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12층부터 15층까지 진행되는 부캐 미션.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부캐에서 본캐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법 스킬이며,
15층이 모두 종료된 이후엔 부캐가 가졌던 아이템은 본캐 쪽으로 이전되지 않는다.
그래서 레나에게 특별한 인벤토리의 제작을 부탁했다.
사실 그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만들었다고요?”
“운이 좀 따랐지. 히히.”
“아니, 아무리 운이 따랐다 해도…….”
“야, 만들어 달라고 한 놈 반응이 뭐가 이래!”
여전히 믿기지가 않으니까.
아무리 천재적인 레나라 해도 불가능할 거라 여겼다.
심지어 이렇게 빨리 만들어 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알겠어요. 그런데 그 인벤토리, 몇 개나 성공한 거죠?”
“딱 한 개. 만 번에 한 번 성공할까 말까 한 게 만들어진 거야. 두 번 다시는 못 해!”
만에 하나의 운, 그건 그렇다 치자.
“그게 다예요?”
“어. 내 느낌은 꽤 정확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레나의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이건 너무 막무가내다.
“어쨌든 수고하셨어요.”
“안 믿는 눈치네?”
“믿어요.”
“정말이지?”
“……네.”
“대답이 좀 늦네? 어쨌든 받아. 자, 이거!”
레나가 내게 붉은 보석 하나를 건넸다.
고작 달걀 하나 크기 정도의 물건.
하지만 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A급 마정석이 족히 백여 개는 사용됐을 정도의 느낌.
이 안에다 정말 많이도 때려 박았다.
이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레나의 놀라운 능력이긴 하지만.
“그걸 흡수하면서 기존의 인벤토리에 덧씌워 볼래?”
“해 보죠, 뭐.”
실패작이라 해도 별다른 사고는 없을 것이다.
레나가 그 정도 얼간이는 아니니까.
스르르르.
손에 마력을 불어넣자, 붉은 보석은 순간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보석이 머금던 마력이 인벤토리로 바로 빨려 들어간 것.
그렇다고 특별한 변화가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인벤토리에 전에 없던 메시지가 뜨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0/2]
“무슨 메시지가 뜨지 않았어?”
“보여요! ‘0/2’라는 숫자가.”
“하아! 고작 2개구나. 좀 더 많은 수량이길 기대했는데.”
“이 숫자의 의미는요?”
“차원 이동을 한 이후에도 보존될 수 있는 아이템의 수. 그런데 이제는 좀 물어보자. 도대체 이게 너한테 왜 필요한데?”
“살다 보면, 차원 이동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그게 이유야?”
“네.”
“……너 미친놈이지?”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벤토리에 메시지 창까지 뜨는 걸 보면, 레나가 나름 애를 써 본 것 같기는 하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을 거란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단 두 개의 아이템을 선택해 보기로 했다.
설령, 레나가 헛다리를 짚었다 해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
‘흐음.’
결정이 어렵진 않았다.
내 원픽은 엘리시온.
본캐가 가지고 있던 불굴의 검보다는 좀 더 우월한 성능, 거기에 검투사가 직업이다 보니 본능적으로 엘리시온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1/2]
선택을 하자 메시지 창에 바로 변화가 생겼다.
역시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다음 선택은 혈마가 카일의 협곡에 남긴 수정체였다.
혈마가 남긴 글에 따르면 이 수정체는 탑에서 혈마를 만나게 해 줄 매개체.
사부와 엇비슷한 경지에 올라선 이 초인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2/2]
이로써 선택 완료.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15층을 클리어한 이후에야 알 수 있다.
‘아직 14층도 못 깬 입장이긴 하지만.’
재판의 날이 오기 전 14층에서 할 일이 좀 많다.
퀘스트도 해야 하고, 두 제자 놈을 교육하는 일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거기에 내가 떠난 이후의 일들까지 신경을 쓰자면 하루를 정말 바쁘게 보내야만 할 것이다.
* * *
이번 부캐 미션을 수행하여 여러 인연들을 만났다.
투기장의 지배인 한스, 두 번의 사제 관계를 맺은 조셉, 현재 나의 고용인 레나. 그 외 내게 도움을 준 여러 인물들.
플레이어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NPC일 뿐이지만, 한편으로는 끈끈한 우정을 나눈 친구이기도 했다.
이들은 절대 정해진 말만 내뱉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마음>이라는 스킬로 들여다본 이들은 여느 플레이어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
희, 노, 애, 락.
이들 역시 인간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들을 똑같이 느꼈다.
누군가는 돈과 권력을 탐하기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성취욕과 향상심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두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두 명은…….
- 지금 이 시간을 참고 견뎌야 한다!
- 그 언젠가, 칼리아 전체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미래의 대의를 위해 현재의 숨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무려 오백 년의 세월을 이어 온 검종의 원한.
비록 시대가 변하고 구성원이 달라졌어도 오직 하나, 복수심만은 변하지 않았다.
“델라우. 발레론. 지금 당장 너희들을 풀어 준다면 무엇을 할 생각이냐?”
“당연한 걸 뭘 물어! 바로 검종 본단으로 돌아가 수라마혈검을 새롭게 보급해야지.”
“그다음에는?”
“때를 기다릴 것이다.”
“역시, 그 ‘때’란 칼리아에 대한 복수의 날인가?”
“그렇다.”
이들은 단호했다.
내게 검술을 배우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신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마스터의 자리를 노리지도 않는다.
오직 복수.
그것만이 이들을 움직이고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검종의 명맥이 끊긴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또한 우리의 운명이겠지.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어찌 복수를 꿈꿀 수 있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심지어 이들의 강철 같은 신념에는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
이미 칼리아는 찬란한 마법의 문명을 꽃피우고 있으며, 검투사들과는 그 격차가 너무 많이 벌어져 버렸다.
검종에서 혈마급의 고수가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이상, 대륙 전체를 상대로 복수에 성공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그래도 칼리아라는 거대한 바위를 더럽힐 수는 있으니 괜찮다. 어차피 우리가 더 큰 바위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 얘기는 결국 바위를 깰 생각이 없다는 거잖아.”
“그…… 그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상대가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우리의 신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눈물겹다.
이 정도의 신념이 있으니 무려 오백 년을 버텨 온 것이겠지만.
“바위를 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물이 되는 것이야.”
“그게 무슨 뜻이냐?”
“바깥에서 깰 수 없다면, 차라리 물이 되어 자연스럽게 바위의 틈새로 스며들어 가라는 이야기지. 틈새를 가득 채운 물은 결국 겨울이 되면 바위를 깨뜨릴 기회를 갖게 되거든.”
“어떻게?”
“간단해. 틈새 속에서 꽁꽁 얼어 버리면 되니까.”
발레론과 델라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그럴듯하군.”
“너희 검종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야.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잠깐은 더러워지겠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러니 길게 보고 방법을 달리 생각해 봐.”
“결국 우리더러 물이 되라는 것이냐? 말은 좋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무려 오백 년을 숨죽이며 지내 온 우리 검종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위의 틈새로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도와주지.”
나는 둘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벌이는 것은 훨씬 더 무모한 일.
이는 내가 평화주의자여서도, 박애주의자여서도 아니다.
나는 한 사람의 검투사이자, 수라마혈검의 계승자로서 이들을 응원하는 입장이고, 그저 확률 높은 일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겐 그 확률을 높여 줄 수 있는 막대한 재력이 있다.
‘일단 검투사들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우선.’
아주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어쩌면 한 세대 내에선 어려울지도 모른다.
칼리아 전반에 뿌리 깊게 내린 검투사에 대한 증오는 단번에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니까.
설령 이것이 오해와 음해로부터 비롯된 일일지라도 말이다.
이제부터 발레론과 델라우의 역할이 중요하다.
초석을 다지기 위해선 이 둘을 감화시켜야만 한다.
“다시 검이나 들어 봐. 오늘 제대로 만져 줄 테니까.”
* * *
“마탑을 떠나겠다고?”
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네. 아마도 이번 임무가 마지막이 될 겁니다.”
나는 칼리아라는 세계의 이방인이자 차원 여행자.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는 건 불가능하다.
“이렇게 갑자기? 혹시 재판 때문에 그러는 거야?”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본래 이쯤 떠날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계약했던 것이고.”
“조금만 더 있어 주면 안 돼? 더 이상 임무는 맡지 않아도 좋으니 말이야.”
그 말을 하고는 레나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려고 한다.
의도적으로 게으름을 피워 퀘스트의 진행률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언제 탑의 징벌을 받게 될 줄 모른다.
때가 되었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상책.
“미안해요. 그럴 수가 없네요.”
“나쁜 놈.”
순간 레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날 집요하게 잡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레나는 생각보다 빨리 체념을 했으며 나와의 작별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탑이 만들어 낸 조화일 것이다.
우리 플레이어들은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존재들이며 레나는 어찌 되었든 NPC니까.
비단 레나뿐만이 아니다.
내가 15층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이후에는 잠시 동안 나를 찾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나 좀 안아 줄래?”
레나는 예전부터 나에게 호감을 느껴 왔다.
굳이 <마음> 스킬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온다.
내가 떠난 이후에 탑에서 온 플레이어들은 줄줄이 그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묵묵히 수차례의 작별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탑은 조화를 부려 작별의 수용에 관여를 하게 되겠지만, 마음속에 남기게 될 흔적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 층마다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 123화에 계속 -