
무기력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시각의 제약이 이 정도로 치명적일 리가 없는데.’
단순히 시각의 제약뿐만이 아닌 광범위한 능력의 너프.
이건 말도 안 되는 난이도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탑이 나의 죽음을 바라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마왕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공략집이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침묵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게 맡기는 것이다.
죽음을 택할지, 아니면 마왕과 계약을 할지.
‘외통수로군.’
공략집은 내가 라덴의 신전을 파괴하는 걸 말리지 않았으며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처음으로 공략집 녀석이 요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략집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분명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마왕의 제안이 뭐였는지를 그냥 처음부터 들어 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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